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0:52 (수)

불교문화클러스터 사하촌을 가다 22건의 기사가 있습니다.

  • 맑은 물의 흐름처럼 선맥(禪脈) 이어지길

    {image1 center} “산행을 직접 해보면 기가 막힙니다. 통도사 영취산에서 시작해서, 심불산 간헐산 배내고개 넘어오는데, 심불산 심불평원 억새가 기가 막힙니다. 배내 너머 능동산 넘어오면 사자평이고, 사자평에서 능동산 제약산 천황산 그렇게 있고, 또 능동산에서 넘어오면 가지산 운문산. 거기서 일로 빠지면 문복산. 문복산에서 고현산. 그게 다 천 고지가 넘는 거에요. 그 전체를 영남 알프스라카지요. 영남 일대에서 눈 오는 데 여기뿐입니다. 그 중 가지산이 천이백 고지로 젤 높아요. 지금은 길이 뚫려가 터널 따 빠지면 호박소에요.” 덕현리에서 3년 째 식당을 하고 있다는 김준모(53)씨의 말이다. 그런데 이 높은 산들을 넘어 사람들이 나다녔다고 한다. “얼음골 이런 사람들이 언양장 보러 넘어

    언양=이대흠(시인, 본지 객원기자)
    2007-10-11
  • 관광지 조성 소득 '쑥쑥' "절은 마을의 큰집이에요"

    {image1 center} 불갑사로 향하는 길에서 비를 만났다. 비가 그려내는 수채화는 언제보아도 아름답다. 젖은 나뭇잎이 은전처럼 찰랑찰랑 흔들어 댄다. 다소곳하게 자신을 내주고 있는 풍경들에게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다. 비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만 바람구두를 신고 돌아다니라고 채근하는 듯하다. 아랫마을 모악리를 지나 절집으로 향하는 길가에 꽃무릇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않는 성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image2 center} 문득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는 불갑산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곳은 이념의 벽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누다 쓰러져 간 젊은이들이 피 바다를 이룬 지역이다. 이름도 없이 쓰러져간 영령들을 위로

    영광=김상미(수필가 본지 객원기자)
    2007-09-23
  • 절 마을 맑은 소리만 가득하길

    {image1 center} 봉암사로 오르는 숲길은 호젓하고 고요하여 자연도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수행사찰이라 산문을 열지 않고 오는 사람도 말리는 것이 절집의 인연법이라 하니 야속하다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어쩌면 한평생 적막과 싸워야만 하는 절집의 숙명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의 덧없음 속에 쌓인 절집의 적막은 스님들 독경소리가 깨우지만, 내 안에 쌓인 적막은 무엇으로 깨운단 말인가. 끝내 깨우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적막 속으로 돌아가는 것 아닐는지. {image2 center}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 지증 대사가 창건했는데, 보물 제171호인 정진대사 원오탑, 보물 제137호인 지증대사적조탑, 보물 제169인 봉암사 삼층석탑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는 절집이다. 희양

    문경=김상미 객원기자(수필가)
    2007-09-19
  • 절 마을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나 되길

    {image1 center} “몇 집인지 몰라요. 굿당 이름도 뭐인지. 원주민 중에서는 별로 없어요. 그 사람들이 신 핑계대고 먹고 살지. 마을 사람들은 농사짓고 살죠.” 지나가는 할머니 한 분에게 왜 이렇게 당집이 많으냐고 물으니, 불쑥 나온 말이다. 한 집 건너 굿당이라, 대나무에 신장기 펄럭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image2 center} “마을은 오래 되었죠. 옛날에는 전부 통 틀어서 양화리라 했는데, 인구가 많아져 1,2구로 갈렸어요. 1구가 이 도량에서 저 아래로 마을이 솔찬히 커요. 저도 여서 나서 여서 컸지마는 옛날부터 양화리라 했응께 양화리고. 국립공원하고 사찰하고 같이 있었는데, 국립공원 떨어져 나가고. 본토박이고 동네 사람 잘 알거 아니냐 해서 주지스님이 있으

    이대흠 객원기자
    2007-09-10
  • 절 찾는 관광객 늘어 마을 소득 '기대'

    {image1 center} 건봉사는 주변 산들이 연화형국이라 스스로 성스러운 울림을 지니고 있다. 28년간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염불원을 찾아가는 내 귓전에, 독경하는 스님의 맑은 목소리와 목탁소리가 맴돌았다. 오랜만에 비 그친 산문 밖 풍경들은 때 묻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채 수행하고 있는 듯하였다. 벗겨진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살은 아직 여름더위를 걷어갈 생각이 없었다. 혹시 청아한 풍경소리가 바람을 몰고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경내로 오르는데, 그나마 꼬리를 감추지 않는 착한 길을 만나서 다행이다. 동행한 고성문화원 고문 윤용수 선생의 구수한 목소리가 감로수처럼 느껴져 마음으로 갈증을 덜어내고 건봉사를 둘러보았다. {image2 center} “건봉사는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이 살아 있는

