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을 닦는다면

분별도 집착도 없다.

마음이 바위덩이처럼

▲ 그림 박구원

틈이 없어 일체 법이

그대 마음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상에 집착하여

조작하려는 생각만 끊어지면

장애 받고 안 받고

도무지 흔적이 없어져

하되 한 바가 없는

자유로운 삶이 펼쳐진다.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을 벗어난 눈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을 잘못 먹게 된다.’고 하였다. 지금 일체시(一切時) 중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다만 무심(無心)을 닦는다면, 분별할 바도 없고 의지할 바도 없으며 머물러 집착할 바도 없어서 하루 종일 임운등등(任運騰騰) 하여 마치 어리석은 사람같이 될 것이다.

 

세간의 일은 언제나 이분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출세간의 불법은 불이법이어서, 언제나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분별로부터 벗어나 있다. 따라서 눈 밝은 명안종사는 공부인으로 하여금 불법을 이분법의 알음알이로 따지는 나쁜 습관을 떨치게 만들어준다. 만일 이런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불법을 밝히려고 해봐도, 결국 분별망상 속에서 불법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전도몽상 속의 일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알음알이만 커져서, 대승의 법약이 오히려 술찌기처럼 냄새나는 법상(法相)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반면 바른 스승을 만나 바른 지도를 받으면, 모든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하루 종일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모든 곳에서 오직 무심을 닦아 근본에 계합해 들어간다. 그러면 본래 마음고향에서 안심입명하기 때문에, 따로 분별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으며 또한 머물러 집착할 것도 없어진다. 어디를 가든 그 자리요,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이미 본래부터 좌(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은 다만 흐름에 맡겨 자재하고 있지만, 밖을 향한 시비분별이 뚝 끊어져서 남이 볼 때는 어쩌면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무위(無爲)의 일상을 살아가지만, 필요할 때는 또 전광석화처럼 대기대용(大機大用)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여도 굳이 그들을 일깨우지 않아서, 알아주든 모르든 상관이 없어진다. 마음이 마치 바위덩이처럼 도무지 틈이 없어서, 일체 법이 그대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올연(兀然)히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인데, 이와 같아야만 비로소 조금은 상응할 분(分)이 있다 할 것이다.

 

그 자리가 분명하면, 저절로 흐름에 맡겨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움직일 땐 움직이고, 멈추면 그냥 아무 일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도무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미 상(相)을 여읜 마음이 근본자리와 딱 계합해서 틈이 없기 때문에, 저절로 바위처럼 올연히 움직임이 없어진다. 겉으로는 종일 분주히 일해도, 속으로는 일한 바도 없고 움직인 바도 없는 것이다. 하루 종일 동서남북 사방을 돌아다녀도, 당처를 한 번도 여읜 적이 없다. 이것이 분명해야만, 비로소 공부의 분(分)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밖을 향해 치닫는 업식이 그쳐지지 않은 사람은 좀이 쑤셔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천지를 쏘다니면서 온갖 일에 간섭해야만 직성이 풀리니, 마음이 잠시도 쉬지를 못하여 무심을 닦을 분이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저기 부지런을 떨며 다니면서 잡다한 지식을 배워 머릿속에 꾸역꾸역 쑤셔 넣는 것을 공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제대로 발심한 사람은 한 생각 돌이켜 선지식을 찾아뵙고 무심에 착안하여 방하착(放下着) 한다.

 

삼계의 경계를 벗어남을 일러 부처가 세간에 출현했다고 하며, 번뇌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일러 무루지(無漏智)라고 한다. 인간과 천상에 태어날 업을 짓지 않고, 지옥에 태어날 업도 짓지도 않으며, 나아가 일체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서 어떤 인연이 와도 불생(不生)이면, 곧 이 몸과 마음의 자유인이 된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도 결국 한 생각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이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샘이 없음[無漏]’이라고 한다. 마음이 경계 따라 새어나오면 곧 번뇌가 된다. 그러나 그 번뇌조차도 자성의 묘용(妙用)임을 깨달으면, 즉시 번뇌가 보리로 화(化)한다. 일거수일투족, 한 마디의 말, 한 생각이 모두 일심(一心)의 나툼 아닌 것이 없음이 분명할 때, ‘무루지’가 현전하는 것이다. 일체 경계에서 상이 없으므로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만법이 오직 한 마음의 드러남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기에 매사에 걸림 없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불생(不生)이 아니라, 뜻에 따라 생(生)할 뿐이다. 경에서 ‘보살에게는 의생신(意生身)이 있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의생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몸이 아니라 생각한 대로 생기는 몸을 말한다. 보살은 상(相)을 여의어서 모양이 없다. 그래서 자비심을 일으키는데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몸을 나툰다. 보살의 경계에 들어가면 생각대로 태어나는 것이다. 육도 만행하는 보살로서는 경우 따라 역행 보살이 되는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악업에 물들지 않는 위신력을 지녔기 때문에, 능히 그런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무심을 모르고 상에 집착하여 조작하는 것은 모두 마구니의 업에 속한다. 나아가 정토(淨土)의 불사(佛事)를 이루더라도 모두 업을 짓는 것이니, 이를 일러 부처의 장애[佛障]라고 한다.

 

마음에 모양이 없는 줄을 알지도 못하고 늘 경계 따라서 집착을 일삼으면, 그게 다 마구니의 속박을 받는 일이 된다. 나아가 염불로써 선정을 익히더라도, 만일 마음으로 조작함이 있으면 곧 업을 짓는 일이 되어 공부에 장애를 받는다. 누구 다른 사람이 장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착각하여 부처를 조작하기 때문에, 그것이 옥상옥이 되어 본래 부처를 가리는 것이다. 다만 상에 집착하여 조작하려는 생각만 끊어지면, 장애 받고 안 받고 도무지 흔적이 없어져 하되 한 바가 없는 자유로운 삶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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