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아홉 번째 날 上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일곱 날이 지났어.

할머니를 차가운 땅속에 묻고 돌아와서 엄마는 며칠 동안 앓아누웠어. 아빠는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엄마와 나를 보살폈지. 아빠가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할머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을 거야. 집안에는 물에 젖은 솜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어디를 가도 무겁고 축축해.

큰고모 스님(어른들이 이제 큰고모에게 고모라고 하면 안 된대. 행화 스님이라고 해야 한 대.)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읊고 있어. 목탁 소리에 맞춰 작은고모는 아이고 아이고 우는 소리를 내. 작은고모는 절을 올리다가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어.

아이고, 엄마. 엄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난 못 살아. 엄마 없이 못 살아!”

고모부는 고모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사촌 언니 오빠도 자기 엄마 손을 잡고 같이 울고 있어. 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 할머니 방으로 왔어.

작은고모는 항상 말만 늘어놓지. 효도를 말로 할 것 같으면 작은고모가 세계 1등이라고 엄마가 그랬어. 할머니 머리칼을 잘랐을 때, 작은고모는 엄마를 잡아먹을 듯이 다그쳤어. 노인네 머리 하나 감기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느냐고. 네 몸 하나 편하자고 그 고운 머리칼을 이리 싹둑 잘랐느냐고. 할머니가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런 말은 못 했을 텐데.

그럼 형님이 어머님 모시고 가서 머리도 감겨드리고 곱게 손질도 해드리세요.”

엄마가 차갑게 말했지. 작은고모는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며 꽁지 빠지게 도망쳤어. 엄마랑 나랑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한참을 웃었어. 기억나, 할머니?

내가 머리를 자르던 날 할머니도 머리를 잘랐어. 할머니가 아프기 전에는 할머니가 늘 내 머리를 묶어주고 땋아 주었는데, 엄마는 할머니처럼 예쁘게 못 묶어. 늘 같은 모양으로 고무줄로 질끈 묶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칼이 주르르 흘러내리지. 귀밑에서 찰랑거리는 내 머리를 보고 할머니가 말했어.

나도. 나도. 나도 꽃님이처럼 자를 테야.”

할머니, 다희. 나 다희잖아. 꽃님이 아니고.”

몰라. 몰라. 나도 꽃님이 저년처럼 예쁘게 잘라 줘.”

할머니는 기억이 거꾸로 가는 병에 걸렸다고 아빠가 말했어. 할머니에게 나는 손녀 다희가 아니라 어릴 적 친구 꽃님이라고. 가까운 날의 기억은 점점 지워지고, 오래전 기억만 생생하게 남았다고.

할머니 방은 무척 쓸쓸해. 할머니 옷이랑 이불이랑 모두 태워버렸거든. 남은 건 할머니랑 같이 베던 커다란 베개뿐이야. 이건 절대 안 된다고 내가 울며 매달렸어. 참 이상해. 태워버린 건 옷이랑 이불뿐인데, 옷장도 텔레비전도 모두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할머니가 없는 방은 텅 비어버린 것 같아.

커다란 옷장 안에는 베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사각사각 소리가 나던 모시 적삼이랑 소매에 꽃으로 수놓은 누빔 두루마기도 이제 없어. 할머니가 수놓은 그 꽃들은 정말 예뻤는데.

베개를 꺼내다가 깜짝 놀랐어. 베개 아래에 흉한 것이 놓여 있었어. 한참을 보고서야 그게 윌로우인지 알아차렸지. 윌로우를 안고 나는 소리를 질렀어.

할머니이이이이!”

어른들이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어. 나는 울음을 터트렸어.

할머니가 윌로우 머리를 잘라 버렸어!”

나는 어른들 뒤에 할머니가 움츠리고 숨어 있는 것 같아서 그쪽으로 눈을 흘겼어.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 허리까지 내려오던 윌로우의 아름다운 머리칼은 싹둑 잘려버렸어. 그렇게 윤기 나고 부드럽던 머리칼인데, 지금은 온통 하늘을 향해 뻗쳐 있어.

언제부턴가 윌로우가 보이지 않았어. 아마 할머니랑 내가 머리를 자른 날부터였을 거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어. 윌로우를 내어놓으라고 할머니를 다그치면 할머니는

꽃분이는 내 거야. 울 아부지가 장에 갔다 사다 주신 거야.”

그러다 그만 울어버리곤 했지. 다른 장난감들처럼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머리가 잘려버리다니.

, 그깟 인형 하나 가지고 소란이니. 내가 하나 새로 사 줄게.”

작은고모는 어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저렇게 얄밉게 할까. 언젠가 할머니가 웃으면서 말했지. 작은고모를 가졌을 때 할아버지가 토끼 고기를 구해다 줬는데, 그게 토끼가 아니라 여우 고기였던 모양이라고.

윌로우는 어디 가서 사올 수 있는 그런 인형이 아니야. 윌로우는 내 친구야. 내가 아주 아기였을 때 아빠가 사주셨어. 그때부터 나는 윌로우랑 같이 잠자고, 같이 놀고, 같이 울고, 같이 웃었어. 할머니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윌로우는 원래 뚱뚱하고 좀 못생겼지.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입술은 퉁퉁해. 동글동글한 코 위에는 주근깨도 나 있고. 유일하게 예쁜 곳이라고는 머리밖에 없었는데, 이제 윌로우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못난이 인형이 돼 버렸어. , 도대체 왜 그런 거야, 할머니.

엄마가 손수건을 곱게 접어서 윌로우 머리 위에 두건처럼 씌워 주었어. 씩씩한 인디언 소녀 같던 윌로우는 이제 가여운 성냥팔이 소녀처럼 보여.

이 인형은 너를 똑 닮았구나. 네 아버지는 어디서 이런 예쁜 것들을 사다 주시니?”

어린아이가 된 할머니는 늘 내 장난감을 부러워했어. 나는 할머니와 장난감을 나눠 쓰곤 했지. 할머니가 나를 자꾸 꽃님이라고 불러도, 난 여전히 할머니가 좋았어. 어쩌면 아이가 된 할머니가 더 좋았던 것 같아. 소꿉놀이를 해도, 훌라후프를 돌려도, 할머니랑 같이하면 뭐든 신이 나고 재미있었으니까. 막대 사탕을 먹다가 서로 바꿔 먹을 수도 있었지.

할머니는 꽃을 좋아했어. 옷 소매에 꽃으로 수를 놓고, 꽃으로 화환을 만들어 내 머리에 씌워주기도 했어. 마당에는 채송화, 해바라기, 분꽃 같은 꽃들이 계절마다 피었어.

할머니는 왜 그렇게 꽃을 좋아해?”

그러면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지.

예쁘잖니. 이 세상에 꽃보다 예쁜 것은 꽃님이 너밖에 없단다.”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어? 엄마는 이제 다시는 할머니를 볼 수 없다고 말했어. 차가운 땅속에 할머니를 묻고 왔는데, 나는 자꾸 어딘가에 할머니가 살아 있는 것 같아. 지금이라도 당장 아빠 등 뒤에서 나와 윌로우를 빼앗아 갈 것 같아. 이건 꽃분이라고, 윌로우가 아니라 꽃분이라고, 아버지가 장에 갔다 사다 주신 거라고, 그렇게 말할 것 같아. <계속>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