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박구원
“얻은바 있어도 일체 견해 버려라”

 

본래 없는데 무엇을 버리나

이런 경지의 사람은

취사의 양면 함께 내려놔

 

부처를 이루려고 애쓰면

경계 만들어 발등 찍는다

성품 자각한 도인들은

범부·부처 둘로 안 보기에

의연히 자기 길을 갈 뿐이다

 

마음은 허공과 같다

과거·현재·미래 없는 허공

마음도 그와 같아 하염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가 마음에서 비롯된 것

마음을 깨달아야지

변화에 시비할 까닭 없어

  

이 같이 일심(一心) 중에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다.

 모든 이룩되어진 모습은 시설된 것이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제나 불이(不二)의 중도실상 가운데서 인연 따라 수처작주 해야 한다. 위의 말은 《범망경》에 나오는 다음 게송의 일부분이다. “응당 고요히 관찰할지니, 제법의 실상은 불생불멸이며, 영원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며 다르지도 않고,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이 같이 일심 중에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다.”

 

설혹 그대가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를 배워 얻은 바가 있다 할지라도, 일체의 견해를 모두 버려야 한다.

 ‘버려라’ 하니까, 속인들은 이 말을 배워서 애써 버리려고 한다. 이것은 스스로의 착각에 속은 모습이다. 실상은 버리고 말고 할 것이 본래 없는데, 무엇을 버리고 말고 할 것인가? 이런 입장에 나아간 사람이라야 ‘버려라’ 하는 말 자체를 알아듣는다.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소화하고, 애써 버리지 않는 것은 물론 취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취사(取捨)의 양변을 함께 내려놓는 것이다.

삼승십이분교는 부처님의 일대(一代) 교설이다. 삼승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말한다. 십이분교는 석존의 교설을 내용과 형식에 따라 열두 가지로 나눈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가진 것을 모두 없애버리고, 오직 하나 남은 침상에 병들어 누워있다.”고 한 말은 바로 모든 견해를 일으키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 말은 유마거사가 한 말이다. 《유마경》 〈문수사리문질품〉에 나오는 이야기다. 유마거사는 가진 것에 구속당하거나 구애받지 않았다. 있고 없고 상관없이 인연 따라서 살펴 쓴 것뿐이다. 이 점은 물질 뿐만 아니라, 지견(知見)까지도 해당된다.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서, 법의 장애를 받지 않고 삼계와 범성(凡聖)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야만,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부처라고 한다.

 속인들은 ‘부처의 경지를 이루어야 부처가 된다.’고 생각하여 부처를 이루려고 애쓴다. 자꾸 차별 경계를 만들어서 스스로 발등을 찍는 것이다. 하지만 성품을 자각한 도인들은 범부와 부처를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취하고 내려놓고를 구별하지 않고 그냥 의연하게 자기 갈 길을 갈뿐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허공처럼 의지할 곳 없는 데에 머리 숙여, 외도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하였다.

외도의 어리석음은 늘 허망한 짓을 한다. 또 수레를 탔어도 성문승과 연각승의 어리석음 역시 허망한 짓을 한다. 대승도 경우 따라서 어리석은 짓을 하므로, 일불승만을 논한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도 분별심에 떨어지면, 허망하게 된다. 허공처럼 의지할 곳 없는 데란 바로 분별 시비가 끊어진 곳이다. 위의 말은 《유마경》의 〈불국품〉에 나오는 찬불게의 한 구절이다.

 

마음에 이미 차별상이 없으므로, 법 또한 차별상이 없다. 마음이 하염없으므로, 법 또한 하염없다.

 마음과 법은 둘이 아니다. 마음은 허공과 같다고 했다. 허공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마음 또한 그와 같다. 그러니까 하염없는 것이다.

 

만법은 모두 마음이 변화되어 나온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일체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마음을 깨달으면 되지, 변화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시비할 까닭이 없다. 개는 돌을 따라가지만, 사자는 던진 사람을 문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공(空)하기 때문에 제법(諸法)이 공하며,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와 같다.

 성품을 탁 보는 순간에, “아, 제법이 본래 공했구나! 다 허망한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그런 체험이 일어나는 순간에 완벽하게 믿으면 되는데, 거기에서 분별심이 다시 일어나 자꾸 착각하게 되고 혼란스러워지니까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린다.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체 중생이 동일하므로, 한 번 성품을 봤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또 봐야 될 뭐가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해서 허망한 짓을 하면 안 된다.

 

온 시방의 허공계가 같은 한마음의 본체다. 마음이란 본래 서로 다르지 않고 법 또한 다르지 않건만, 다만 그대의 견해가 같지 않으므로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 생각이 천차만별로 옳니 그르니 크니 작니 하며 온갖 허망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통해서 그 성품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그렇구나!’ 하는 믿음을 내게 된다. 그 믿음이 방황을 멈추게 해준다.

 

비유하면 모든 천인(天人)들이 다 보배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먹지만, 각자의 복덕에 따라 밥의 빛깔이 다른 것과 같다.

 좋은 그릇에 최상의 음식을 받아먹으면서도, 생각에 따라서 ‘맛있다.’ 하는 사람이 있고 ‘왜 맛이 이래?’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각자의 복덕에 따라, 그때그때의 입장들이 다른 것이다. 육조혜능 스님은 복덕이란 상(相)을 가지고 짓는 모습이고, 상을 여의고 쌓는 것은 공덕이라고 했다. 위의 비유 역시 〈불국품〉의 서문에 나오는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