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술궂은 겁쟁이와 한심한 도깨비 下

▲ 그림-강병호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이들이 정민이를 빙 둘러쌌다.

빗자루를 가져왔니?
거기에 빗자루 같은 건 없었어.”
아이들은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빗자루가 묶여 있는 걸 내가 분명히 봤어. 지난 설날에 아빠랑 성묘 가다가 봤다고.”

재민이가 말했다.
빗자루가 없는 게 당연하지 않아? 내가 갔을 땐 이미 밤이었고, 빗자루는 도깨비로 변신한 후였으니까.”
그럼 도깨비를 봤다는 거야?”

윤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보기만 한 줄 아니? 이야기도 했지.”

아이들은 일제히 재민이를 봤다. 눈빛이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허풍이야. , 혼자서 거, , 거길 다녀왔을 리 없잖아.”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하는 재민이의 표정을 보는 게 즐거웠다.
그럴 줄 알고 증거를 가져왔지.”

정민이는 주머니에서 방울을 꺼냈다. 무당집 대문 앞에 꽂혀 있는 기다란 대나무 꼭대기에 걸려있던 것이었다.
도깨비가 가져다준 거야. 이거면 내가 무당집에 다녀갔다는 걸 믿을 거라고 말했어.”
재민이는 방울을 요리조리 훑어보더니 책상 위에 던졌다.
, 거짓말쟁이. 어디서 굴러다니는 방울을 주워 와서 허풍이나 떨고.”

재민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정민이 주위에 남아 있었다. 도깨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무섭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질문이 날아왔다. 정민이는 신이 나서 자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도깨비와 친구가 되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정민이는 매일 밤 도깨비를 찾아갔다. 도깨비에게는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피자가 먹고 싶다고 하니 도깨비는 피자가 뭐냐고 물었다. 정민이는 다음날 피자 사진을 가져갔다. 도깨비가 피자를 뚝딱 만들었다. 하지만 그 피자는 먹을 수가 없었다. 고추장 빈대떡 같은 맛이었다. 프라이드치킨도 탕수육도 마찬가지였다. 도깨비는 자기가 모르는 것은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도깨비는 으름이나 개암 같은 맛있는 산열매를 주었고, 도깨비와 같이 있으면 컴퓨터도 장난감도 필요 없었다. 도깨비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정민이는 충분히 즐거웠다.

가장 재미있는 놀이는 쑥쑥 놀이였다. 도깨비는 정민이를 어깨에 앉히고 키를 쑥쑥 키웠다. 높이 아주 높이 올라갔다.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었다. 도깨비 어깨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아주 작아 보였다. 작아진 세상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아빠는 곁에 없었지만 저 아래 어딘가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주 멀게 느껴졌던 거리도 작아진 세상 속에선 가깝게 느껴졌다.

네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

정민이가 물었다.

나에게는 엄마 아빠가 없어. 우린 그냥 생겨나. 사람들이 물건을 오래 쓰다 보면 그게 도깨비가 되는 거야. 아끼면서 오래 쓰다 보면 그 물건에 정령이 깃드는 거야.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물건을 오래 쓰지도 않고 아끼지도 않지. 그래서 도깨비가 점점 사라지는 거야. 나는 무당 할멈의 남편, 그러니까 먹구 할아범이 총각 때 만든 싸리 빗자루야. 하도 오래 써서 몽당 빗자루가 됐지. 그러고 보니 내 아빠는 먹구 할아범인 셈이네.”

친구들은 모두 어디 있어?”

친구들은 산속으로 떠났어. 그들은 사람들이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어. 하지만 난 사람들이 좋았어. 가마솥 뚜껑을 솥 안에 넣어놓으면 다음 날 아침밥 지으러 나온 할멈이 솥뚜껑을 꺼내려고 쩔쩔매는 꼴을 보고 키득거렸지. 지게 작대기를 장작더미 속에 숨겨 놓거나 쇠똥을 마당에 수북하게 쌓아 놓기도 했어. 할멈이 부지깽이를 허공에 휘두르며 소리쳤지. 이 녀석 잡히면 혼쭐을 내줄 테다! 도깨비들은 이런 나를 한심하게 생각했지. 하지만 도깨비들이 잊은 게 있어. 믿을 수 없다던 사람들이 우리의 엄마 아빠라는 사실을 말이야.”

이 세상에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는 존재는 단 하나라도 충분하다고 정민이는 생각했다. 도깨비는 무슨 이야기든 들어주었고, 정민이의 슬픔과 화와 두려움을 같이 아파하고 위로했다. 단 한 명의 친구가 생겼을 뿐인데, 정민이에게 많은 변화가 생겼다. 정민이는 더 이상 반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윤호의 장난감을 모두 돌려주고 사과도 했다. 정민이가 아이들을 괴롭힌 건 사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정민이를 무시하고 따돌릴까 봐 일부러 사납게 굴었다. 정민이가 먼저 마음을 열자 아이들도 정민이에게 성큼 다가왔다.

정민아 너 어디 아프니? 얼굴색이 이상해.”

주희가 말했다. 정민이는 거울을 봤다. 얼굴이 좀 까매진 것 같기도 하고 초록빛이 돌았다. 머리가 간질간질했다. 머리카락을 들춰보니 정수리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우리가 헤어질 때가 된 것 같아.”

혹처럼 솟아오른 정수리를 보며 도깨비가 말했다.

도깨비와 가깝게 지내면 도깨비를 닮게 된단다. 조금 있으면 정수리를 뚫고 뿔 하나가 뾰족 솟아오를 거야. 나도 이제 친구들에게로 가야겠어. 정민이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도깨비가 정민이에게 구슬 하나를 주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유리구슬이었다.

제석천이라는 궁전에는 커다란 그물이 있대. 그물코마다 구슬이 달려 있는데, 그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고 있다는 거야. 정민이 구슬 옆에 엄마 아빠 구슬이 있고, 재민이, 주희, 윤호, 영재 구슬이 있지. 재민이 구슬에는 정민이가 비치고, 정민이 구슬에는 주희가 비쳐. 정민이가 슬프면 엄마 구슬이 흐려진단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면서 연결되어 있으니까. 이건 내 구슬이야. 가만히 들여다보면 네 모습이 보이지. 정민이는 나와 아주 가까이에 있으니까.”

정민이는 도깨비와 헤어지기 싫었지만, 도깨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민이는 단골나무 둘레에 묶여 있는 줄을 풀었다. 매듭은 아주 단단했지만, 차근차근 풀었다.

이따금 도깨비가 그리울 때면 도깨비가 준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구슬 속에는 도깨비의 얼굴이 보였다. 정민이는 환하게 웃었다. 도깨비의 구슬이 반짝일 수 있게 가장 환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