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박구원
높은 차원의 자비는
불이의 중도를 깨닫게
해주는 ‘무연자비’

수행자라면 부끄러움 알고
뼈저리게 정진하면,
갈수록 넉넉해지고
깊어지는 것이 이 공부다

불법이 중심에 딱 서면,
마치 매사가 벼릿줄을 잡고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쉽고 간단하게 풀려나간다.

인과를 훌쩍 벗어나
인연을 살펴 쓸 수 있는
힘을 지녀야 몸과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비로소 굳건한 정진이 된다

 

자(慈)란 이룰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고, 비(悲)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

낮은 수준의 입장에서 자비심을 말할 때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 해서 고를 뽑아내어 즐거움과 더불어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중생이 고해 속에서 한량없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이것을 즐거움으로 전환시켜줄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해야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 낫게 해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니, 그 분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중생들의 마음에는 불꽃이 인다.

하지만 선사들은 좀 다른 입장에 있다. 그런 초보적인 마음가짐을 다 지나서 이제는 정말 진리를 알고 싶고 아예 고해 자체를 훌쩍 벗어나고 싶은 사람을 상대하여, 그 가장 빠른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단도직입으로 진리 당처를 보여주기 위해, 경우 따라서는 상처를 쫙 벌려서 소금을 뿌리기도 한다. 전도몽상을 깨우기 위해서는, 가끔은 방(棒)이나 할(喝) 같은 충격요법이 필요한 때도 있는 것이다.

자비란 것도 참 여러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높은 차원의 자비는 불이의 중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인데, 일심의 본분자리에는 중생만 없는 게 아니라 부처까지도 쌍으로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최상의 자비로 무연자비라 한다. 이룰 부처도 있지 않고, 제도할 중생도 있지 않다. 그것은 자비라 할 것도 없는 자비다.

 

그 설하시는 법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 이것은 마치 마술사가 마술로 만들어 놓은 인간에게 설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법을 어떻게 ‘내가 선지식으로부터 말끝에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깨달았다.’고 말하겠는가.

 

어떤 법을 설하는 게 설하는 게 아니다. 관음보살이 법을 설하면, 남순동자는 들은 바 없이 듣는다. 그러니까 무설설(無說說)이고 불문문(不聞聞)이다. 설한 바 없이 설했는데, 묘하게도 일체중생은 들은 바 없이 듣고 변화를 한다. 본래 그러한 데에 말없이 계합하는 것이라서, 따로 뭔가를 얻었다 할 것이 없다. 그래서 늘 하심하고 향상일로로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큰스님으로부터 공부를 점검받고, “이제 제가 스님 처소를 떠나 어디 다른데 가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큰스님은 기꺼이 소개장을 써주었다. 소개장이란 “내가 이 사람 인정하고 보내는 거니까, 당신도 살펴보고 남한테 이익 되게 써먹으시오.” 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새로 간 곳의 어른스님께 소개장을 보여드리면, 대접을 받고 편하게 지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소개장을 내보이지도 않고, 그저 평대중으로 선방 구석에서 정진만 하였다. 어느 날 예전의 큰스님이 그곳을 들리게 되어, 당신 도반인 방장에게 “과거에 내가 소개장을 써줬는데, 그 수좌가 지금 잘 하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런데 알아보니까 그 스님은 선방의 말석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왜 여기 있느냐?” 하니까, “스님이 써주신 것은 감사하게 받아들였지만, 그거 내밀지 않아도 제가 더 수행 잘하고 정진 잘할 수 있는 분위기여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공부인이라면 이렇게 어떤 일이든지 감내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 하나 안 하고 평상으로 마음 쓰고 살 수 있을 정도로 겸손해야 한다. 항상 부끄러운 줄을 알고 뼈저리게 정진하면, 갈수록 넉넉해지고 깊어지는 것이 이 공부다. 때가 되면 송곳이 바짓가랑이 바깥으로 삐져나오듯이, 모양 쓰게 되어있다고 옛날부터 이야기했다.

 

이러한 자비를 그대가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서 배워 얻을 수 있겠는가? 견해란 스스로 본심을 깨달은 것이 아니니, 마침내 아무런 이익도 없다.”

 

본래 한 법도 없는 자리에서 홀연히 일어난 무연자비는 시작도 끝도 없는 시방삼세에 꽉 차서 남거나 모자람이 없이 베풀어지는 것이다. 어떤 인연 따라서 살펴지는 자비도 자비이지만, 인연과 아무 상관없이 베풀어지는 무연자비는 설명이 안 된다. 그 설명할 수 없는 도리에 깊게 사무쳐서 뼈저리게 ‘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시간을 이렇게 함께 하는 이것이 참으로 깊은 은혜로구나. 감사합니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근본입장을 놓치지 않는 모습니다. 불법이 중심에 딱 서면, 마치 매사가 벼릿줄을 잡고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쉽고 간단하게 풀려나간다. 이것이 평상심으로 인연 따라 최선을 다하면서 세월을 잘 보내는 모습이다.

 

13. 정진이란?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정진(精進)입니까?”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몸과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굳건한 정진이다.

 

정진도 자비처럼 여러 수준이 있다. 중생의 눈높이가 다르니까, 여러 방편이 생기는 것이다. 낮은 근기에게는 우선 앉아배기는 것이 정진하는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거기서 좀 나아지면 선정과 지혜를 쌍수(雙修) 하는 것을 정진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법을 눈 뜬 최상의 근기가 하는 정진은 귀신도 엿볼 수 없다. 다시는 빗나가지 않는 안목을 갖춰서 온갖 변화를 다 수용하고, 백천 삼매 속에서도 여여부동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루 종일 생각을 일으켜도 일으킨 바가 없다. 닦는 바 없이 닦아, 그 닦음 없는 닦음을 조용히 수용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닦으면 닦는 대로 인과에 걸릴 것이고, 안 닦으면 안 닦는 대로 또 인과에 걸릴 것이다. 인과를 훌쩍 벗어나 인연을 살펴 쓸 수 있는 힘을 지녀야 몸과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그때야 비로소 굳건한 정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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