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불 스님의 완릉록 선해 〈25〉

▲ 그림 박구원
견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공부다.

견해만 없으면

마치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로워진다.

 

청정한 보리자성은

누구나 갖추고 있지만

한 생각을 일으켜

이것저것을 분별하고

헤아리기 시작하면,

천지현격으로 벌어지고 만다.

 

도는 어려울 것이 없어서

다만 분별하고 취사선택하는

것만 그만 두면,

자연히 통연 명백해진다.

 

 만약 불도(佛道)가 배우고 닦아서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전혀 옳은 견해가 아니다.

부처님의 도는 닦거나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어서,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여 이미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머리가 자기가 본래부터 머리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마음이 하는 것이지, 이 마음을 떠나 달리 신통한 무언가가 없다. 하지만 이 마음을 한 번 확철하게 확인해야, 비로소 전도망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냥 다 마음이 하는 일일뿐이라고 치부하고 만다면, 그것은 단지 알음알이의 구름만 짙게 만들어 전도몽상만 더 강화시켜줄 뿐이다. 그런 사람은 일천 부처가 오셔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본심과 계합하고 무명 칠통이 터져나가야, 비로소 안심입명처가 드러난다.

 

혹은 한 기연이나 한 경계를 보이기도 하며, 눈썹을 치켜뜨거나 눈을 부라리기도 하여, 어쩌다 서로 통하기라도 하면 곧 ‘계합하여 알았다’거나 ‘선리를 증득하였다.’고 말한다. 홀연히 어떤 사람을 만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며, 혹 남을 만나 어떤 도리라도 얻게 되면 심중으로 기뻐하기도 한다. 만일 상대에게 설복 당하여 그보다 못함을 알게 되면 속으로 슬프고 섭섭해 하니, 이러한 마음자세로 선을 닦는다면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자기 본분사도 밝히지 못한 사람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선문답의 겉모양을 배우고 의리선(義理禪)을 익혀서, 짐짓 눈뜬 분들의 흉내를 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 아마 황벽스님 당시에도 그런 뜨내기들이 있었던가 보다. 부처님 옷을 걸치고 부처님 말씀을 팔아먹는 가짜는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엄격하게 자신을 돌아보면, 불법을 배우는 생사일대사가 그런 흉내나 내는데 있지 않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며, 스스로의 양심을 속일 수는 없다. 차라리 건해지를 다 던져버리고 언제나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공부인의 바른 자세다. 고봉화상은 선의 삼요(三要)에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꼭 필요하다고 하였다. 초발심으로 돌아가 심기일전하고, 분심을 내어 재도전하는 것이 엉거주춤하니 알음알이에 기대어 허송세월 하는 것보다 더 요긴하고 바람직한 길이다.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어서, 한 생각 돌이킬 수 있는 공부인이 진정으로 귀한 사람이다.

 

비록 그대가 자그마한 도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마음으로 헤아리는 법일 뿐이요, 선도(禪道)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달마스님께서 면벽하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견처(見處)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 공부는 견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견해만 없으면 사방팔방이 텅 비어서, 마치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로워진다. 그 어떠한 대단한 도리라도 조금이라도 알았다고 쥐고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마음은 즉시 어두워진다. 그 자리에는 한 법도 세울 수가 없다. 방거사도 ‘있는 것도 없이 해야 하는데, 어찌 없는 것을 있다고 하랴.’ 하였다. 달마대사께서 면벽하신 것도 이 마음이 외도로 치달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보인 것이다.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이 헐떡이지 않아서, 마음이 장벽처럼 딱 멈춰야 비로소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밖으로 무언가를 찾아 나서면 견처를 가지게 된다. 견처는 상(相)이 되어 마음을 생각으로 가두는 무명 칠통이 되는 것이다. 그 칠통을 타파하기 위해 시설한 것이 조사관이다. 역대 조사스님네의 말씀은 단칼에 무명을 끊어주는 반야검이다. 그 일구(一句)에 의심이 사무치면, 분별망상이 오도 가도 못하고 녹아내리는 것이다. 오직 무명 칠통을 타파해야만 본지풍광이 드러난다. 악몽은 잠에서 깨어나야 해결되지, 꿈속에서 아무리 꿈 깨는 법을 토론하고 이해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말하기를 ‘헤아림을 잊는 것은 부처님의 도이나, 분별 망상은 마구니의 경계다.’고 하였다.

 

본래 청정한 보리자성은 누구나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불법은 만천하에 분명히 드러나 있어서, 다만 자기 눈을 스스로 가리지만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다. 하지만 한 생각을 일으켜 이것저것을 분별하고 헤아리기 시작하면, 천지현격으로 벌어지고 만다. 그래서 다만 오염시키지만 말라고 그처럼 간곡히 당부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자리에 계합된 사람은 작용에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아서, 하루 종일 작용해도 작용한 바가 없게 된다. 달마스님이 얘기한 단식이라는 것도 음식을 끊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먹어도 먹은 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먹을 때나 먹고 난 뒤에 집착이 없어서, 다만 먹을 때 먹을 줄 알 뿐이다. 이것이 공부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먹을 때조차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망상을 피우므로,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음식에게 먹히고 있는 것이다. 중생은 평등법을 모르고 좋으면 좋은 데 집착하고 싫으면 싫은 것을 버리려 하다 보니, 그만 마구니 경계에 사로잡혀 허망해지고 만다. 승찬스님은 도는 어려울 것이 없어서 다만 분별하고 취사선택하는 것만 그만 두면, 자연히 통연 명백해진다고 하였다.

 

이 성품은 그대가 미혹했을 때에도 잃는 것이 아니며, 깨쳤을 때에도 얻는 것이 아니다.

 

성품은 늘 여여해서 얻는 것도 아니고, 잃는 것도 아니다. 허공이 해가 뜨고 지는 인연 따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것처럼, 성품도 업에 따라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할 뿐 그 업에 물드는 바는 없다. 정진력을 갖춘 공부인도 선악의 인연에 따르되, 물드는 바가 없이 의연하게 살아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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