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까만 조약돌 下

▲ 그림-강병호
할머니에게 조약돌을 받은 후부터 민준이는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서운 괴물에게 인사를 할 필요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도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서 민준이는 온갖 무서운 이야기들을 조약돌에게 속삭였다. 꿈속까지 쫓아와서 민준이를 괴롭혔던 수많은 괴물들은 점점 작아졌다. 모양도 색깔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지면 돌 속으로 쏙 들어갔다.

조약돌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온몸이 나른해지며 스르륵 눈을 감고 잠드는 것은 무척이나 달콤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민준이는 여전히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 집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책 속의 세계를 마음껏 상상했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으며, 낯선 사람을 만나거나 처음 시도해보는 일을 할 때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이상하구나. 무언가 달라졌어.”

밥을 먹다가 엄마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뭐가요?”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누나가 물었다. 대회 일정이 잡히면 누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치우곤 했다. 먹는다는 표현보다는 삼킨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음식을 씹기도 전에 뱃속으로 밀어 넣었으니까. 대회 직전에는 체급 때문에 체중 조절을 하느라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는데, 먹는 걸 워낙에 사랑하는 누나에게는 식사량을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 큰 고통이라고 했다.

글쎄다. 뭔가 분명히 달라졌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구나. 집에 오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지 않니?”

맞아. 나는 요즘 괜히 기운이 샘솟는 것 같아.”

아빠가 맞장구쳤다. 누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음식 흡입에 들어갔다. 민준이는 주머니 속의 돌을 만지작거리며 빙긋 웃었다. 민준이와 눈이 마주치자 엄마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민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들 요새 부쩍 자랐네.”

 

할머니의 말처럼 조약돌이 무거워졌다. 민준이는 큰 그릇에 물을 담아 잠시 조약돌을 담가두었다. 그러고 나면 조약돌이 다시 가벼워졌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돌을 받던 날 민준이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우리의 마음은 화가와 같단다. 마음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려내지. 무서운 것들과 걱정스러운 일들도 모두 마음이 그려낸 거란다. 우리 민준이가 마음의 도화지에 더러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괴물을 그리면 그건 무섭고 끔찍한 괴물이 된단다. 민준이가 어떻게 그리는지에 따라서 그건 물이 좋아서 물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는 귀엽고 상냥한 물의 정령이 될 수도 있지.”

할머니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 세상을 그려낸다는 말은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권도 전국 대회를 며칠 앞두고 지역 신문에 누나의 기사가 실렸다. 도복을 입고 힘차게 발차기를 하고 있는 누나의 사진이 실린 기사를 엄마는 곱게 오려서 냉장고 문에 붙여 놓았다.

그 무렵부터 누나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처음에는 체중조절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음식을 잘 삼키지 못했고, 억지로 먹으면 곧바로 토해버렸다. 누나는 학교에도 도장에도 나가지 않았다. 방문을 열어보면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누나를 볼 수 있었다.

엄마는 죽을 끓여서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비워지지 않은 죽 그릇을 들고 다시 나오며 한숨을 쉬었다.

부담감 때문일 거야. 모두들 메달을 딸 거라고 기대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당찬 아이니까 곧 이겨내겠지.”

아빠가 엄마를 위로했다.

 

조약돌이 없어도 괜찮을까?’

민준이는 마음에게 물어보았다.

그래. 괜찮을 거야. 이제 넌 마음으로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마음속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민준이는 누나의 손에 깨끗이 씻은 조약돌을 쥐여 주었다.

나 정말 바보 같지?”

큰 대회를 앞두면 누구나 불안해진대.”

아무것도 못하고 대회장에서 멍청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이 떠올라. 힘차게 발차기를 하려고 해도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며 비웃을 것 같아.”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우려고 하지 말고, 이 조약돌에게 말해봐. 이 조약돌이 불안한 마음을 모두 가져갈 거야.”

민준이는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누나에게 해주었다. 내일이면 누나가 툭툭 털고 일어날 거라고 마음속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다. 배고픈 게 제일 싫다고 투덜거리며 대회 끝나고 나서 먹을 음식들을 끝도 없이 나열할 거라고.

 

내가 보냈던 수많은 괴물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무거워진 눈꺼풀을 감고 잠 속으로 빠져들면서 민준이는 생각했다.

넓고 푸른 강물 속에서 작은 괴물의 씨앗들이 올챙이처럼 꼬물꼬물 헤엄치고 있었다. 괴물들은 점점 커지면서 제각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림자처럼 까만 몸에 노란색 커다란 눈을 가진 빨래 괴물과 보라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옷장 괴물, 이빨이 천이백삼십칠 개나 있는 냉장고 괴물과 코끼리처럼 긴 코를 가진 물컹물컹한 화장실 괴물이 힘차게 강물을 가르며 헤엄치고 있었다. 환한 햇빛 속에 있는 괴물들은 아주 조금은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어디선가 저 괴물들과 다시 마주치게 되면 그땐 안녕?’이라고 인사할 수 있을까?’

민준이는 마음이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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