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下)

▲ 그림-강병호
*

죽음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바람처럼 이리로 저리로 쓸려 다녔다. 시간도 공간도 이 세계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과거의 어느 곳에 머물렀다가 낯선 곳, 낯선 존재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어느 곳 하나 쉴 곳이 없었다. 무수한 빛과 색채의 세상. 때로는 강렬하고 투명한 빛이 두려워 도망치고, 때로는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빛에 이끌렸다.

무상아!”

시구 스님께로 달려갔다. 스님은 종종 내 이름을 불렀다. 스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 나를 쫓는 무리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것들, 잿빛 연기를 피워 올리며 나를 두렵게 하고, 욕망하게 하며, 분노하게 하는 무리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스님은 너럭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셨다. 반쯤 감은 눈빛이 고요했다.

네게 보이는 모든 것들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환영이며 꿈같은 것이다. 너의 업이 만들어낸 그림자다. 그러니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것에 이끌리지도 말아라. 네 본래의 마음자리를 생각해라.”

스님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나는 스님이 마음으로 하는 소리를 들었다.

복슬이는 자기 자리에 엎드려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내가 떠난 것을 알고 있을까.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착하고 순한 개야. 부디 슬퍼하지 말기를. 서로 목줄에 묶여 있어 핥아주고 보듬어줄 수 없었지만, 내 아픈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검둥이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용케도 목줄을 푸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검둥이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복슬이의 기색을 살폈다. 복슬이가 검둥이를 노려봤다. 콧잔등에 잔뜩 주름을 잡고 으르릉거리다가 캉, 하고 날카롭게 짖었다. 검둥이는 꼬랑지를 내린 채 냉큼 뒷걸음질 쳤다. 내가 뭐라고 했더냐. 너 같은 무지렁이는 복슬이의 신랑이 될 수 없다고 했지. 저만큼 도망을 치고서도 미련이 남았는지 쉬 떠나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는 검둥이를 향해 콧방귀를 뀌어줬다.

 

*

일주문 밖에서 추레한 사내가 휘청거렸다. 손으로 아픈 다리를 짚으며 걸음을 디딜 때마다 잘 굽혀지지 않는 다리가 허공에 호를 그렸고, 온몸이 여린 가지처럼 흔들렸다. 그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꼬질꼬질한 소매로 이마의 땀을 쓸었다. 걷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고행이었다. 정작 힘든 것은 그의 성한 다리인 것 같았다. 성한 다리 한 짝에 그의 무게와 더불어 온 우주의 무게가 실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낮추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에 대한 적의는 혼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도, 또 지금도 나에게는 그에게 맞설 힘이 없었다. 그것이 나를 비참하고 두렵게 만들었다.

그날, 시구 스님이 출가를 결심했던 날, 그도 나도 불구가 되었다. 나는 다리와 가슴뼈가 부러져 평생 한쪽 다리를 들고 살아야 했고,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를 잃었다.

시구 스님과 마주 앉아서 그는 오래도록 검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깡마른 그의 몸은 자루처럼 너부러졌다. 그의 얼굴은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인비늘이 허옇게 붙어 있었다.

내가 정말 미안했다. 나를…… 용서해다오.”

스님은 말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스님의 눈빛에는 두려움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고여 있는 물처럼 고요하고 맑았다.

스님은 그에게 삼배를 올렸다. 절 한 번에 사위가 밝아지고, 절 두 번에 그윽한 향내가 났으며, 절 세 번에 고요한 진동이 주위를 감쌌다.

 

*

맙소사! 저 둘이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복슬이가 검둥이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 시커먼 덩어리가 복슬이 위로 타고 올라갔다. 복슬이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복슬이에게는 고통도 기쁨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자신을 맡긴 듯이 보였다.

어찌하여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일까. 이제 복슬이와 나는 다른 세상에 있는데. 어찌하여 저 검은 개를 향해 엄청난 질투심이 불타는 걸까. 검은 무리들이 내 뒤를 쫓았다. 잿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어느 곳 하나 피할 곳이 없었다.

나에게 발이 있었더라면 복슬이에게 갈 수 있었을 텐데. 나에게 혀가 있었더라면 컹컹 짓는 소리가 저 둘을 놀라게 했을 텐데. 나에게 이빨이 있었더라면 저 시커멓고 징그러운 다리를 와작 물었을 텐데. 나에게는 발이 없다. 나에게는 혀가 없다. 나에게는 이빨이 없다.

둘 사이로 희미한 빛이 어른거렸다. 뿌옇고 어두운 푸른빛이었다. 저 빛 속으로 들어가 숨고 싶었다. 저 빛 속으로 들어가 쉬고 싶었다. 저 빛 속으로 들어가 몸을 얻고 싶었다.

무상아!”

내가 방황하고 흔들릴 때마다 시구 스님은 어김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너럭바위 위에서 좌선에 든 스님은 불상처럼 보였다. 온기도 숨도 없이 오직 그 자리에서 빛나는 존재 자체로 보였다. 밝고 투명한 빛이 스님을 감쌌다. 아니, 그 빛은 스님 안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스님 안에 있는 청정한 기운이 스님을 비추고 그 주위까지 밝게 진동했다.

고귀한 존재 무상아! 세상의 모든 것은 네 마음이 지은 것이다. 네 마음이 그린 것이다. 본디 태어남이 없으니 죽음도 없다. 애욕이 없으니 질투도 없다. 잘못이 없으니 용서도 없다. 그러니 헛된 욕망에 휩쓸리지 말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본래 네 마음자리로 가라.”

끓어오르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복슬이도 검은 무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경 읊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 10년 동안 이 절에 머물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구절. 꿈결에서조차 들려오던 말씀.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모습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사물의 겉모습을 보고 그것이 참된 모습이 아닌 줄 알면,

곧바로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금강경> 5장 제1구게

 

앞에 있는 것은 오직 밝은 광채에 싸인 스님의 모습뿐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그 말씀은 내 안에 있었다. 그 말씀의 소리는 내 안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산뜻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내가 점점이 스러지고 있었다. 나는 스님에게로 갔다. 나의 가장 바깥부터 안쪽까지 녹여 나갔다. 밝고 투명한 빛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빛 속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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