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술궂은 겁쟁이와 한심한 도깨비 中

▲ 그림-강병호
엄마는 오전에 일하러 나가서 밤 11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왔다. 외할머니가 쓰던 브라운관이 볼록한 텔레비전이 정민이의 유일한 친구였다. 정민이는 몇 개 되지 않는 채널을 돌리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잠이 들곤 했다.

무당집에 갈지 말지, 정민이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주희 말대로 아이들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세계 최고에 빛나는 겁쟁이들이니까. 도깨비 같은 것이 정말 있을까.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도깨비가 있을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정민이는 문방구 아저씨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문방구 아저씨는 가게 문을 닫으려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형광등 빛을 받은 아저씨의 민머리가 반짝 빛났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의 머리는 어딘지 이상했다. 보통 대머리인 사람들은 이마부터 벗어지고 머리숱이 없는데, 아저씨의 머리는 숱이 많았고 머리 중앙에서 살짝 빗긴 듯이 구멍이 나 있었다. 빵모자를 비스듬히 기울여 쓴 것처럼.

도깨비가 아저씨 머리에 불을 놓았다던데 사실이에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내 나이가 일곱 살이었거든. 여기 이 사진을 봐라.”

아저씨가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이때가 여섯 살 때. 머리에 구멍이 없지 않니. 여기 이 사진은 일곱 살 때야. 머리가 다 타버렸지. 머리에서 파란 불이 활활 타올랐어. 차가운 불이었지. 화상을 입지는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머리카락만 타버렸고, 그 자리에서 다시는 머리카락이 나지 않았어.”

그 집에 아직 도깨비가 살아요?”

아마 그럴 거다. 내 머리에 불을 놓은 후에 우리 할머니가 도깨비를 단골나무에 꽁꽁 묶어놓고 이사를 나왔지. 그 도깨비가 처음부터 그렇게 미쳐 날뛰었던 건 아니란다. 장난치는 걸 무척 좋아하긴 했지만. 심술이 나면 그저 그릇이나 깨먹고 솥뚜껑을 천장에 붙여 놓는 정도였지. 어린 시절에 도깨비는 내 유일한 친구였어. 생긴 건 우락부락해도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지. 어느 날엔가 마을 사람들이 산에서 멧돼지를 잡았는데, 돼지 피가 떨어진 줄 모르고 아버지가 빗자루로 길바닥을 쓸었지. 그 도깨비는 빗자루의 정령이었거든. 빗자루에 피가 묻으면 도깨비가 발광이 나지. 미쳐 날뛰는 도깨비를 무당이었던 할머니도 어쩌지 못하고 더는 해코지나 못 하게 나무에 붙잡아 매어둔 거야.”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문방구 아저씨가 등 뒤에서 말했다.

도깨비를 만나거든 절대 위로 쳐다보지 마라. 도깨비는 우리가 보는 만큼 크기가 커진단다. 아래만 보고 있으면 눈높이만큼 작아지지. 조심해라. 이 세상에 미친 도깨비만큼 무서운 존재는 없단다.”

무당집으로 가는 길엔 가로등이 없었다. 어두운 길 위에 희미한 달빛이 어룽졌다. 삐이 삐이 밤새가 울었다. 정민이는 무언가 시커멓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가 그게 자기 그림자인 걸 알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어디선가 스스스스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무 대문을 밀자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소리가 끼이익 하고 크게 울렸다. 재민이 녀석이 말한 나무에 빗자루 같은 건 묶여있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천 쪼가리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어이, 뭘 그렇게 기웃거리는 거야?”

뒤를 돌아보니 강아지만 한 작은 물체가 하나밖에 없는 발로 통통통 튀어나왔다. 정민이는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가 그 꼬마 도깨비니?”

달빛 속에 서 있는 도깨비는 짙은 초록색 피부에 더부룩한 머리칼 사이로 작고 귀여운 뿔이 뾰족 돋아나 있었다. 크고 둥근 눈은 맑게 반짝였고, 입 밖으로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뻗은 덧니가 무척 귀여웠다.

듣던 거랑 다르게 정말 귀엽게 생겼다. .”

? 내가 귀엽다고?”

도깨비는 통통 튀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정민이는 도깨비를 따라 위를 쳐다봤다. 그때였다. 도깨비가 점점 커지더니 나무만 해졌다. 귀여워 보였던 이빨은 끔찍해졌고, 부리부리한 눈이 파란 불을 내뿜으며 이글거렸다. 도깨비는 흉측한 입을 벌려 크아앙 하고 산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정민이는 그제야 도깨비를 올려다보지 말라던 문방구 아저씨의 충고가 떠올랐다. 정민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뭐야? 너 우는 거냐? , 순 겁쟁이였잖아?”

그게 아니야.”

정민이가 쏘아붙였다.

그럼 왜 우는 건데?”

사실 정민이도 이유를 몰랐다. 가슴 속에 갇혀있던 답답한 것들이 울음과 함께 터져 나왔고, 한번 터져 나온 감정은 물밀 듯이 자꾸만 쏟아졌다.

난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 그런데 이제 서울엔 우리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아빠도 없어. 내 장난감엔 빨간 딱지 같은 걸 붙이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내 장난감을 모두 버리고 왔어. 난 여기가 정말 싫어. 엄마는 매일 한숨 쉬다가 신경질만 부리고, 냄새나는 콩나물이랑 시금치도 지겨워. 여기에는 피자도 없고, 치킨도 없고, 컴퓨터도 없어. 그리고 난 친구도 없어. 모두 나보고 심술쟁이래. 이 세상에 내 편은 한 명도 없어. …… 정말…… 외로워.”

정민이가 우는 사이 도깨비는 점점 작아져서 정민이만 해졌다. 도깨비는 초록색 팔을 뻗어 정민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정민이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원한다면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줄게.”

밤이 새도록 그치지 않을 것 같았던 울음은 점차 잦아들었다. 정민이는 고개를 돌려 도깨비를 봤다. 도깨비는 울고 있었다.

외로운 게 어떤 건지 잘 알아. 오랫동안 난 여기에서 혼자 지냈어. 무당 할머니가 나를 이 나무에 묶어두고 떠나면서 말했어. 피가 묻어 미친 도깨비에게는 약이 없단다. 비바람에 피가 씻기길 기다리는 수밖에. 때가 되면 다시 와 풀어주마.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야.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 영원히. 도깨비 친구들도 이곳엔 오지 않아. 사실 난 엄청나게 한심한 도깨비거든.”

정민이는 어깨 위에 놓여 있는 도깨비의 손을 잡았다. 거칠거칠한 손에서 점차 따뜻한 기운이 배어 나왔다. 정민이는 빙긋이 웃었다.

원한다면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줄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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