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아홉 번째 날 下

▲ 그림-강병호
멈췄던 것 같은 시간이 다시 흘러가. 아빠는 회사에 나가고, 엄마는 새로운 일감을 맡았어. 이번에는 밥솥을 디자인한대. 엄마가 디자이너라고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엄마는 지나치게 수수하니까. 옷 하나를 사도 남자애들이나 입을 것 같은 옷을 사 오지. 할머니는 뭐든 잘 만들었어. 엄마가 사온 밋밋한 셔츠도 할머니 손길이 닿으면 아주 멋지게 변신했어. 친구들은 늘 내 머리 모양이나 옷을 부러워하곤 했지. 나는 2학년이 되었어. 새로운 담임선생님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어. 아이들은 예쁜 담임선생님을 만났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모든 것이 낯설어. 시간이 거꾸로 흘렀으면 좋겠어. 다시 1학년이 되고 겨울이 되고 가을이 되면 떠났던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

일주일이 지나면 큰고모 스님이 와서 재를 올려. 작은고모는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오다가 이제 오지 않아. 상을 차리고 불경을 읊고 나면 큰고모는 절로 돌아가고, 아빠와 엄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심술이 나. 모두들 할머니가 사라졌다는 걸 잊은 듯이 행동해. 내가 심술이 나서 퉁퉁거려도 다들 못 본 체하지.

그러면 나는 할머니 방으로 가. 베개를 꺼내서 베고 누워. 베개에서는 할머니 냄새가 나. 참 이상하지. 할머니는 사라지고 없는데, 할머니 냄새는 아직 남아 있어. 베개를 베고 누워 눈을 감으면 할머니가 내 옆에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러.

다섯 번째 재를 지내는 날, 마당에 동백꽃이 피었어. 지난해 동백꽃이 피던 날, 할머니는 정신이 또렷해져서 머리를 곱게 빗고 꽃 마중을 했지.

안녕, 꽃들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니?”

꽃 마중을 하고 나면 꼭꼭 숨어있던 꽃망울들이 활짝 얼굴을 내밀었어. 팝콘처럼 일제히 꽃망울이 터졌지. 올해에는 아빠와 엄마, 큰고모 스님이 다함께 꽃 마중을 했어. 재를 지내고 마당으로 나와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어.

꽃들은 지고 나면 다시 피는데, 할머니는 왜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잠깐 동안 아주 조용해졌어. 아빠와 엄마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어. 어른들을 난처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궁금했어. 큰고모스님이 빙긋이 웃었어.

지난해에 핀 꽃들은 이 꽃과 같은 꽃일까, 다른 꽃일까?”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해요.”

같지도 다르지도 않단다. 꽃이 피었다가 지고 나면 우리는 그 꽃을 다시 볼 수 없지만, 꽃이 사라진 것은 아니란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엔 열매가 맺히지. 열매가 떨어진 자리에서 다시 꽃이 피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와 같단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조건이 되면 드러났다가 그 조건이 사라지면 모습을 감출 뿐. 할머니도 마찬가지야. 할머니의 모습은 우리 곁에 없지만, 할머니는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는 걸 다희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큰고모 스님은 언제나 알쏭달쏭한 이야기만 하지. 할머니도 그랬잖아. 내 속으로 낳았지만, 저 애 속을 모르겠다고. 그래도 조금은 위로가 되었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할머니가 떠난 후에도 나는 줄곧 할머니가 곁에 있다고 느껴. 베개에 남아 있는 할머니의 냄새처럼.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마흔아홉 날이 되었어.

그 사이 아빠는 회사에서 승진을 했어. 이제 회사 사람들이 아빠를 차장님이라고 부른대. 아빠는 새로 나온 명함을 보여주며 활짝 웃었고, 엄마는 월급이 올랐다고 좋아했어. 엄마는 밥솥을 세 개나 그렸어. 그중에 하나를 밥솥으로 만들 거래. 믿을 수 없겠지만, 엄마가 디자인한 밥솥은 정말 예뻐. 할머니가 소매 끝에 수놓았던 꽃들이 날아가 밥솥 손잡이에 내려앉은 것 같아. 나는 가은이라는 친구를 만났어. 우리는 금세 단짝이 되었지. 가은이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다니는데, 머리꼬리가 말꼬리처럼 예쁘다고 했더니 이름을 부를 때마다 히히히힝하고 말처럼 대답해. 가은이랑 있으면 늘 웃게 돼.

마지막 재를 지내느라 큰고모 스님이 계신 절에 다녀왔어.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왜 쓸쓸한 기운이 풍길까. 친척들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아빠의 입술과 청아한 소리를 내는 큰고모 스님의 목탁, 우아하게 틀어 올린 작은고모의 머리칼이나 절을 올릴 때마다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엄마의 손끝에 그렁그렁 물기가 맺혀있는 것 같아.

재가 끝나고 꽃님이가 누구인지 알게 됐어. 먼 친척이라는 할머니가 나를 보고 말했어.

이 아이는 어릴 적 꽃님이를 똑 닮았구나.”

꽃님이가 누군데요?”

어릴 적에 네 할미를 꽃님이라고 불렀지. 꽃처럼 어여쁘다고 꽃님이라고 불렀어. 동그란 눈썹이며 입 매무새가 어릴 적 네 할미를 아주 빼다 박았구나.”

어릴 때 친구인 줄로만 알았던 꽃님이가 할머니 자신이었다는 걸 알고 엄마와 아빠는 웃음을 터트렸어.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보내는 날인데 소리 내어 웃는다고 작은고모가 흉을 봤지만 웃음은 멈추지 않았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 그때가 나는 제일 쓸쓸해. 집안 어딘가에 할머니가 있는 것 같아. 마당에서 꽃에 물을 주거나, 부엌에서 고구마를 삶고 있거나, 할머니 방에서 베개를 베고 누워 있을 것 같아.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할머니 방에 들어와 베개를 베고 누웠어. 할머니 베개를 베고 누우면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러. 아빠가 다가와서 옆자리에 누웠어. 따뜻한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주었어.

다희가 아주 어렸을 때, 다희가 아직 다희가 아니었을 때, 다희의 절반은 아빠였고, 나머지 절반은 엄마였지. 그리고 아빠가 아주 어렸을 때, 아빠가 아직 아빠가 아니었을 때, 아빠의 절반은 할머니였고, 나머지 절반은 할아버지였단다. 그러니까 우리 다희의 반의반은 할머니인 셈이지. 할머니는 이제 돌아가시고 없지만, 아빠의 몸속에도 다희의 몸속에도 여전히 할머니가 계셔. 다희의 동그란 눈썹은 할머니를 닮았지. 야무지고 고운 입술도 할머니를 닮았고. 이것이 우리 몸속에 할머니가 계신 증거란다. 우리가 할머니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한, 할머니는 우리 기억 속에도 살아 계실 거야.”

그럼 내가 할머니의 열매야?”

그래. 열매란다. 꽃님이의 꽃님이지.”

아빠와 나는 마주 보며 웃었어. 그렇게 마흔아홉 번째 날이 지나가고 있었어. 가슴은 아팠지만, 무언가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기분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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