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불 스님의 완릉록 선해 〈15〉

▲ 그림 박구원
 종일 말하면서도 일찍이 말한 적이 있던가? 종일 들으나 언제 들은 적이 있던가?

하루 종일 얘기한다 해도, 근본자리에서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하루 종일 들어도, 근본자리에서는 한 마디도 들은 적이 없다. 밝은 거울에 사물이 비췄다 지나가듯이, 여여부동한 그 자리에 만사가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세존께서 49년 설법하셨어도, 한 글자도 말씀하신 적이 없는 것이다.

 

마음을 알고 쓰면, 인생 백년 삼만육천 일 아침마다 다만 이 자리의 반복일 뿐 달리 다른 일이 없다. 하루하루가 무상히 흘러가지만, 그 흘러가는 자리는 일찍이 조금도 움직인 적이 없는 것이다. 늘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그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석존께서 평생을 설법하셨어도, 실상으로는 한 글자도 말씀하신 바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지혜를 밝혀 이 자리를 잘 알고 쓰면, 삶은 풍요로워지고 매사가 순조로워진다. 한편으로는 활발발하게 매사를 처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자유롭고 여유 있게 지내는 것이다.

 

배휴가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깨달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황벽스님이 대답했다.

“깨달음에는 일정한 처소가 없다.

 

황벽스님은 배휴를 법거량이나 선문답의 형식으로 대하지 않고, 특별히 묻는데 따라서 자세하게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런 질문에는 바로 입을 막아서 즉시 의심에 걸리게 하는 방편을 많이 쓴다. 깨달음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국한되지 않고, 동서남북 상하에도 구애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도 본래 자리에서 연기법에 의해 일어나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라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라 해서 깨달음을 잃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몸으로 얻지 못하며, 마음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니, 일체 중생이 그대로 깨달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온 세상이 한마음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 달리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부처라 해도 별다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고, 중생이라고 해도 깨달음을 벗어나 있지 않다. 다만 부처는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이고, 중생은 아직 못 깨닫고 있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실상으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한 치도 차이가 없이 동일한 것이다. 일체 중생이 있는 그대로 깨달음의 모습을 지니고 살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보리심을 발합니까?”

 

배휴는 궁금한 것이 많다. 중생이 이미 그렇게 완벽하게 깨달음의 당처에서 살고 있는데도 보리심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보리심을 잘 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완벽한데 달리 보리심을 더하여 일으킬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일 수도 있다.

 

“보리는 얻을 것이 없다. 그대가 지금 다만 얻을 것이 없다는 마음만 내라. 결정코 한 법도 얻을 수 없다면, 즉시 보리심이다.

 

보리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얻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본래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으려고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머리가 머리를 찾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중생은 업의 그림자에 가려서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선지식과의 인연에 힘입어 전도몽상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리는 머물 자리가 없기에, 얻을 그 무엇도 없다.

 

우리들의 마음은 본래 머무는 바가 없다. 그렇기에 깨달음이란 얻고 잃고 하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머무는 바가 없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착하여 집착하면, 실상에 어긋나기에 고(苦)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뭇잎이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이 머무는 바가 없는 흐름을 타고 가면,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위(無爲)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연등불의 처소에 있을 때 조금도 얻을 법이 없었기에,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授記)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일심(一心)의 불이법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므로 이심전심으로 전해진다. 사실은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전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 육조스님은 “우리들의 보리자성이 본래 청정하고, 본래 생멸하지 않으며, 본래 구족하고, 본래 동요가 없으며, 그래서 능히 만법을 낸다.”고 하신 것이다. 본래 완벽하니 그 위에 조금도 더할 것이 없는 것이다. 머리에 머리를 더할 것이 없고, 부리에 부리를 더할 것이 없다.

 

일체 중생이 본래 보리임을 분명히 알아서, 마땅히 다시 보리를 얻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일체 중생이 본래 보리를 구족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되면, 애써 밖으로 향해 달려 나가는 치구심(馳求心)이 쉬어지게 된다. 무엇인가를 찾아 밖으로 구하는 것이 곧 외도(外道)다. 찾고자 하는 이 마음이 곧 본래 구족한 본심임을 굳게 믿어서, 함이 없는 ‘무위’의 길로 접어들어야 비로소 선(禪)을 공부할 분(分)이 있게 되는 것이다.

배휴는 알음알이가 많아서 지적 분별작용을 쉬지 못하니 자꾸 묻게 되는데, 이런 배휴에게 꼭 필요한 것이 ‘뭔가 얻을 경지가 있어서 깨달아 얻어야 한다.’는 착각을 스스로 알아채는 것이다. 그 착각을 깨주기 위해서 황벽스님이 그렇게 간곡하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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