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上

▲ 그림-강병호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몸이 하도 무겁고 괴로워서 밥도 먹지 않고 일찌감치 눈을 붙였다. 한참을 잔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초저녁이었다. 타고 남은 햇빛이 하늘 가장자리를 붉게 물들이고, 검푸른 하늘에 조각달이 걸렸다.

복슬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두부 쪼가리라도 들어있는지 밥그릇에 아주 코를 박고 있다. 웬일인지 내 밥그릇은 텅 비어 있다.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물그릇 위로 달그림자만 어른거렸다. 내가 잠든 사이에 아랫동네 검둥이가 와서 내 밥을 다 먹어버렸나.

고개를 한껏 쳐들고 공양주 보살님이 계신 요사채를 향해 컹컹 짖었다. 공양주 보살님은 신기하게도 내 말을 알아들었다. 배가 고프다고 짖으면 밥을 주고, 목마르다고 짖으면 물을 채워주었다. 낯선 사람이 왔다고 으르렁거리면 쿠사리가 한 됫박 날아왔다. 공양주 보살님은 벌써 잠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멀리서 시구 스님이 경 읊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겨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내 몸은 어느새 스님 앞에 가 있었다. 목줄이 풀린 걸까. 몸이 바람처럼 가볍다. 아파서 늘 들고 있던 뒷다리도 어쩐 일인지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스님 계신 방 앞에 엎드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무상아!’ 하고 다정스레 이름을 불러줄 법도 한데, 한참을 엎드려 있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경만 보고 계셨다. 내리깐 눈매며 꾹 다문 입술에서 슬픈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노스님께 꾸중이라도 들으셨나.

아픈 다리도 나았고 목줄도 풀렸으니 한번 달려나 볼까. 마음을 먹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대웅전을 지나고 지장전을 지나서, 일주문 앞까지 순식간에 다다랐다. 산뜻한 봄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주차장을 지나서 저 아래 광명슈퍼에 이르자 코를 한껏 쳐들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검둥이가 보였다.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목줄을 풀어보려고 애를 썼다. 복슬이의 암내를 맡은 게지. 아무리 용을 써 봐라. 복슬이의 신랑이 될 수는 없을 테니. 너 같은 천둥벌거숭이에게 복슬이는 콧방귀도 안 뀔걸. 이죽거리고 약을 올려도 검둥이는 목줄 푸는 일에 집중하느라 내 말을 들은 체도 안 했다. .

아무리 달려도 숨이 차지 않았다. 다리에는 더욱더 힘이 솟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이런 속도라면 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자 내 몸이 날아올랐다. 독수리처럼 땅을 차고 올라 바람을 가르며 날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역시 꿈이었구나.

무상아!”

시구 스님이었다. 스님께 냉큼 달려갔다.

미명에 휩쓸려 여기저기 헤매지 말고, 마음을 굳건히 먹고, 본래 네 마음자리를 찾아라.”

말씀하시는 목소리는 고요한데, 스님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뺨 위로 흘렀다. 긴 혓바닥으로 눈물을 핥아주고 싶은데, 내게는 혀가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에 뺨을 부비고 싶은데, 내게는 뺨이 없었다. 몸을 찾아 사방을 둘러봐도 이미 사라진 내 육신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꿈이 아니었다. 죽음. 10년을 사는 동안 내게 오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죽음이 내게 왔다.

*

집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주인아저씨가 또 술을 마셨다. 술을 마셔서 발광이 나는 게 아니라 발광을 하려고 술을 마시는 사람 같았다. 아주머니가 또 맞고 있었다. 밥을 차리지 않는다고, 밥을 차렸다고, 말대꾸를 한다고, 대답도 안 하고 무시한다고, 아저씨는 수없이 많은 이유로 아주머니를 때렸지만, 사실 아주머니가 맞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하나, 아저씨 앞에 있는 사람이 아주머니였기 때문이었다.

명진이 형이 뛰어 들어왔다. 출가하기 전의 모습.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언제나 책을 끼고 살던 모범생. 명진이 형이 집 안으로 들어가 소리쳤다.

도망쳐! 엄마! 제발 맞고 있지만 말고 도망을 치라고!”

그 말은 아주머니가 항상 명진이 형에게 하던 말이었다.

도망쳐! 명진아! 제발 맞고 있지만 말고 도망을 치라고!”

아주머니는 도망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도망을 치면 그 폭력이 고스란히 명진이 형에게 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아주머니의 머리채를 쥐고 밖으로 끌고 나왔다. 명진이 형이 아주머니를 잡아끌었다. 대문 밖으로 아주머니를 내보내고 대문을 잠갔다. 아저씨의 손이 명진이 형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저씨를 향해 사납게 짖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터져 나왔다. 아저씨를 향해 달려가려는 순간, 작은 개 한 마리가 달려와 아저씨의 다리를 물었다. 얼굴에 주름이 많고, 공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아저씨가 어린 나를 발로 찼다. 어린 나는 깨갱 소리도 못 내고 나가떨어졌다. 명진이 형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명진이 형은 마당에 굴러다니던 야구방망이를 움켜잡았다.

이제 끝내요. 모두다.”

명진이 형이 야구방망이를 높이 들었다. 작은 개가 멍, 하고 짖었다. 사람의 말로 번역하면 안 돼!’였을 것이다.

 

*

크나큰 죄를 짓고,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참회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명진이 형이 노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 그 옆에 쭈글쭈글한 작은 개가 엎드려 있었다.

절을 올려라.”

명진이 형이 노스님께 절을 올렸다.

누가 나한테 올리라고 하였더냐?”

당황한 명진이 형이 잠시 주춤거리다가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노스님은 콧구멍을 후비며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법당에서 나갔다. 그 밤이 다 지나도록 명진이 형은 절을 올렸다. 다음 날 아침, 명진이 형이 기진하여 쓰러지다시피 절을 올리고 있을 때 노스님이 들어오셨다.

멍청한 놈, 누가 부처님께 절을 올리라고 하였더냐?”

노스님은 손수 명진이 형의 머리를 깎았다. 그러고는 냄새나는 누더기 한 벌을 던져주며 말씀하셨다.

오늘부터 이 개의 이름을 무상(無常)이라고 하여라. 그리고 네놈은 시구(視狗)라고 한다. 개보다 미욱하니 평생 개만 보고 살 일이다.”

그날부터 명진이 형은 시구 스님이 되었다. 이 절의 스님들은 이 보잘것없는 법명을 놔두고, 개와 함께 출가하였다 하여 시구 스님을 개도반이라고 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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