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스마트 워치 上

▲ 그림-강병호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무도 지희 시계에 관심 없어요.”

가영이 말에 교실이 술렁거렸다. 아이들은 휴대폰이나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확인하며 종례가 길어지는 것에 불평을 쏟아놓았다. 선생님이 난처한 표정으로 지희를 봤다. 아이들은 가방과 사물함을 열어 각자의 소지품을 꺼내놓았고, 지희가 잃어버린 시계는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아이들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교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학원 버스에 타야 했다.

가영이 말이 맞았다. 시간도 잘 맞지 않는 오래된 태엽 시계를 갖고 싶어 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최신형 스마트 워치였다. 티머니도 안 되고 음악도 들을 수 없는 시계를 훔쳐서라도 갖고 싶어 하는 아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선생님 제가 다시 잘 찾아볼게요. 물건을 잘 관리하지 못한 잘못이니까요. 얘들아, 미안해.”

지희가 씩씩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잘것없어도 내게는 정말 소중한 시계야.”

지희가 속삭였다. 지수는 지희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래. 알아. 그게 너에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지희가 잃어버린 시계는 그 애 엄마의 시계였다. 금색 도금이 벗겨진 오메가 시계였다. 지희 아빠가 엄마에게 청혼할 때 선물한 시계라고 했다. 지희는 그 시계를 좋아했다. 엄마가 생일 선물로 무얼 받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지희는 오랫동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 시계를 달라고 했다. 지희가 좋아했던 것은 시계 자체보다는 시계에 깃들어있는 추억이었을 것이다.

종례가 끝나자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을 나갔다.

지수야, 잠깐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할까?”

아이들이 지수 쪽을 흘끔거렸다. 선생님은 지수를 의심하고 있는 걸까? 지수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숨을 두어 번 크게 쉬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이들이 지희를 따돌리거나 괴롭히니? 지수는 지희랑 가장 친한 친구니까. 지희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보다 지수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마 반 아이들 중에서 지희 싫어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언제나 밝고, 착하고, 재미있는 아이니까요.”

혹시 지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물건을 너무 자주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어디에다 두고 기억 못 하는 건 아닐까? 벌써 세 번째 이런 일이 생기니까 선생님은 신경이 쓰이는구나.”

지희가 물건을 잃어버린 건 사실이에요. 저는 지희랑 늘 붙어 다니고 지희네 집에도 자주 가거든요. 지희가 물건 잃어버렸을 때 선생님께 말씀 안 드린 것도 많아요. 연필이나 필통 같은 사소한 것들이요. 누군가 지희 물건을 자꾸 훔쳐가는 건 사실인데,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사람이 전혀 없어요.”

시계를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지희는 자신의 물건이 자꾸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희가 연필을 잃어버리면 지수는 자신의 연필을 나누어 주었다. 지희가 새로 산 운동화를 잃어버렸을 때도 지수는 신지 않는 운동화 두 켤레를 주었다. 지희가 무언가를 잃어버릴 때마다 지수는 자신의 물건을 지희에게 주었다. 지수의 집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친구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것이 지수는 기뻤고, 지희도 불편해하지 않고 고맙게 받았다.

지수는 지희와 늘 붙어 다녔다. 사람들은 종종 지수와 지희에게 쌍둥이냐고 물었다. 생김새가 전혀 다른데도 쌍둥이거나 자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지수와 김지희. 세 글자 중에서 두 글자가 같았으니까. 지희의 부모님은 지수를 막내딸이라고 불렀다. 지희의 오빠와 언니는 지수를 친동생처럼 대했다. 지수는 그게 좋았다. 사람들의 오해가 아니라 정말로 지희의 쌍둥이 자매였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똑똑.

지수는 커다란 집이 싫었다. 방마다 가구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데도, 집에서는 늘 텅 빈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지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크고 밝은 소리로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방안은 물속처럼 컴컴했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 몸이 굳어버린 걸까. 엄마는 언제나 벽을 보고 잔뜩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지수가 볼 수 있는 건 활처럼 굽어 버린 엄마의 등뿐이었다.

가정부 아주머니는 안마 의자 위에 있었다. 지수가 들어오자 흘깃 보고는 다시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지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아주머니 눈빛이 정말 기분 나빴다.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먼지 한 톨 없이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식단에 맞추어 요리를 하고, 빨래를 했다. 집안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아주머니는 완벽했다. 다른 아주머니들처럼 엄마가 발작을 해도 무서워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로봇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만을 철저하게 했다.

지수는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아래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연필과 필통, 운동화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지수는 책가방 안의 속주머니에서 도금이 벗겨진 낡은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찼다.

엄마, 아빠한테 이 시계 받았을 때 좋았어?”

솔직히 좀 실망했었지. 세이코가 아니라서. 그때 내가 알고 있었던 제일 비싼 시계가 세이코였거든. 난 네 아빠가 싸구려 시계를 선물한 줄 알았단다. 네 이모가 최소한 2백만 원은 넘을 거라고 해서 기절하는 줄 알았지 뭐니. 이모는 백화점에서 일해서 그런 걸 잘 알았거든. 그때 엄마 월급이 70만 원도 안됐을 때였으니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어. 딸이 돈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셨지. 하지만 걱정했던 대로 그건 전부 아빠의 허풍이었단다. 결혼하고 보니 이 시계는 아빠의 전 재산이었어. 아빠는 가지고 있던 것을 전부 팔아서 달랑 시계 하나를 산 거였어. 덕분에 엄마는 결혼하면서 실반지 하나도 받지 못했지.”

아빠는 정말 못 말린다니까.”

지수는 지희의 엄마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소리 내어 깔깔 웃었다. 시계를 풀어서 상자 속에 넣었다. 상자의 뚜껑을 굳게 닫으면서 지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이 추억은 내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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