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주(大悲呪) 上

▲ 그림-강병호
엄마 나 교정기 빼면 안 될까?”

, 안 돼.”

엄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봐라. 눈 딱 감고 2년 보내고 나서 얼마나 예뻐졌니? 교정기 처음 끼고 그렇게 아픈 것도 참았는데 이제 와서 빼면 아깝잖아.”

난 그냥 안 예쁜 것보다 불편한 게 더 싫어.”

엄마처럼 평생 주걱턱으로 살래?”

엄마는 튀어나온 아래턱을 과장해서 앞으로 쭉 뺀 후에 위아래로 딱딱딱 이를 부딪쳤다. 엄마에게 말해봤자 소용없을 줄 알았지만, 예린이는 말이라도 꺼내보고 싶었다. 교정기를 빼려면 앞으로 1년은 더 있어야 한다. 그 시간이 예린이에게는 10년도 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면대 앞에서 이를 살펴봤다. 역시나 고춧가루가 붙어 있었다. 위에 두 개, 아래에 한 개. 밥을 먹고 물로 여러 번 입을 헹궜는데도 교정기 사이에 낀 고춧가루는 빠지지 않았다. 예린이는 오랫동안 이를 닦았다. 고춧가루가 모두 빠진 것을 확인한 후에도 구석구석을 살피며 한참을 더 닦았다.

그 일은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다. 사진 속에서 예린이는 웃고 있었고, 활짝 벌린 입술 사이로 교정기에 낀 고춧가루가 보였다. 사진 아래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었다.

불타는 철사.’ 사진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예린이도 그 사진을 보고 웃었을까.

ㅋㄷㅋㄷ, ㅎㅎㅎ 같은 내용으로 시작된 댓글은 점점 정도가 심해졌다. 더러워. 구역질 나. 예린이 배 많이 고프겠다, 음식 덜 먹어서. 저거 떼어서 다시 입속에 처넣어 주고 싶다…….

예린이가 좀 더 활달한 성격이었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을 모두 웃길 만한 장난스러운 댓글을 달았더라면. 당장 사진 지우라고 화를 냈더라면. 예린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진을 올리고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 아이가 아영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뿐.

그 후로 손거울을 들고 다니며 자주 치아를 살폈다. 채팅방에는 또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화재 현장을 살피고 있는 소방관 예린이.’

체육 시간에 달리다가 신발이 벗겨져도, 수업 시간에 필통을 떨어뜨려도, 누군가의 농담에 웃어도, 예린이의 행동, 표정, 말투 하나하나가 채팅방에서 중계되었다.

아이들은 예린이가 그 방에 없다는 듯이 예린이에 대해 지껄였다. 채팅방에서 나오면 1초도 되지 않아 초대되었다. 예린이는 휴대폰을 잘 보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글이 올라올 때마다 알람음이 울리면 옷장이나 베개 밑으로 휴대폰을 던져놓았다.

지나간다. 이 순간은 반드시 지나간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예린이는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아빠는 힘든 상황이 되면 이 말을 떠올린다고 했다. 힘겨운 순간은 반드시 지나가게 마련이라고. 이 순간은 언제쯤 지나가게 될까?

예린이는 아영이 엄마가 선물한 팔찌를 만졌다. 나무 구슬 위에 한문이 빼곡하게 새겨진 팔찌였다. 아영이의 엄마는 병실에서 나무 구슬 위에 이 글씨를 한 자 한 자 새기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아영이를 따라 병실에 갔을 때, 아영이 엄마는 이 팔찌를 손목에 끼워주었다.

가엾은 우리 아영이 손, 언제까지나 꼭 잡아주렴.”

아빠는 이 팔찌가 대비주(大悲呪) 염주라고 했다. 대비는 큰 슬픔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팔찌에 새겨진 글씨를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고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구슬에 새겨진 글씨를 손가락으로 만지고 있으면 슬픔이 촉촉하게 가슴 속에 배어드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렀다. 축축해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드는 것이 예린이에게는 마지막 일과가 되었다. 이 순간이 영원히 지나가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교실로 들어서다가 뛰어오는 아영이와 부딪쳤다.

미안해.”

똑바로 보고 다녀. 주둥이가 삐꾸 되더니 이젠 눈까지 삐었니?”

아영이는 예린이를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교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이들은 아영이의 말에 키득거리지 않았고, 뛰어나가는 아영이의 등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정말 구질구질해.”

주연이가 말했다. 주연이, 은채, 민서. 아영이를 친구라고 불렀던 아이들이 이제 아영이 뒤에서 아영이를 향해 눈을 흘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린이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영이가 아이들의 새로운 먹잇감이 되었다는 걸.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영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휴대폰을 들고 채팅방에 글을 올렸다. 어딘가에 있을 아영이의 휴대폰에 쉼 없이 알람이 울리겠지. 딩동, 하는 짧고 경쾌한 소리가 그 애의 가슴을 할퀴고 있을 것이다.

텅 빈 교실에는 아영이의 가방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예린이는 아영이의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교실을 나섰다.

아영이가 전학 왔을 때, 예린이는 무척 기뻤다. 3학년 때 전학 가기 전까지 아영이는 예린이의 단짝이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고, 유치원도 함께 다녔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영이는 이혼으로 헤어져있던 아빠에게 갔다. 몇 번인가 편지를 보냈지만, 아영이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차츰 아영이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되었을 때,아영이가 돌아왔다.

돌아온 아영이는 어딘지 달라 보였다. 예린이가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하는데도 아영이는 지냈지?” 차갑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끝이었다.

아영이의 집은 같은 단지였지만 길 건너편에 있었다. 그곳은 임대아파트였고, 주민들은 그곳이 우리가 사는 곳과 같은 이름의 단지라는 사실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아영이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었다. 작은 어깨가 흔들렸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애가 울고 있으리란 걸. 예린이는 흔들리는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넌 아주 즐겁겠구나. 이런 꼴을 보니까 속이 시원하니?”

못된 말을 하고 심술을 부려도 예린이는 아영이가 밉지 않았다. 아영이를 보면 왠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어스름이 서서히 놀이터의 공기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방을 놓고 돌아서는데 아영이가 손을 잡았다.

가지 마. 잠깐만 같이 있어 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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