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말 下

▲ 그림-강병호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청량했다.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2천 원짜리 김밥에 콜라를 마시면 딱 좋을 날씨였다. 공원에는 점심 식사를 마친 회사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가을볕을 쬐고 있었다. 이런 날은 벌이가 좋았다. 회사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은 색깔부터 달랐다. 은성이는 레퍼토리를 바꿨다. 최백호에서 비틀스로. 심수봉에서 저스틴 비버로. 은성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재빠르게 읽어낼 수 있는 예리한 눈을 가졌다.

손뼉을 치는 회사원들 사이로 경찰 아저씨가 걸어왔다. 은성이는 먹구름처럼 덮쳐오는 불길함을 떨쳐버리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이 시간에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냐? 어른들은 어디 계셔?”

저는 AG밴드 멤버예요. 어쿠스틱 기타 밴드죠. 오늘은 공원에서 버스킹이 있는 날이라 학교에서 허락을 받고 나온 거예요. 밴드 멤버 형들이 곧 올 거예요. 두 시에 여기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준비했던 것도 아닌데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하늘이 내린 거짓말쟁이 판다곰과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이 마냥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어느 학교에 다니니?”

계영 초등학교 5학년 216번이에요. 저는 기획사 연습생이라 학교에서 시간 내기가 좀 쉽죠.”

계영 초등학교는 외삼촌이 수배되기 전에 다녔던 학교였다. 4학년 216. 그 후로 몇 번 더 학교를 옮겼지만, 반이나 번호는커녕 학교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출석부에 이름만 올렸을 뿐 거의 나가지 않았고, 그 후로 학교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형들이 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도 되겠지? 약속 시간까지 겨우 한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약속한 적 없는 멤버 형들은 약속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멤버라는 건 애초에 없었으니까. 때를 봐서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경찰 아저씨는 꼭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화장실 안까지 상냥하게 동행해 주었다.

경찰 아저씨는 친절해도 너무 친절했다. 은성이가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남을 때리거나 사기를 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은성이를 잡고 늘어지는 걸까. 경찰 아저씨는 끝까지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230분이 훌쩍 넘어가자 인제 그만 파출소에 가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며 은성이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파출소로 가면서 은성이는 우리나라 경찰이 언제부터 이렇게 한가해졌는지 물었다. 경찰 아저씨는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가 학교에도 가지 않고, 돈을 벌러 다니면서부터라고 대답했다.

 

곰이 온다. 판다곰이 달려온다. 둥그런 배가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가장자리의 살들이 물결처럼 퍼져나가며 나달나달해진 츄리닝을 사르르 흔들었다. 곰이 큼직한 앞발을 들어 파출소 문을 밀었다. 이마와 콧잔등에 굵은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눈 주위의 그늘은 한층 짙어졌다. 외삼촌은 경찰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뒤, 잘 훈련된 곰처럼 얌전히 의자 위에 앉았다.

경찰 아저씨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준비된 질문을 쏟아놓았다. 처음부터 경찰 아저씨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이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이가 판다곰을 사육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을지도.

은성이는 외삼촌에 대해서는 맹세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 새아빠의 주먹이 얼마나 단단하고 매웠는지에 대해서, 사랑하는 아들이 맞고 있는 동안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던 힘없는 엄마에 대해서 줄줄이 늘어놓으며 신세한탄을 했지만, 누구의 이름도, 주소도, 전화번호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조차도.

그러고 보니 걸리는 것이 있었다. 중국집 배달부. 매일 저녁 자장면을 배달했던 배달부가 파출소에 탕수육 그릇을 놓고 나가며 은성이에게 찡긋 윙크를 했다. 원룸과 파출소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동안 파출소 벽에 붙은 수배 전단의 잘생긴 얼굴에 살을 더하고 더하면 판다곰이 된다는 사실을 눈치채버렸는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외삼촌이 자기나 자기의 사돈의 팔촌에게 사기를 친 것도 아닌데. 단무지 곱빼기를 외치며 단골손님에 대한 예우로 군만두 다섯 개를 요구했기 때문일까. 엘리베이터가 없는 원룸 5층까지 매일 배달하기가 짜증났던 걸까. 면이 불었다고, 소스가 부족하다고, 짜거나 달거나 싱겁다고 투덜거리는 판다곰을 상대하기 귀찮았던 걸까.

천수경에는 마땅히 참회해야 할 열 가지 무거운 죄가 나오지. 그중에 말로 지은 죄가 네 개란다. 우리가 짓는 죄의 절반이 말로 인한 죄라는 얘기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입에 도끼를 지니고 나온다고 한다. 그 도끼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찍으며 살아간다는 거야.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뱉은 나쁜 말 때문이지.”

지난밤 외삼촌은 장장 열 시간에 걸쳐 온라인 게임을 하고, 짬뽕을 국물까지 다 들이켠 후 벌러덩 누워서 천장을 보며 말했다. 은성이는 그 말의 뜻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외삼촌이 할 만한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마치고 천둥과 같은 트림과 함께 깊은숨을 뱉은 외삼촌은 어딘지 좀 지쳐 보였다.

외삼촌은 경찰이 묻는 것에 술술술 잘도 대답했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와 주소와 그동안 저질렀던 크고 작은 사기들. 그의 조카가 새아빠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준 대가로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벌어 왔고, 어떻게 생활할 수 있었는지를. 은성이의 엄마와 새아빠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들이 사는 곳과 연락처가 어떻게 되는지를.

그것은 외삼촌을 만난 후 처음 들어보는 진실한 말들이었다. 그리고 은성이가 외삼촌에게 들었던 숱한 말들 중에서 가장 나쁜 말이었다.

은성이는 소리쳤다.

말하지 마. 삼촌! 아무것도, 아무것도 말하지 마!”

외삼촌은 알고 있을까. 외삼촌과 보냈던 지난 2년의 시간이 은성이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온갖 거짓말로 얼룩진 시간이 은성이에게는 가장 달콤하고 평안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사람의 말을 잊어버린 판다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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