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법이 다 합쳐도

다만 하나의 둥근 원이고,

▲ 그림 박구원

모조리 흩어져도 각각이

다만 하나의 원이다

천차만별 변하는 것은

인연 따라 겉모양 변하는 것

성품은 변한 적이 없다

육도 윤회 어떤 곳에 있더라도

불법을 만나 믿으며

스스로 안목을 열고

남에게도 전하는

인연을 살펴 쓴다면,

보람 있는 삶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자비를 베푸는 주체도,

받는 대상도 없는

무연자비이기에

진정한 대자비가

되는 것이다

 

그대는 지금 보리심을 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한 마음을 일으켜 부처를 배워 얻으려고 한다. 그렇게 부처가 되려고 애쓴다면, 삼아승지 겁을 닦는다 해도 다만 보신불이나 화신불만 얻을 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원진성(本源眞性)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밖으로 구하는 상(相)이 있는 부처는 그대와는 닮지 않았다.’고 하였다.”

법신은 그대로 완전해서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그런데 ‘발보리심’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일으켜 따로 부처를 배워서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머리에 머리를 더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진정한 공부인은 이런 대목에서 하심하고 무위법으로 공부를 전환한다. 본원진성을 믿는다면, 공부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가 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정작 본인은 속으로 뿌리 깊은 미세한 욕망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11. 수은의 비유

 

배휴가 물었다.

“본래 이미 부처라면, 어찌하여 사생육도(四生六道)의 갖가지 모양이 서로 같지 않습니까?”

 

사생이란 태어나는 방식에 따라, 태생·난생·습생·화생으로 나누는 것이다. 인간은 태생이고, 천인은 화생이다. 새는 난생이고, 벌레 가운데는 습생이 많다. 육도는 업에 따라 윤회하는 것으로 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여섯 가지 길이다.

 

선사께서 대답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본체는 원만하여, 더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육도를 따라 흐르면서도 곳곳에서 두루 원만하고, 만물 가운데 낱낱이 부처다.

 

드러난 모양이 가지가지 변하더라도, 불성은 혼돈된 적이 없다. 늘 여여부동해서 뚜렷한데, 다만 중생이 스스로 놓치고 정신없이 어리석은데 빠져서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윤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나투더라도, 스스로 불법을 만나서 근본을 눈뜰 수 있는 인연을 살펴서 바른 모습을 쓴다면, 언제든지 본원진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모양[相]으로는 천차만별로 벌어지더라도, 그 낱낱의 바탕[性]은 오직 하나로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한 덩어리의 수은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도, 방울방울이 모두 둥근 것과 같다. 나뉘지 않았을 때에도 한 덩어리였을 뿐이다. 이것이 일즉일체(一卽一切)이고 일체즉일(一切卽一)이다.

 

수은은 뭉치나 흩어지나, 잡스러운 것이 섞이지 않아서 항상 둥근 모양을 유지한다. 만법의 본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만법이 다 합쳐도 다만 하나의 둥근 원이고, 모조리 흩어져도 각각이 다만 하나의 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오대양 넓은 바닷물의 맛을 일일이 다 다니면서 맛볼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서울 같으면 가장 가까운 인천 앞바다에 나가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면, 그 일미(一味)가 곧 전체 바닷물 맛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온 세상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중생들이 다만 하나의 마음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자기 마음 하나에 묵묵히 계합하면, 온 우주의 비밀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한 마음뿐이지, 이 마음 저 마음이 없다. 따라서 일즉일체 일체즉일이 되면, 화엄의 사사무애 도리가 터득되는 것이다.

 

온갖 형상과 모습은 비유하면 마치 집과 같다. 나귀의 집을 버리고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사람의 몸을 버리고 하늘의 몸이 되기도 한다.

 

천상은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복이 다하면 아래로 타락하는 경우도 많고, 지옥은 시간이 오래가고 더디지만 그래도 업보가 다하면 다시 나오게 된다. 중생은 육도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윤회하는 것이다. 원력 있는 사람은 지장보살처럼 화광동진(和光同塵)으로 고통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지옥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스님들도 인연 따라 선방에서 안거하면서 자기 공부를 잘 지어가는 분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도심 포교당을 힘들게 개척하시는 분도 있다. 시장 바닥에 살면서도 정(定)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역설적으로 고요한 곳에서보다 더 큰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런 저런 온갖 모양은 결국 인연 따라 합성된 것이다.

 

성문·연각·보살·부처의 집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모두 그대 자신이 취하고 버림에 따라 차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원의 성품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천차만별 변하는 것은 인연 따라 겉모양이 변하는 것으로, 성품은 변한 적이 없다. 이 사실을 알면, 어떤 모양을 하더라도 더 이상 연연할 것이 못 된다. 따라서 본인과 이웃이 함께 마음을 비우고 수행을 잘 하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육도 윤회의 어떤 곳에 있더라도, 불법을 만나 믿으며 스스로 안목을 열고 남에게도 전하는 인연을 살펴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보람 있는 삶이라 할 것이다.

 

12. 무연자비

 

배휴가 물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대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십니까?”

황벽선사가 대답하셨다.

“부처님의 자비란 무연(無緣)이기 때문에 대자비라고 한다.

 

부처님의 자비는 인연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는다. 자비를 베푸는 주체도, 자비를 받는 대상도 없는 무연자비이기에, 비로소 진정한 대자비가 되는 것이다. 인연이 있고 없고 가리지 않고 베푸는 대자비란 곧 평등한 불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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