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손 下

▲ 그림 강병호
아빠는 가구 공장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따뜻한 나라에서 이곳으로 일하러 왔는데, 연수 기간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병에 걸린 아버지와 보살펴야 할 동생들이 많았다. 엄마는 사람들을 늘 조심스럽게 대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의 큰 눈망울이 좋았다고 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크고 넓적한 앞니를 보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다문 채 수줍게 웃는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아빠는 베트남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노래를 배워서 엄마에게 불러줬다. 엄마는 그 노래를 들을 때면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난다며 자꾸만 아빠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진호를 낳고 엄마는 엄마의 나라로 떠나야 했다. 다시 돌아와 아빠와 결혼하고 이곳에서 살기로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엄마가 다시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엄마는 꼭 돌아올 거야. 아빠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우리 진호가 있으니까. 진호가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아빠와 진호는 믿고 있었다. 엄마는 곧 우리 곁에 있게 될 거라고.

아빠, 그 알은 어떻게 됐을까? 아빠 펭귄이 그 알을 잡았을까? 아니면 너무 멀리 굴러가서 얼어 버렸을까? 아빠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없이 나는 살아갈 수가 없어. 나는 너무 춥고 배가 고파. 그러니까 일어나요. 눈을 떠요. 아빠. 엄마는 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데, 엄마가 돌아온대도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아빠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나를 두고 떠나지 마요, 아빠.”

비가 왔다. 모든 것이 젖어 버렸다. 진호의 책도, 밥솥도, 아빠와 진호의 옷들도, 이불도. 진호에게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주었던 것들인데, 집 밖에 나와 있으니 무척 초라해 보였다. 내놓은 지 며칠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손을 대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군가 함부로 버려놓은 쓰레기더미처럼 진호의 물건을 보며 인상을 썼다.

집주인 할머니가 진호와 마주칠 때마다 집세를 내놓으라고 닦달을 해도 진호는 병원과 집을 오가며 밥을 지어 먹고 학교에 다녔다.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책도 가방도 모두 집에 있어서 진호는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아빠가 다시 건강해지면 저런 것들은 얼마든지 다시 살 수 있을 거야. 진호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수첩은 꼭 가져와야 해. 거기엔 엄마의 사진과 주소가 있으니까. 사진 속에서 엄마는 늘 웃고 있었다. 커다란 진호의 눈은 엄마를 닮았다. 동글동글한 콧방울과 넓적한 앞니도.

아빠는 엄마가 적어놓고 간 주소로 편지를 썼다. 진호가 글씨를 쓸 수 있게 되면서 진호의 편지도 함께 부쳤다. 엄마, 보고 싶어요. 한 문장을 쓰고 나면 어떤 말을 더 써야 할지 몰라서 진호는 편지지를 펼쳐놓고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엄마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엄마는 왜 답장을 한 통도 보내지 않았을까. 아빠는 주소가 잘못 되었거나, 어쩌면 엄마가 이사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 편지가 엄마에게 전해질지도 모르니 계속 편지를 쓰자고 진호를 다독였다. 진호는 알고 있었다. 아빠가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건, 그것이 엄마를 위해서 아빠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첩은 어디쯤 있을까. 책가방 안에? 아니면 책 더미 속에?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수첩을 가져오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호는 몇 시간째 골목 모퉁이에서 비를 맞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집주인 할머니가 창가에 서서 진호가 오는지 내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마르고 주름진 갈퀴 같은 손으로 진호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집세를 내놓으라며 경찰서로 끌고 갈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진호의 얼굴을 스쳤다. 차가운 것은 바람만이 아니었다. 창문에 서서 진호를 보고 있을 것 같은 주인집 할머니의 눈빛과 사람들의 싸늘한 말투,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에서 다 냉기가 끼쳤다. 덜덜 떨리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온몸이 꽁꽁 얼어버릴 것 같았다. 몸속에 흐르는 혈액까지도.

어디선가 향내가 고요하게 풍겨오고,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진호는 눈을 떴다. 향림 스님이 빙그레 웃고 계셨다. 여긴 어디일까.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병원까지는 어떻게 왔던 것 같은데 그 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행이구나. 이렇게 깨어나서. 병원에서 쓰러졌단다. 온몸이 젖은 채로 열이 펄펄 났었지. 언제나 밝게 웃고 씩씩해서 진호에게 어려운 일이 있는 걸 몰랐네. 정말 미안하다.”

향림 스님이 미음을 입속에 흘려 넣어 주었다. 따뜻한 기운이 입속으로 들어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스님, 저기 그림 속에 저분은 누구세요? 손이 왜 저렇게 많아요?”

진호는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얼굴이 둥근 사람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커다란 꽃잎 위에 앉아 있었다. 반쯤 감은 눈빛이 고요하게 빛나고 입가에는 미소가 잔잔하게 머물러 있었다. 뒤에는 무수히 많은 손이 그려져 있었는데, 손 하나하나가 찬란하게 빛나서 빛무리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이시란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셨지. 천 개의 눈으로 우리의 어려움을 세세하게 보시고, 천 개의 손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보살피신단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겪든지 관세음보살님은 모두 알고 계시지. 나를 너에게로 이끈 것도 바로 저분이셔.”

눈이 천 개나 있으니 이 세상에 못 볼 것이 없겠네요. 그럼 우리 엄마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계실까요?”

물론이지. 진호가 다 나아서 씩씩하게 일어나면 같이 엄마를 찾아보자. 천수관세음보살님이 함께 하시니 엄마를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미음을 먹고 진호는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결에 진호의 이마를 만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 온기에 진호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단단한 얼음 조각까지 모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엄마?”

진호는 떠지지 않는 눈을 뜨려고 애썼다.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모습은 이마가 환하고 얼굴빛이 고운 향림 스님의 모습이었다가 까만 얼굴에 큰 눈을 가진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이었다가 이내 빛 무더기에 어른거리는 그림 속 관세음보살님의 얼굴이 되었다. 관세음보살님의 수많은 손 가운데 하나의 손이 진호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었다.

진호는 느낄 수 있었다. 아빠의 병상 위에도, 먼 나라에 있는 엄마에게도, 눈 위를 구르는 펭귄의 작은 알 위에도 따뜻한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진호는 다시 눈을 감고, 달콤한 잠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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