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박구원
볼 수 있는 것을 법이라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 하며

부처·법 함께 없는 것 ‘승’

 

정진해 깨달은 사람이 ‘승려’

부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

 

눈앞에 법 살펴 깨달으면

집착하라 마라 할 것 없이

저절로 구하는 바 끊어진다

 

본래 마음자리에는 그 무엇도

법이라 정해진 것 없어서

깨닫기 전에는 불·법·승도

망상이고, 마음을 열면

일체가 불·법·승이다.

마음은 결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다른 견해도 없다. 부처라는 견해를 내기만 하면, 바로 중생이라는 견해도 따라서 일어난다.

마음은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교법을 설명하기 위해 마지못해 일컬은 ‘부처’나 ‘중생’이라는 말인데도, 어리석은 중생은 그런 말들이 마치 실체가 있는 양 집착한다. 부처라는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중생 되는 소견이다. 부처를 구하면, 즉시 ‘부처 아닌 것’ 즉 중생이 따라붙는다. 부처는 중생과 함께 양변을 이루기에, 불이법(不二法)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을 함께 놓아버려야, 중도인 한 마음이 드러난다.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 영원불변 하다는 견해[常見]와 단멸한다는 견해[斷見]가 바로 두 철위산을 이루어 견해의 장애를 받게 된다. 따라서 조사들께선 일체 중생의 본심(本心)과 본체(本體)가 본래 부처여서, 닦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를 밟아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밝음도 어둠도 아님을 바로 가리키신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무차별이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고 했다.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부처다. 조사들께선 이 사실을 바로 가리킬 뿐, 에둘러 설명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설명하면 알음알이만 심어주게 되지만, 직지하면 언하에 깨닫는 기연이 발생하든지 아니면 의심을 더 깊게 만들어서 돈오의 기연을 앞당겨주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냥 마음이어서, 닦아서 증득하는 것도 아니고 단계를 밟아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을 소화할 수 없어서, 도대체 공부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다고 불평하기 쉽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공부의 요점이 있어서, 진실 된 공부인은 이 한 마디에서 마음의 정체를 파악하고 공부의 바른 길로 접어들게 된다.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도 없으며,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둠도 없다. 그러므로 무명(無明)도 없으며 또한 무명이 다함[無明盡]도 없다. 우리 이 종문에 들어와서는 누구든지 뜻을 간절하게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것을 이름 하여 법이라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부처와 법이 모두 함께 없는 것을 승(僧)이라고 한다.

허공 자체에는 밝음도 없고, 어둠도 없다. 빛이 있으면 밝아지고, 빛이 없으면 어두워질 뿐이다. 밝음과 어둠에 상관없이 허공은 텅 빈 그대로 여여하다. 그래서 본래 마음자리에는 무명이라는 어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명이 다함이라는 밝음까지도 함께 없다. 그러면서도 인연 따라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 그 자리에는 무엇이라도 이름을 붙일 수 없으므로, 법도 없고 부처도 없다. 부처와 법이 다 함께 꼭지 떨어진, 그 모습을 승려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승려는 정진하여 깨달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있다. 선(禪)은 이런 면에서 가차 없이 바른 말을 한다.

 승마저도 됨이 없다면, 또한 일컬어 일체삼보(一體三)라 한다.

 불·법·승 삼보가 일체라는 것은 깨달음의 당처에 계합한 것을 말한다. 그 자리에는 불·법·승이 이미 무차별이다. 부처와 법은 물론 승이라고 할 것도 없다. 여기에 계합한 사람은 이미 삼보에 귀의를 했나니, 새삼 승이 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대저 법을 구하는 이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서,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이미 다 드러나 있는 법을 깨닫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없는 법을 만들어서 가지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법을 바르게 살펴서 깨달으면, 집착하라 마라 할 것도 없이 저절로 구하는 바가 끊어진다. 그래서 영가대사는 ‘증도가’에서 “배움을 끊고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없애지도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고 노래한 것이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랄 것도 없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랄 것도 없으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승이랄 것도 없다.”

 삼승십이분교에서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라고 강조하지만, 일불승의 최상승 도리는 모든 문자를 싹 쓸어버려도 전혀 시비가 일어나지 않는다. 문자라는 상(相)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자리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법이라고 정해진 것이 없어서, 불·법·승 삼보조차도 세우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일체삼보에 진실 되게 계합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일단 계합한 사람에게는 두두물물이 불·법·승 삼보라서 하나라도 버릴 게 없다. 깨닫기 전에는 불·법·승도 망상이고, 마음을 열면 일체가 불·법·승이다.

 8. 진리의 도량

 배휴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지금 법을 말씀하고 계시거늘, 어찌하여 승(僧)도 없고 법(法)도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배휴는 아직도 말에 떨어져, 황벽스님 말씀의 낙처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보기에는 지금 황벽스님이 곧 승이며 또한 그 말씀이 법인데, 어째서 승도 법도 모두 없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또 묻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아직 의심을 해결하지 못한 배휴의 처지가 답답한 노릇이긴 하지만, 뒷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맙게도 그 덕분에 걸출한 선사인 황벽스님의 자상한 답변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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