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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마나의 시절인연] 11월의 바람
11월의 들판을 걸으면 바람이 따라온다. 습기 빠진 바람은 가볍게 바스락거리며 세상을 스쳐 간다. 태풍을 몰고 오는 여름 바람은 들판을 휩쓸고 지나가 세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맵고 혹독한 겨울바람은 생명의 숨결을 냉혹한 어둠으로 얼려 버린다. 그러나 11월의 바람은 존재를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옥수수를 떠나보낸 기다란 잎은 바람에 흔들리며 초록을 벗어 내고 허연 잎맥만 남긴다. 추수가 끝난 휑한 논둑에 서 있는 억새는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려 버리고 제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모습은 채색된 삶의
송마나 작가11-14 10:19 -
[송마나의 시절인연] 보로부두르, 공(空)의 자리
유달리 무더웠던 여름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졌다. 한밤중 홀로 깨어 창밖을 바라보니 멀리 깜박이는 빌딩 불빛이 외롭게 느껴졌다. 건물이 외로울 리 없겠지만 내 마음이 외롭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움은 나만의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실존의 현상이다. 외로움이든 고독이든, 그것은 상실과 결핍에서 비롯된 허무가 아니겠는가. 까닭 모를 허전함에 잠겨 있는데 며칠 전 신문에서 보았던 보로부두르 사원 성지순례 광고가 떠올랐다. 거대한 사원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컴퓨터를 켜고 족자카르타로 가는 비행기와 사원 정상까지 오를 수 있
송마나 작가10-17 15:36 -
[송마나의 시절인연] 선의 사과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문다. 아삭하는 소리에 뜨거운 열기가 저만큼 물러서는 듯하다. 차갑고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번진다. 소백산 자락에서 자란 사과는 유난히 과육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다. 사과 값이 올라 마음대로 사 먹지 못한 차에 지인이 보내 준 사과 한 상자를 아껴 먹고 있다. 사과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상상력과 운명을 흔들어 온 과일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은 먹어도 좋으나 사과는 먹지 말라고 했다. 이브는 금기를 어기고 사과를 따먹은 후 아담에게 건넸다. 아담은 그 사과를 삼
송마나 작가09-12 10:02 -
[ 송마나의 시절인연] 존재의 탈선, 열대야
여름 햇빛이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태양의 고삐에서 풀려난 빛들은 산과 바다와 사막을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퍼붓는다. 무자비한 여름빛은 사람이 사는 세상쯤은 안중에도 없다. 빌딩의 외벽을 달구고 아스팔트를 녹이며 공원에 놓인 벤치를 염전 바닥처럼 부석거리게 한다. 여름의 열기를 피해 바다를 찾았다. 해변은 사람들로 들끓었고 파도는 출렁이기를 포기한 채 더위에 지친 몸처럼 드러누웠다. 숲도 다르지 않았다. 제철을 맞은 매미들이 악에 받친 듯 울어 대자 바람조차 끼어들지 못하고 나뭇잎 뒤에서 머뭇거렸다.여름은 아이들의
송마나 작가08-15 09:24 -
[ 송마나의 시절인연] 한 계단 한 계단, 부처님을 향하여
우리나라는 도시든 시골이든 산이 가까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산에 오르고 싶다면 반나절에도 다녀올 수 있다. 7월의 산속은 어둑하고 서늘하다. 짙푸른 잎이 우거져 터널을 이룬 숲길을 걸으면 빛은 조용히 스며든다. 산은 언제나 마음속의 앙금을 가라앉히고, 신생의 풋풋함으로 우리를 맞이한다.요즘 산봉우리 아래에는 어김없이 사다리가 놓여 있다. 수많은 등산객이 몰리면서 자연 훼손을 줄이기 위한 조처일 것이다. 이제는 사다리를 오르지 않고는 산 정상에 이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산꼭대기 아슬아슬하게 걸린 사다리를 올려다보기만 해도
송마나 작가07-11 10:02 -
[송마나의 시절인연] 깨고 싶지 않은 부처 되는 꿈
6월의 한낮, 산들바람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살포시 눈을 떴다. 금계국이 가득한 들판에서 나와 노닐었던 흰 구름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 소파에서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꾸었구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좋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쉬웠다.아름다운 꿈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세상이 각박해도 꿈을 지닌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험하고 먼 길을 갈지라도 푸른 꿈을 품은 사람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깨지는 꿈은 참된 꿈이 아니다. 바람에 쉽게 부서지는 꿈은 진정한 꿈이라 할 수 없다. 꿈은 영원에 뿌
송마나 작가06-13 10:10 -
[송마나의 시절인연] 우리의 대 스승, 부처님
오월은 부처님오신날이 있고, 어린이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들어 있다. 영국 철학자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다. 어른이 어린아이에게서 순수함과 창의성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의 대 스승이 아닌가.오늘날에는 스승보다 선생이란 단어가 친숙하게 다가온다. 명문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지식을 속성으로 가르쳐 주는 선생, 예능 실력을 높이기 위해 기교를 알려주는 선생은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돈 없는 학생들은 감히 그런 선
