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불 스님의 완릉록 선해 〈21〉

▲ 그림 박구원
마음은 모양이 없기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마음은 본래 머문 바

없기 때문에,

보살이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수 있다.

 

마음이 담연하게

자기 집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기 때문에,

육도윤회하며 생사를

거듭하고 있다.

 

한 마음 사라지면,

온갖 경계도 없어진다.

 

 

만약 인연에 응하지 않을 때에도 그 마음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인연에 호응할 때에도 또한 종적이 없다.

 

마음은 작용할 때나 작용하지 않을 때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아무리 찾아도 있다고 할 근거는 없으며, 또한 그러면서도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서 온갖 작용을 다하고 있기에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분명 작용은 있는데 몰종적(沒?跡)으로 흔적이 없으니,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마음이란 전도몽상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아무리 그 이치를 알아들어도 마침내 소화가 안 되어 마냥 더부룩하기만 한데, 일단 의심의 뭉치가 한 번 터져나가면 말이 필요 없이 그냥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직 공부가 안 된 입장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란 생각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빨리 간파해야 한다. 이럴 때 학인은 “그러면 사구(四句)와 백비(百非), 모든 것을 부정한 입장을 여의고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하고 묻게 된다. 눈 밝은 선지식이라면 풀을 쳐서 뱀을 시험해보듯이 타초경사(打草驚蛇) 하여 상대방을 간파한다. 진짜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교학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인지를 담박에 가려내는 것이다. 만약 진짜 약이 오른 뱀이라면, 급소를 찔러서 한 방에 탁 터져나가게 만들어준다. 만일 진정 근본에 대한 의심으로 꽉 차있는 학인이라면, 바로 터지든지 아니면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의단(疑團)이 더욱 뭉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열리는 기연이 찾아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미 이런 줄 알아서 ‘없음’ 가운데 머물러 쉴 수 있다면, 곧 모든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있다 없다는 입장을 넘어선 ‘없음’ 가운데 머물러 쉬는 것이 곧 머무름이 없는 ‘무주(無住)’다. 제불보살께서는 언제나 이곳에 계신다. 그곳이 바로 눈앞에 환히 드러나 있지만, 무명에 눈이 가려진 사람은 눈 뜬 장님이 되어 망상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눈 뜬 장님에게는 천지가 어둠 속이지만, 다만 눈만 떠버리면 선 자리가 그대로 개명천지의 정토다. 눈을 떠서 잠에서 깨어나느냐, 아니면 잠속에서 계속 악몽에 시달리느냐는 선택을 진실 되게 받아들일 때, 공부의 발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머문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셨다.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보살이 보리심을 발한 다음 그 마음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여쭈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셨다. 육조 혜능스님께서도 이 ‘응무소주이생기심’ 구절에서 몰록 깨치셨다. 알고 보면, 우리들의 마음은 본래 머문 바가 없다. 본래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살이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본래 머무는 바 없는 이 마음에 계합하면 그만이지, 새삼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려고 애쓰는 것은 부처님이나 조사의 뜻에 어긋난다. 무위법을 알아듣고, 만사를 내려놓고 바보 천치가 되어 시간 보낼 줄 아는 것이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수 있는 바른 공부길이다.

 

모든 중생이 생사를 윤회하는 것은, 의식이 인연을 좇아 조작하고 마음이 육도를 떠돌며 가만있지 못하기 때문이니, 마침내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유마거사가 이르기를, ‘교화하기 힘든 사람은 그 마음이 원숭이 같아서, 몇 가지 법으로 그 마음을 제어한 다음에 비로소 조복시킨다.’고 하였다.

 

마음이 담연하게 자기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서 떠돌기 때문에, 육도 윤회하며 생사를 거듭하고 있다. 경계를 반연하여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로 인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 일어나서 훌쩍 세월을 헛되이 보낸다. 돌아보면 아득히 일장춘몽인데, 백발이 성성하니 북망산이 가까운 것이다. 오랫동안 이렇게 떠돌던 사람의 마음은 원숭이 같아서 조금도 제 자리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 대상을 기웃거리며 집착하게 된다. 그럴 땐 방편을 써서 먼저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원숭이 마음을 다스린 다음에 비로소 마음을 조복시키고, 본래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본지풍광에서 안심입명 하게끔 이끄는 것이다.

마음공부에 입문하여 조금이라도 체험을 맛본 사람도 업력에 의해 때때로 뒤집어지기는 매한가지다. 여기 배휴 재상도 황벽스님을 만나자마자 무언가 맛을 보았지만, 아직도 업력에 의해 원숭이처럼 의심 많은 마음이 묻고 또 물으면서 다스려지기까지 선지식 곁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모든 중생들의 본래 마음이 청정하여 완전한 것은 일체가 평등하여 차별이 있을 수 없지만, 집을 떠나 밖으로 떠돈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은 업력 따라 차등이 나기 때문에 스스로 의심이 끊어질 때까지는 묵묵히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사라진다.’고 한 것이다.

 한 마음이 일어나니까, 그에 따라 온갖 경계가 펼쳐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한 마음이 사라지면, 그에 따라 온갖 경계도 없어진다. 그러나 무념무상을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외도가 된다. 무념무상을 만들려는 그 마음이 본래 무념무상을 가리고 마음을 밖으로 찾아 나서게 하여 평지풍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여튼 말귀를 잘 알아먹어야 한다. 보리자성이 본래청정 하다고 하니, 그 말을 딱 믿고 모든 허튼 노력을 내려놓으면 저절로 근본이 드러날 텐데, 다만 원숭이 마음이 가만있지를 못하고 천지사방을 쏘다니면서 온갖 좋다는 법을 다 배워 속에 더부룩이 쑤셔 넣고 소화도 못시키고 알음알이만 가중시키니 고향 돌아갈 날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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