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주(大悲呪) 下

음식이 맛이 없니? 왜 안 가져다 먹어?”

아영이는 세 번째 접시를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야채 쪼가리가 놓여있는 접시를 포크로 휘저으며 앉아 있었다.

스테이크는 안 나오니?”

, 미안해. 뷔페만 먹어야겠다. 아빠가 바빠서 먼저 계산하고 가셨는데, 스테이크 주문하는 걸 깜박하신 것 같아. 아빠 배가 내일 출항이라서 정신이 없으셨거든.”

그래? 이번엔 어디로 가시니?”

으응, 러시아. 대구를 잡을 거래. 러시아 대구는 엄청나게 크대. 내 키 만한 대구도 아주 흔하대. 돌아오실 때 러시아에서 마트료시카 인형을 사주신다고 했는데, 정말 기대돼.”

아빠 얘기를 하는데도 아이들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대구라는 물고기에 대해서, 러시아의 추위에 대해서, 마트료시카 인형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어보고 호응해줬을 것이다.

아영이의 아빠가 배를 탄다는 건 사실이었다. 아이들에게 말한 것처럼 엄청나게 큰 원양어선 선장은 아니었지만. 아빠에게 가서 사는 동안 아영이는 아빠를 세 번 만났다. 다음 승선 때까지 아빠는 집에서 내내 잠만 잤다. 검게 그을린 피부, 러닝셔츠 위로 불거져 나온 척추의 마디들, 감지 않은 머리에 하얗게 달라붙어 있는 비듬, 새엄마가 아영이에 대해서 험담을 하면 헛기침만 하다가 이제 좀 그만해라는 짜증스런 말투, 그것이 아빠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자. 나 미술학원 가야 해.”

은채가 일어서자, 아이들이 모두 따라 일어섰다.

아영이 넌? 좀 더 먹고 올래? 배 많이 고픈 것 같은데.”

마지못해 일어서면서 아영이는 내내 아쉬웠다. 아직 립 바비큐도, 새우구이도, 스파게티도 먹지 못했는데. 작별인사를 하듯 푸드 테이블 위의 케이크와 마카롱을 눈으로 쓸어보며 패밀리레스토랑을 나왔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후, 거리에 혼자 남은 아영이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선물 받은 꾸러미들을 당장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었다. 스위스제 크레파스, 강아지 모양의 머리핀, 바둑판 모양의 갈색 필통. 모두 명품 딱지가 붙은 것들. 아영이가 어렵게 마련한 패밀리레스토랑 식비보다 더 비싼 물건들. 하지만, 이 중에 진짜 아영이를 위한 선물이 있을까. 안 쓰고 처박아 놓았던 것들을 가져왔으면서 생색만 내고. 심지어 필통 속에는 꺼내보지도 않은 카드가 들어있었다.

민서야, 생일 축하해.’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해서 왔는데, 한 접시도 채 비우지 않다니.

한 달 전부터 아영이는 생일파티를 패밀리레스토랑에서 해야 한다고 할머니를 졸랐다. 할머니는 아영이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 전부터는 밥도 먹지 않고 매일 울며 매달렸다. 할머니가 걸레를 방바닥에 패대기치며 소리쳤다.

도대체 그 패밀린가 머시기에 가려면 얼마가 필요한 게냐?”

할머니가 꼬깃꼬깃 접힌 만 원짜리 지폐 여섯 장을 아영이 앞에 놓았을 때, 아영이는 할머니가 늘 끼고 있던 반지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반지가 있던 자리에 하얗게 남아있는 자국을 애써 못 본 체했다.

저녁에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할머니가 가져다준 원피스가 마음에 꼭 들었다. 할머니는 자선단체에 공공근로를 다녔다. 자선단체에서 기부 받은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을 집으로 가져왔다. 아영이는 내가 거지냐며 심술을 부렸지만, 그중에는 메이커도 꽤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렇게 비싸고 깨끗한 물건들을 공짜로 기부하는 걸까. 아영이는 늘 궁금했다.

소매 안쪽이 찢어져 있는 걸 말끔하게 바느질해 놓았지. 어떠냐? 새것 같지?”

베이지색 체크무늬 원피스였다. 무늬 때문에 바느질 자국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영이는 휴대폰으로 원피스 상표를 검색했다. 태그를 보니 정품이 틀림없었다. 아빠가 영국에서 사 온 거라고 해야지. 아영이는 원피스를 입고 거울에 비춰봤다. 처음부터 아영이의 옷이었던 것처럼 소매도 치마 길이도 꼭 맞았다.

채팅방은 한산했다. 아영이는 오후에 찍어두었던 예린이 사진을 올렸다. 그 아래에 아이언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언제부턴가 예린이는 웃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표정이 없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가면을 쓴 것처럼. ‘불타는 철사의 열기도 좀 시들해졌으니, 이제 철가면으로 밀고 가야겠다고, 아영이는 생각했다.

아영이는 예린이가 싫었다. 아영이의 마음을 이해해줬던 유일했던 친구. 더 정확히는 예린이가 알고 있는 자신의 과거가 싫었다. 가난, 병들고 불쌍한 할머니, 초라한 아빠, 그런 아빠에게 버림받은 자신, 그리고 추하고 못난 마음…….

아영아, 그 옷 어디서 났니?”

은채가 물었다.

아빠가 영국에 가셨을 때 사다 주신 거야.”

그래? 내 옷이랑 너무 똑같아서. 한정판으로 나온 거라 흔하지 않은 건데, 소매가 찢어져서 입을 수 없게 됐거든. 엄마가 기부했다고 했는데. 혹시 소매 안쪽 좀 보여줄 수 있니?”

▲ 그림-강병호

다정한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은채의 눈빛이 싸늘했다. 어쩌면 은채는 벌써 바느질 자국을 봐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은채 뒤에는 주연이와 민서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 한쪽만 올린 입술, 단단하게 낀 팔짱. 아이들은 예린이를 대할 때의 표정과 몸짓으로 아영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영이는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따위 원피스, 당장에라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

내가 불쌍하니?”

맥없이 그네를 흔들며 아영이가 물었다. 예린이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네 엄마는 왜 팔찌에 커다란 슬픔이라는 글자를 새기셨을까? 대비주는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하는 기도라고 아빠가 그랬어. 관세음보살님의 눈에는 우리 모두 다 똑같이 보일 거야. 부자도, 가난뱅이도,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우리는 모두 가련하고 불쌍하지. 이 세상에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없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보고, 함께 느끼는 게 나쁜 거니?”

병상에서 엄마는 아영이를 볼 때마다 가련한 우리 아영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아영이에게 사랑하는이라는 말로 들렸다. 아영이가 그토록 듣기 싫었던 말, 연민. 그 말을 사랑이라고 바꾸고 나니 모난 마음이 한결 둥글어지는 것 같았다.

내일 학교 올 거지?”

예린이가 길 건너편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캄캄해진 놀이터에 앉아서 엄마의 팔찌를 매만지며 아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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