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불 스님의 완릉록 선해 〈7〉

마음의 눈 못뜬 입장에선

성품봐야 ‘정등·정각’ 확인

▲ 그림 박구원

말로 표현 못해 ‘불가사의’

 

모양은 인연 따라 드러나

범부는 겉모습에 속아서

간택하며 얽매인다

마음자리 분명히 봐야지

더이상 흔들리지 않아

 

“모든 부처님과 일체중생

한마음 일뿐 다른법 없다”

32상 형상, 80종호 색깔

만법이 평등하므로 ‘불이법’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실로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아뇩보리’라 한다.

 불법이란 어떤 법을 새삼 얻어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있는 법을 확인한 것일 뿐, 없는 무엇을 찾아서 구해온 것이 아니다. 원래 있는 것을 스스로 분명히 확인하는 것이다. “아! 이것이구나. 그런데 허망한 데에 나도 모르게 속아서, 넋 나간 짓을 하고 살았구나. 알고 보니까 그림자에 속았던 것이다. 본체를 보니까 너와 나가 둘이 아니고,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이 본래 둘이 아니었구나. 둘이 아닌 성품, 그것을 깨달으라고 했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말한다. 이것은 사실 늘 눈앞에 드러나 있지만, 마음의 눈을 아직 못 뜬 입장에서는 성품을 봐야지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세계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사의 하다고 하는 것이다.

 

오로지 일심(一心)일 뿐, 실로 다른 차별상이 없다. 또한 광채도 없고, 우열도 없다.

 허공에 밝음이 오면 밝아지고, 어둠이 오면 어두워질 뿐이듯이, 거기에 아무런 광채란 없다. 모양이란 인연 따라 드러나는 상(相)일 뿐이다. 미혹한 범부는 겉모습에 속아서 간택을 하며, 얽매이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한 생각을 돌이켜 깨달음을 증득하시고, 어둠 속에서 헤매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제해주셨다. 성품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본심을 잃지 않게 해주고, 더 이상 허망한 데 끄달리지 않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셨다. 어쨌든 근본 마음자리를 분명히 봐야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된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라는 형상도 없고,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형상도 없다.”

 그 자리에서는 한 마음으로 만법이 평등하므로, 새삼 부처라고 떠받들며 공경해야할 모습도 없고, 중생이라고 차별하여 구제해야 할 모습도 없다. 그래서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배휴가 물었다.

“마음이야 모양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부처님의 32상(相) 80종호(種好)와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배휴는 아직 상을 여의지 못한 입장이어서, 부처와 중생을 분별할 수밖에 없다. 황벽스님은 처음 상당법문부터,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 부처일 뿐, 부처와 중생이 새삼 다를 바가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였다. 하지만 배휴는 모양에 집착하여 아직도 밖으로 구하고 있으므로,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32상은 형상에 속한 것이니,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고 한 것이다. 80종호는 색깔에 속한 것이니, ‘만약 겉모습으로 나를 보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형상과 색깔에 따라 분별하는 배휴를 위하여, 황벽스님은 《금강경》 사구게의 부처님 말씀을 빌려와서 친절하게 일러준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그리고 ‘若以色見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배휴와 황벽스님의 차이는, 전자는 상에 사로잡혀 그 바탕인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이고, 후자는 상을 여의고 중도실상을 철견(徹見)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휴의 변견에 치우친 물음에 따라, 언제나 중도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고 상대의 분별망상을 깨트리는 기연을 열어주는 것이다. 일심(一心)에 눈을 떴느냐 못했느냐의 차이는 이렇듯 매사에 천지현격으로 벌어지므로, 옛 어른들은 무엇보다 먼저 심안을 열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6. 한 마음의 법

 배휴가 여쭈었다.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건 같다고 해도 두드려 맞고, 다르다고 해도 두드려 맞는 도리다. 황벽스님이 아무리 꼭닥스럽게 법을 보여주어도, 배휴가 아직 눈을 못 떠서 소화할 수 없으므로 조심스럽게 일러주어야 한다. 자칫 자기 식으로 받아들여서 그 말에 또 매달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성품에는 같고 다름이 없다."

 

부처의 성품이나 중생의 성품이나, 성품 자체에는 같고 다름이 없다.

 

만약 삼승(三乘)의 가르침에 의거하면,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이 다르다고 설한다. 그리하여 삼승의 인과가 세워지며, 같고 다름이 있게 된다.

 

삼승의 교학의 입장에서는,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다. 인과도 분명하며, 차이도 선명하다.

 

그러나 만약 불승(佛乘)과 조사가 서로 전한 바에 의하면, 그와 같은 일은 논하지 않는다. 오직 일심만을 가리켜 보일 뿐, 같음이나 다름도 없고 원인과 결과도 없다.

 

교학에서 배운 바를 가지고 물어오는 배휴를 향하여, 황벽스님은 선가(禪家)의 기본 안목을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하면, 면전에는 오직 일심(一心)만이 분명하여, 교학에서 말하는 인과나 온갖 차별상은 일거에 분별망상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냥 이 한마음 밖에 없으므로, 너무나 분명하고 간단히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뿐이다. 그것이 천칠백 공안으로 기록되었고, 온갖 어록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황벽스님의 제자인 임제가 깨닫고 한 말처럼, “원래 황벽 불법이란 별 게 아니군![元來 黃檗佛法 無多子]” 그대로다. 선(禪)의 본령은 간단 명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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