송마나 작가05-16 15:30 -
[송마나의 시절인연] 약산의 웃음소리
벚꽃이 활짝 피었다. 벚나무는 몸속의 꽃을 밀어내 마른 가지마다 봄을 꽃피운다. 벚꽃이 만개한 길은 봄빛으로 들끓는다. 넘쳐흐른 봄빛은 겨우내 얼었던 땅의 껍질을 벗겨내고 숨구멍을 열었다. 생명이 약동하는 길을 걷는다. 끝없이 이어진 길이 하얀 웃음꽃을 터뜨린다. 벚꽃 길 너머로 바둑판처럼 구획을 나눈 시민 농장에 목련꽃도 피었다. 농장 입구에 서 있는 목련 한 그루가 수많은 등불을 켜고 환하게 불을 밝혔다. 봄빛을 가득 머금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꽃봉오리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땅 위로 푸릇푸릇 머리를 겨우 내
송마나 작가04-14 10:49 -
[송마나의 시절인연] 봄빛 가득한 들판
황구지천을 따라 늘어선 벚꽃 길을 걷는다. 벚나무들의 표피 속으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얼마나 봄빛을 기다렸을까. 머지않아 일제히 꽃을 터뜨릴 것이다. 키 큰 벚나무 아래로는 앉은뱅이 풀들이 푸른 융단을 펼치고 있다. 냉이가 납작하게 엎드려 실뿌리의 강인함으로 풋풋한 생명력을 뿜어낸다.벚꽃 길이 끝나고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농부들이 논의 흙을 뒤엎었나 보다. 겨우 내 땅속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굳어있던 흙이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봄바람에 논흙이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다. 벼를 수확할 때, 왜 벼 발목을 버려
송마나 작가03-07 14:32 -
[송마나의 시절인연] 詩, 언어의 사원
겨우 말문이 열린 손자가 할머니 집 현관에 들어섰다. 낯선 환경에 쉽게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거실에 놓인 서양란을 보고 오종종 걸어간다. 가는 꽃대 끝에서 옹기종기 피어난 예쁜 꽃 앞에서 “꼬, 꼬, 꽃”이라고 말한다. 둥글게 펼쳐진 붉은 꽃잎이 닭 볏을 닮아 닭의 소리, “꼬꼬”라고 말한 것인가. 아니, 어린아이가 벌써부터 시어(詩語)를 읊다니. 손자의 언어 사용이 미숙해서 완전한 단어를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원초의 말이 터져 나왔다고 믿고 싶었다. 문득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유명한 문
송마나 작가02-14 13:11 -
[송마나의 시절인연] 묵은 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을사년(乙巳年) 새해, 〈맹자(孟子)〉를 읽는다. ‘이루상(離婁上)’편에 나오는 ‘칠년지병 구삼년지애(七年之病 求三年之艾)’란 문구에 눈길이 머물렀다. 옛날에 한 아버지가 오랜 병을 앓고 있었다. 효심이 돈독한 아들이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병간호하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때 지나가던 스님이 “3년 묵은 쑥을 다려 드리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아들은 3년 묵은 쑥을 찾아 나섰다. 어디에서나 자라는 것이 쑥이요. 며칠만 지나면 곧 마르는 풀이 쑥이다.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 쑥이기에 사람들은 구태여 3년씩이나 말려
송마나 작가01-10 09:54 -
[송마나의 시절인연] 빛나는 소금 기둥이 되고 싶다
깊은 밤, 가로등이 흐릿한 불빛으로 떨고 있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바람의 기척에 몸을 움칠거린다. 물기가 쏙 빠진 소금 알맹이들은 더는 썩지 않고 하얀 꽃을 피우는데 바싹 마른 낙엽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컴컴한 하수구 틈새로 곤두박질한다. 그만해도 다행이다. 도둑고양이가 먹이를 찾으러 낙엽 위를 살금살금 걸으면 핏기 빠진 낙엽은 그만 부서지고 만다. 낙엽이 밟혀 실핏줄이 터질 때 그 울음소리는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생의 모든 수분이 빠져나가도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지 못하면 불확실한 세상과 힘겨운 현실에 항복
송마나 작가2024-11-29 -
[송마나의 시절인연] 그날 태평호엔 하늘이 내려 앉았다
11월은 가을빛을 밀어내고 겨울 곁으로 다가가려고 한다. 단풍마저 떨어진 헐벗음으로 일찍 적멸에 드려는 것인가. 추수를 끝낸 들판은 메마른 들꽃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바람에 날려 보낸다.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던 첫 해에 중국 황산을 찾아 나섰다.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시골의 논두렁 밭두렁은 원초의 자연으로 기쁨이 넘쳐흘렀다. 굽은 길을 돌아서니 아스라이 바다가 보였다. 운전하는 기사님이 바다가 아니라 태평호(太平湖)라고 알려주셨다. 호수에 안개가 드리웠다. 드넓은 호수 건너편으로 야트막한 산들이 수평선처럼 아스라이 가
송마나 작가2024-11-01 -
[송마나의 시절인연] 독서로 지장보살을 만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들어본 지가 까마득하다. 언제부터 스마트폰이 시도 때도 없이 정보를 쏟아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자아(自我)는 무분별하게 흘러드는 정보의 바다에 잠겨 서서히 익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서는 정신에 파문을 일으킨다. 물 위로 뛰어오른 물고기처럼 솟구치는 언어는 우리를 기습하고, 우리를 덮치고, 우리를 변모시킨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면서 새로운 빛을 띠게 한다. 독서는 날씨마저 바꾼다고 한다. 독일의 작은 마을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하이데거는 폭풍이 치고 눈이 오
