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물소리 下

▲ 그림-강병호
분식점 앞에서 잿빛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진성 스님이 이긴 모양이었다. 등교할 때는 절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지만, 하교 때에는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진성 스님이나 양 처사님이 마중을 나왔다. 예전에는 나오기 귀찮아 순번을 정했는데, 요새는 서로 나오려고 다투곤 했다.

목적은 학교 앞 분식점. 해당화 보살님이 오신 후로 두 분 다 적성에 맞지 않게 소식을 하시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허기를 분식점 핫도그나 떡볶이로 채웠다.

스님 옆에는 나무젓가락 네 개와 먹지 않고 발라놓은 소시지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석주는 소시지 한 개를 집어 먹고, 나머지를 꼬리를 흔들고 있는 분식집 강아지에게 던져 주었다. 핫도그 네 개를 드셨으니 이제 하나만 더 드시면 되겠다.

차에 오르려는데 누군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엄마!”

석주야!”

엄마는 이름을 채 말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았다.

우리 석주 많이 자랐네.”

1년 만이었다. 아빠가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석주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빠는 석주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교도소에 갔고, 석주와 엄마는 집 없이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여기저기 떠돌다가 석주만 석명 스님 계신 절에 맡겨졌다.

우리 가족 다시 모여서 살자. 다음 달에 아빠가 나오셔. 그동안 엄마가 열심히 일했어. 우리 가족 함께 살 집도 구해놨어. 작은 월셋집이지만 방도 두 개야.”

 

어린 녀석이 웬 한숨을 그리 쉬느냐.”

석명 스님 말씀에 석주는 건성으로 먹을 갈다가 화들짝 놀랐다.

석주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를 생각하면 사무치게 그리웠는데, 막상 엄마 품에 안기고 보니 익숙하고 포근한 엄마 냄새를 맡으면서도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가족이 함께 살게 될 날을 늘 기다렸는데, 기다리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오자 선뜻 내키지 않았다. 석주의 마음에 있는 실 한 가닥이 일주문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석명 스님은 여전히 화선지의 여백을 물끄러미 보고 계셨다. 그러다 생각난 듯이 붓을 들고 붓을 먹물에 적셨다.

먹이 짙구나. 물을 좀 섞어야겠다.”

연꽃 모양의 연적이 손에서 미끄러진 건 순간이었다. 석주의 눈에는 연적이 손에서 빠져나가 벼루 위로 떨어지고 먹물이 화선지 위로 튀는 모습이 느리게 재생되는 영화의 장면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시커멓게 화선지를 물들인 먹물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석주는 그 자리에 엎드려서 바들바들 떨었다. 어떤 불호령이 떨어져도 자신이 다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석주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스님을 봤다. 스님은 손뼉까지 치면서 숨이 넘어갈 듯 웃고 계셨다. 한바탕 웃음 폭풍이 지나간 후에 고요가 찾아왔다. 석주는 무릎을 꿇은 채 스님 앞에 앉았다.

번뇌의 먼지를 네가 대신 날려주었구나. 망설이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지. 마음속의 나는 항상 올바른 길을 알고 있다. 내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에 망설이게 되는 거란다.”

석명 스님은 그동안 사경한 것을 모두 불살랐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지난 백일의 시간이 함께 타올랐다. 석주는 아까웠다. 그 시간이, 그 노고가, 물처럼 정갈하면서도 유연한 글씨가, 그 안에 흐르는 부처님 말씀이 아까워 입술이 마르고 속이 탔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명 스님은 아궁이에 장작을 던지는 것처럼 무심했다.

스님은 승복에 날린 재를 훌훌 털어버리고, 108배를 올리고 좌선에 든 후 첫 글자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공주님은 소녀처럼 호호호 웃었다.

꼬장꼬장한 양반! 이 봉이나 저 봉이나 뭐가 그리 다르다고. 마음으로 받들거나 손으로 받들거나 모두 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을.”

 

석주야, 너에게는 기회가 많다. 꼭 지금일 필요는 없지. 집으로 돌아가 공부를 마치고 다시 와도 늦지 않아.”

진성 스님이 석주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모두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석주도 알았다. 석주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마음속의 자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정식으로 사미계를 받으려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석명 스님은 석주의 바람대로 머리를 깎아주시기로 하셨다. 석주 머리 깎을 때 양 처사님도 후딱 깎아버리라고 진성 스님이 농담을 던졌다. 양 처사님은 곧 날이 추워질 텐데 돌아오는 새봄에 깎으면 된다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진성 스님이 염불 가락으로 한 곡조 길게 뽑았다.

돌아오는 새봄은 언제나 오려나. 갈팡질팡하다가 한오백년 지나겠네.”

해당화 보살님이 채반에 떡을 담아 내왔다. 지난봄에 뜯어놓은 쑥을 찧어 빚은 쑥떡이었다. 잣과 대추로 고명을 얹은 떡은 먹기에 아까울 만큼 예뻤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새벽부터 빚은 정성을 생각해서 한입 베어 물었다. 떡에서는 감식초 냄새가 났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차고 맑았다.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지는 동안 석주는 내내 계곡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머리칼을 털어내고 스님이 지어주신 행자복을 입었다. 한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가 다가와 석주 앞에 합장하고 머리를 숙였다.

우리 스님, 오늘 세운 큰 원을 꼭 이루셔요.”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눈물이 석주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작고 투명한 물방울로 맺혔다. 아름답고 슬픈 이 물방울은 언젠가 마르고 말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석주는 일주문에서 엄마를 배웅했다. 엄마는 내려가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양 처사님은 다시 고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며 두꺼운 법전을 끼고 요사채로 들어갔고, 해당화 보살님은 점심 공양을 지으러 공양간으로 갔다. 진성 스님은 해당화 보살님의 특별한 레시피를 분석해야겠다며 수첩을 들고 공양간으로 따라갔다. 석명 스님은 부처님께 향을 올리고 108배에 들었다.

석주는 연적을 들고 계곡으로 갔다.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까슬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일렁이는 물 위에서 민둥머리를 한 낯선 아이가 빙긋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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