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곧 경계가 잊혀지고
마음이 저절로 사라져
다시 찾을 바가 없다.

▲ 그림 박구원

생멸(生滅)이 적멸(寂滅)하면,
적멸이 위락(爲樂)이 된다.
공부가 되면,
무심을 짓는 게 아니라
저절로 무심이 되는 것이다.

방편으로 욕계·색계·무색계
삼계는 불타는 집과 같아
빨리 벗어나라 했지만,
사실 삼계가 그대로 법계라
따로 벗어날 삼계란 본래 없다.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구하는 것을 일러 ‘가리왕(歌利王)이 사냥놀이를 좋아함’이라 한다. 마음이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곧 인욕선인(忍辱仙人)이며, 몸과 마음이 모두 없음이 곧 불도(佛道)다.

〈금강경〉 ‘이상적멸분’에 가리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수보리여, 인욕바라밀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옛날 가리왕이 나의 몸을 베고 끊었을 때, 나는 아상도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없었느니라. 내가 마디마디 사지를 끊길 그때, 아상이나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숲속에서 인욕선인이 되어 수도할 때, 성질이 교만하고 포악한 가리왕이 사냥을 나갔다. 왕이 잠든 사이, 산책하던 궁녀들이 나무 아래 앉은 선인의 청정한 모습에 감복해 법을 청해 들었다. 잠이 깨어 그 모습을 목격한 가리왕은 질투를 일으켜, 선인의 인욕행을 시험하고 나섰다. 왕은 선인의 귀와 코를 자르고, 마침내 팔다리까지 잘랐다. 그러나 선인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오히려 화가 난 용신이 왕을 해치려는 것을 말렸다. 이 일을 인연으로 왕의 탐진치 삼독을 끊어주는 자비를 베풀려고 했던 것이다. 왕은 깊이 뉘우치고 궁으로 돌아갔다.

마음이 밖의 대상에 반연하여 일어나 집착하면, 이는 사냥놀이를 좋아하는 가리왕과 같은 꼴이 된다. 반대로 마음을 쉬고 안으로 본래 자리에 가만히 계합하면, 인욕하는 선인이 된다. 마음이 밖으로 나서면 외도가 되어 포악해지고, 안으로 인욕하면 정진하여 자비로운 선인이 된다. 결국 한 마음이 일어나 밖으로 떠돌면 집을 나가 고생하는 것과 같고, 안으로 돌아와 본심과 하나가 되면 자기 집에서 편안히 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진정한 수행이란 상(相)이 떨어진 ‘무념(無念)의 염(念)’을 일컸는다. 육조스님은 ‘무념을 종(宗)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이는 단순히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루종일 생각을 일으켜도 일으킨 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본래 일으킨 적이 없는 성품을 스스로 요달하고, 저절로 무념이 되는 인연에 나아가서 공부하는 것이 ‘무념의 염’이다. 이것은 무념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성품을 보아 본래무념과 계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스님께서 견성을 제일로 치신 것이다. 그런 공부 인연에 나아간 것이 정진의 참모습이다. 이것을 ‘무수(無修)의 수(修)’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아직 공부를 지어가고 있는 흔적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흔적까지도 다 지워버린다. 자성을 요달하고 확철대오 했을 때, 비로소 정진다운 정진을 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정진하고 싶다고 해서 정진하는 게 아니다. 정진하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삿되고, 어리석어지기 쉽다. 그래서 눈을 떴다 하더라도, 공부한 사람들끼리 서로 비춰 탁마하면서 좋은 인연으로 거듭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분이다.

 

14. 무심행

 

배휴가 물었다.

“만약 무심을 행(行)한다면, 이 도를 얻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무심이 바로 이 도를 행함이거늘, 다시 더 얻고 말고 할 것이 있겠는가?

 

무심이 바로 도를 행함이라 할 때, 이 무심은 마음을 없애서 만드는 무심이 아니다. 마음은 있다 없다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다. 무심이란 본래 무심으로 뭘 하고 안 하는 입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본래 무심은 다시 더 얻고 말고 할 것이 없는 무소득이다.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모든 헛된 노력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잠깐이라도 한 생각을 일으키면 곧 경계이다.

 

무심이면 그대로 온전한 것인데, 거기서 무심을 행해야지 하는 한 생각을 일으키면, 이렇게 생각으로 지은 무심이 오히려 경계가 된다. 무심이라는 생각조차 없어야, 비로소 무심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곧 경계가 잊혀지고 마음이 저절로 사라져 다시 찾을 바가 없다.”

 

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자각하면 저절로 사라진다. 생멸(生滅)이 적멸(寂滅)하면, 적멸이 위락(爲樂)이 된다. 공부가 되면, 무심을 짓는 게 아니라 저절로 무심이 되는 것이다. 한 생각 돌이켜 마음자리에 계합하면, 그것으로 안심하고 절로 일이 없어진다. 무심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저절로 무심해져서 아무 일이 없게 되는 것이 바른 공부다.

 

15. 출삼계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삼계(三界)를 벗어나는 것입니까?”

 

방편으로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는 불타는 집과 같아서 빨리 벗어나라고 했지만, 사실 삼계가 그대로 법계라서 따로 벗어날 삼계란 본래 없다.

 

황벽스님이 말했다.

“선과 악을 생각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삼계를 벗어난다.

 

선과 악을 생각지 않으면, 자성이 요달된다. 자성이 요달되면, 선이나 악이라는 허망한 그림자에 끄달리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 자리가 바로 삼계를 벗어난 당처다. 알고 보면 삼계라는 것도 중생의 욕망의 불을 꺼트리기 위해 짐짓 빌려와 사용하는 방편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라는 생각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몰록 본래면목을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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