송마나 작가2024-10-11 -
[송마나의 시절인연] 제주 법성도〈法性圖〉와 감로수
제주도 불교 성지순례 ‘선정의 길’을 두 차례 나누어 순례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선덕사(善德寺)로 들어가는 고즈넉한 숲길은 세상에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무기력한 시간을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았다. 일주문을 지나자 탁 트인 경관이 신생의 설렘을 안겨 주었다. 오층 석탑을 지나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대적광전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 법성도(法性圖)가 조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신라 의상대사가 을 요약하여 진리의 세계를 7언(言) 30구(句)의 게송으로 요약하여 54각의 사각인(四角印)
송마나 작가2024-09-13 -
[송마나의 시절인연] 인생은 본디 하루살이
하루살이가 극성을 부리는 계절이다. 밤에 불을 밝히면 하루살이가 떼로 몰려들어 눈살을 어지럽힌다. 아침이 되어 창문을 열면 하루살이 사체가 수북이 쌓여 마음을 언짢게 한다. 특히 장사하는 가게 주인에게는 피해를 주기도 한다. ‘하루살이’라는 이름은 성충으로 단 하루에서 며칠 만 생존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생애 대부분을 물속에서 한 달 또는 몇 년을 유충으로 지내다가 날개를 달고 뭍으로 나와 성충으로 짧은 삶을 마감한다. 하루살이는 오랜 시간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 동안 비행하며 짝을 찾아 후손을 남겨야 한다. 입
송마나 작가2024-08-23 -
[송마나의 시절인연] '우리'란 말에는 '佛性'이 담겼다
독일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내 좌석은 창문 쪽이라 미리 앉아 있는 옆 여행객이 일어나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지었다. 나는 그에게 목례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서로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여행할 수 없는 좁은 공간이지만 나와 그는 말없이 하늘을 날았다.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옆자리에 앉은 것도 인연인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말없이 가야 하는지,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먼저 옆에 앉은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나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영어가 서툴고, 독일에서 환승하여 바르셀로나로 가야 하는
송마나 작가2024-07-12 -
[송마나의 시절인연] 흰 고래와 ‘佛性’
바다가 그리워지는 계절이 다가왔다. 아직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제주도의 바다를 찾았다. 야외 카페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는 아름답고 평온했다. 갑자기 종소리가 댕댕 울리고,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바닷가로 달려 나갔다. 고래가 흐릿하게 바다 위로 불쑥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바다로 뛰었다. 한 무리 고래 떼가 바다 수면을 가르며 앞선 고래들을 따라 헤엄쳐 갔다. 그들 중 몇 마리가 물 위로 머리를 내미는데, 사람들은 그 모습에 환호하며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느라 분주했다. 나로부터 몇 미터 안 되는 거리에서 아기 고래 두
송마나 작가2024-06-17 -
[송마나의 시절인연] 편견 없는 어린이처럼…
이팝나무꽃이 폭설처럼 흩날리는 오월이다. 아카시아꽃 산사나무꽃 찔레꽃이 서둘러 흰빛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구름은 하늘 높이 노닐고, 청보리밭 뒷산에서는 뻐꾸기가 신록의 숲으로 들어오라고 노래한다. 우리를 부르는 오월의 환한 웃음소리에 어찌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오. 어린이 대공원에는 어린이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이리저리 뛰놀고 있다. 비릿한 연둣빛을 흔들어 깨우는 풋풋한 나뭇잎과 부풀어 오른 장미꽃보다 어린이들의 자유 발랄한 모습이 우리의 가슴을 신생의 설렘으로 부풀게 한다. 유난히 5월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것은 어린이들
송마나 작가2024-06-12 -
[송마나의 시절인연] 피어있는 꽃, 마음 속에 심어라
화들짝 놀란 벚꽃이 와르르 깨어나 4월의 빛을 거리에 흩뿌린다. 오종종한 개나리꽃이 반짝반짝 노란별이 되어 담장 밑을 밝힌다. 중량감을 어찌할 수 없는 목련꽃은 주먹만한 하얀 등불을 처마 위 높이 걸어둔다. 젊은이들은 무거운 코트를 벗어던지고 밝고 경쾌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봄, 봄, 봄이 넘쳐흐르고 있다. ‘사시장춘(四時長春)’이라는 말이 그냥 생겨났을 리 없다. 봄같이 좋은 때가 어디 있으랴. 겨울을 뚫고 꽃들이 활짝 피어난 자연의 봄, 싱싱한 젊음이 들끓는 인생의 봄, 이보다 좋은 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봄
송마나 작가2024-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