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은 본래 무위법
무심 알아 홀연히 깨쳐야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면,

▲ 그림 박구원

변견(邊見)에 떨어져
불이법의 중도에 어긋난다

망상은 실체가 없지만
근본 모르면 상(相)에 떨어져
허망한 그림자에 매달려
마음이 동요하게 된다

망념을 알아챘을 때,
그 자각이 바로 부처다

 

 

이 하나의 문(門)을 얻는 것을 이름 하여 무위법문(無爲法門)이라 한다.

 모든 부처님께선 오직 ‘한 마음’의 법만을 전하셨는데, 그것은 모양이나 색깔로 드러내 보일 수 없어서 다만 마음에서 마음으로 묵연히 계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법문을 무위법문이라 한다. 반면에 주객의 양변이 갈라져서, 주관이 객관을 상대하는 것은 유위법(有爲法)이다. 세상사는 대부분 주관이 작위를 일으켜 대상을 지배하고 조종하려 하지만, 불법은 무위법이라서 본래 부처인 한 마음에 묵연히 계합해서 그 흐름을 타는 것이다.

 

만약 이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무심을 알아 홀연히 깨쳐 체득해야 한다. 만약 애써 배우려고 하면, 그럴수록 더욱더 멀어진다.

 함이 없는 무위법문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다만 우리의 마음이 본래 무심인 줄을 알아서 모든 작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들의 마음자리는 본래 무심이라서 따로 무심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저절로 무위법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위법이 익으면, 비록 함이 없지만 되지 않는 일이 없게 된다. 매사가 순리대로 임운등등 흘러가는 것이다. 다만 중생이 이 말을 배워서 그렇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알음알이를 일으켜 무심을 만들려고 하면, 그럴수록 본래 무심과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본래 그런 줄 알고 헛노력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황벽 스님은 다만 무심을 알아 홀연히 깨쳐 체득해야 하지, 말을 배워서 따라 하려고 하면 벌써 방향이 반대로 가버린다고 하는 것이다.

 분별하고 취사(取捨)하는 마음이 없어서, 목석 같이 되어야 비로소 도를 배울 자격이 있다.”

 분별하는 마음과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생기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변견(邊見)에 떨어져 불이법의 중도에 어긋나게 된다. 마음이 무심해져야 비로소 도를 배울 분(分)이 있는 것이다.

 

배휴가 물었다.

“지금 갖가지 망념이 나타나는데, 어찌 없다고 하십니까?”

 배휴는 만들어진 그림자에 끄달려서 ‘있다 없다’ 하는 양변에 걸려있다. 일어나는 망상은 허망한 것이어서, 그 실체가 없다. 그러나 근본을 모르면 상(相)에 떨어져서 허망한 그림자에 매달려 마음이 동요하게 된다. 구름이 지나가건 바람이 불건 허공은 언제나 텅 비어 여여하다. 빈 바탕의 성품을 볼 줄 모르면, 그만 상에 나가 떨어져 있다 없다는 시비를 그칠 수 없는 것이다.

황벽 스님이 말했다.

“망념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그대의 마음이 허망하게 일으킨 것이다. 그대가 만약 마음이 부처임을 안다면, 마음에는 본래 망상이 없다. 어찌 마음을 일으켜 다시 망념을 인식하려 하는가?

 본래 부처인 줄 깨닫는 순간에, 허망한 모습들이 본래 없던 것임을 알게 된다. 늘 실체가 분명해서, 이 자리를 떠나서 또 다른 모습이 있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찾고 구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말로 하자니까 이런 저런 설명을 하게 되지만, 이 말을 언하에 알아먹고 말없이 끄덕끄덕 하고 그쳐야 한다. 알음알이로 머리를 굴려서 이해하려니까, 끝없이 질문이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선지식과의 문답에선 모르면 즉시 의심으로 전환하여 그것을 소화해내려고 참구해야 하는 것이다. 공부가 오랫동안 순숙해져서 깊어지고 넓어지면, 스승 말의 낙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이런 공부법이 후대에 간화선으로 정형화되게 되는 것이다. 간화선에선 의심이 생명이다. 의심이 의정을 거쳐 의단으로 익어 터지면, 화두의 낙처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마음을 내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자연히 망념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하루 종일 대상을 상대해서 마음을 일으켜도 본래 마음자리는 늘 여여함을 알면, 마음이 일어나건 조용하건 상관이 없어진다. 그림자에 끄달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모르고 대상에 끌려 나가 마음을 일으키면, 온갖 시비 분별이 그칠 날이 없다. 아는 사람에게는 망상조차 묘용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겐 묘용조차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심생(心生) 즉 종종법생(種種法生)이요, 심멸 즉 종종법멸”이라고 한 것이다.

 

배휴가 물었다.

“지금 바로 망념이 일어날 때,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선지식께 쉽게 물어보기 어려운 말을 배휴가 대신 해주고 있다. 이런 질문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부 과정에서 한 번쯤 품었을만한 것이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데, 망념은 왜 일어나는지? 망념이 일어날 때, 본래 부처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그대가 지금 망념이 일어난 것을 알아챘을 때, 그 자각이 바로 부처다. 만약 망념이 없다면, 부처 또한 없다.

 교학에서는 설명하기 위해 번뇌와 보리를 배대시키고, 중생과 부처를 배대시키지만, 선(禪)에서는 번뇌가 바로 보리요,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직지할 뿐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망념 있는 곳에 부처 있고, 망념이 없으면 곧 부처도 없다. 본래 마음자리에는 무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무명이 다함도 함께 없다. 언제나 양변을 함께 막아서, 불이(不二)의 당체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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