▲ 그림 박구원
경계의 모든 인연들을
쉬어서 무심하기만 하면,
천 가지 계산 만 가지 사량이
한 순간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처럼 녹아버리는 것이다


배우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열매 먹고 풀옷 입는다 해도
자기 마음 알지는 못할 것이다.
불법은 자기 마음 아는 것이지,
난행·고행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은
윤회계를 벗어나라는 것이다.
좋은 꿈 꾸라는 것이 아니라,
잠 깨고 일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천상·아수라·지옥 등의 육도가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 무심을 배워 모든 인연을 단박에 쉬고 분별망상을 내지 않으면, 나도 남도 없고, 탐진(貪瞋)도 없으며, 증애(憎愛)도 없고, 승부도 없다.

 만법이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앞에서 본 대로 한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따라서 일어나고, 한 마음이 사라지면 모두 더불어 사라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마음을 근본원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도 윤회계도 결국 마음이 일어난 것일 뿐이니, 한 마음 돌이키면 모든 상대적인 것들이 사라지고 만다. 바깥경계의 모든 인연들을 당장에 쉬어서 무심하기만 하면, 천 가지 계산 만 가지 사량[天計萬思量]이 한 순간에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처럼 녹아버리는 것이다[紅爐一點雪]. 하지만 무심해지려고 하는 것도 하나의 분별이기 때문에, 저절로 무심해져야지 무심해지려고 조작해서는 안 된다.

 

허다한 망상을 없애기만 하면 자성(自性)은 본래 청정하니, 곧 깨달음의 법을 수행하여 부처님과 나란히 될 것이다.

허다한 망상을 없애는 방법은 직하에 무심해지는 것이다. 마음자리는 망상을 없애고 없애지 않고 관계없이 본래 청정하기에, 굳이 망상하고 싸울 필요가 없다. 망상을 없애고 난 뒤에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망상과 관계없이 당장 무심해져서 본래 청정한 실상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미련하게 망상과 싸우면, 미래제가 다하도록 끝나지 않는다. 그 싸움 자체가 망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설사 널리 배우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나무열매를 먹고 풀옷을 입는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고 한다.

 불법은 자기 마음을 알자는 것이지, 난행(難行) 고행(苦行)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육조스님도 견성을 논할 뿐이지, 선정 해탈을 논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견성해서 전도몽상에서 깨어나자는 것이지, 꿈속에서 선정과 해탈을 지어가자는 것이 아니다. 백운(白雲)이 흩어지면 청산(靑山)은 절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괜히 조작하여 선정이나 해탈이라는 구름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조작하면 곧 불이법(不二法)에 어긋나므로,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그 어떤 수행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삿된 것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천마외도(天魔外道) 수륙제신(水陸諸神)이 되고 말 것이니, 이같이 수행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지공이 말하기를, ‘본체(本體)는 자기 마음이 짓는 것인데, 어찌 문자 속에서 구할까?’ 하였다. 지금 다만 자기 마음을 알아서 사량 분별을 쉬기만 하면, 망상과 번뇌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유마거사는 말하기를, ‘오직 침상 하나만 두고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지금 앓아누워서 반연을 모두 쉬어 망상이 그쳐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보리(菩提)다.

 

자기 마음은 알지 못하고 온갖 알음알이나 신통을 배워 부린다면, 그런 사람은 마왕 파순의 권속이 되어 공부인의 바른 수행을 방해하거나 삿된 데 빠져 땅과 물의 잡신이 되고 만다. 공부의 방향을 자기 마음 하나 밝히는 데 두어야지, 자칫 어리석게 밖으로 구하면 궁자(窮子)가 되어 오랜 세월 거지생활을 하며 헤매게 된다. 자기 마음은 본래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새삼 수행을 따로 가자할 것이 없다. 본래청정심을 믿고 모든 구하는 마음을 접어버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바보 멍충이 같겠지만 그 안에는 보리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0는 것이다. 달마대사도 ‘밖으로 온갖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이 헐떡이지 말라.[外息諸緣 內心無喘]’고 당부했다. 고인들은 한결같이 공부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다. 병들어 앓아누운 유마힐처럼, 복잡한 반연을 쉬고 사량분별을 그쳐버리면, 그 자리가 연꽃이 피는 정토로 드러난다. 그런 다음에야 온종일 분주해도 실제로는 조금도 분주한 바가 없으므로, 평상심으로 무애자재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만약 마음속이 어지러워 안정되지 않았다면, 그대가 비록 삼승(三乘) 사과(四果) 십지(十地)의 모든 지위를 배워 이르렀다 해도, 끝내 범성(凡聖)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모든 행위는 끝내 무상(無常)으로 돌아가고, 세력도 모두 때가 되면 끝나고 만다. 마치 공중으로 쏜 화살이 힘이 다하면 땅에 도로 떨어지는 것처럼, 생사의 윤회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이와 같은 수행은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고통만 받을 뿐이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삼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여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사과를 얻고, 나아가 보살의 십지를 얻는다 하여도 끝내 범성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생전에 복덕을 지어 윤회계의 상위층인 천상에서 복락을 누린다고 해도, 지어놓은 것을 다 까먹으면 다시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은 윤회계 안에서 올라가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벗어나라는 것이다. 잠속에서 좋은 꿈을 꾸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잠을 깨고 일어나라는 것이다. 잠시 즐거운 꿈을 꾼다 하더라도, 잠이 지속되면 결국 악몽이 덮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하여 무심을 지으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조작된 무심은 결국 다시 깨지고 분별망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무심·유심을 벗어난 본래무심을 증득하라는 것이다. 한 번 잠에서 깨면 늘 드러난 이 일 외에 달리 다른 일이 없다. 공부인이 잠시 무심의 맛을 보았다 하더라도, 이치로 따지려들면 즉시 생각의 구름 속에 갇히게 되어 다시 깜깜해지고 만다. 뭔가 경험했더라도 모두 내려놓고 세월을 보내며 기다릴 줄 알아야, 확철하게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분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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