    고성=김상미(수필가 본지객원기자)
    2007-08-24
  • '父子'같은 관계 계속 이어지길…

    간간히 내리는 빗속에 설악산은 하얀 구름옷을 입었다 벗기를 반복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람의 흐름 따라 구름을 덧칠하며 진경산수화를 그리고 있었다. 흑백과 컬러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담백하다. ‘검은 색이라 우습게 여기지 마라'고 말하려는 듯, 회색 하늘에 어두움을 차용하여 풍광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 세상에 흑색과 백색 보다 선명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색상은 없는 것 같다. 천둥과 번개가 하늘의 무거움을 폭로하더니 금세 빗줄기가 빗금을 그으며 절집을 가둔다. 요사채 처마 밑에 앉아 낙숫물 소리에 귀를 씻으며 촉촉하게 젖어 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유년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외갓집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울었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지붕에 매달린 빗방울이 눈물방울로 변하더니 마음 밭에

    김상미 본지 객원기자
    2007-08-22
  • 절 가까이 살지만 여유로움 없어

    {image1 center} “그냥 동학사지요. 옛날에는 여관 같은 게 저 위에도 있었는데, 그런 게 다 내려왔지요.” 대여섯 사람에게 물어서 겨우 얻은 것은 이것 밖에 없다. 손님 많은 곳의 인심이 더 야박하다. 도시에 가까울수록, 손님이 많을수록 말 한 마디 붙이기가 수월하지 않다. 이 나라 절집 백여 군데를 다니면서 느낀 점은 손님 많은 절의 사하촌에서는 정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다. 동학사도 예외는 아니다. 대전광역시에서 가까운 탓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보니, 저마다 손님 맞기에 바쁘다. 또한 물건 살 손님이 아니다싶으면 말대답도 하지 않는다. 사진 찍히는 것도 마다하고, 이름 알려주는 경우도 없다. 절로 향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가게를 들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가하지만 가게 주인의

    공주=이대흠(시인/본지 객원기자)
    2007-08-02
  • 은행나무로 절집 마을 하나

    {image1}속세의 번잡함일랑 벗어두고 무량청정토에 입성하라며 계곡물소리가 자꾸 따라온다. 일주문을 앞에 두고 나무판에 쓰인 문구가 선문답을 나누자고 한다. “흐르는 시간과 나 사이에 아쉬운 것은 시간이 아니라 순간을 기뻐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신이라며 화두를 던진다. 7월의 태양을 머리에 이고 늘어지는 몸과 마음, 얼음냉수 한 그릇으로 갈증을 해소한듯하다. 귀밑을 스쳐가는 작은 솔바람에도 감사하고 짝을 부르는 새소리도 새겨들으며 걷는다. 경내에 들어서자 푸른 용문산 자락이 와락 품에 안긴다. 몸 안에 푸른피가 도는 느낌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진덕여왕 3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우왕 4년에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로 부터 대장경을 옮겨 봉안

    양평=김상미(수필가 본지객원기자)
    2007-07-26
  • 천진도인 일화 마을의 자랑

    {image1 center} “짐동, 지임동이락했다 그래. 어른들 말씀이 그래. 짐(김)이 나대서 지임동이라 그래.” “그 전에는 팔십 가구였는디, 지금은 더 되야. 식당은 많애라.” “농사가 없어. 빈촌이여, 빈촌. 물도 없고, 농토도 없고, 그래.” “시내 나가서 품 팔아서 묵고 살제. 벌만이로(벌처럼) 사냥해서 들오제.” {image2}행정상 명칭은 나주시 경현동. 다보사 아랫마을 누정에 소주 두 병 아이스크림 몇 개를 풀어 놓았더니, 환담 중이던 사람들의 입에서 저마다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스님들의 속가는 없었냐고 하니까, ‘이 마을에는 없었다.’고 김금제(80ㆍ경현동)씨가 말한다. “우와 시님, 우악 시님. 돌아가신 스님이 진짜 시님이었제. 솔찬히 되야. 한 30년

    나주=이대흠 시인 본지객원기자
    2007-07-18
  • 절과 함께 살아 가진 것 없어도 부자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 한가운데에는 어김없이 나무가 있다. 전등사에는 500년도 더 산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리는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 거기에 얽힌 설화를 들어보자. 철종 임금 때 전등사는 조정으로부터 은행 이십 가마를 바치라는 전갈을 받았다. 한 해 은행 수확이 열 가마인데, 두 배의 은행을 바치라는 것은 관청의 무리한 요구였다. 노스님은 관리들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화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하다가 도력이 높은 백련사의 추송 스님을 부르기로 했다. 스님은 3일 기도에 들어갔고 기도가 끝나는 날 사람들 무리에 섞여 있던 관리들 눈이 갑자기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기도를 끝낸 스님이“더 이상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서는

    김상미 객원기자
    2007-07-03
  • 우리가 절 혜택 많이 입고 삽니다

    송광사에 갈 때마다 사람주나무를 본다. 미끈한 종아리를 가진 사람주나무를 오래 전에 두고 온 나를 보듯이 자세히 본다. 지난겨울의 혹독함을 견딘 나무는 어느새 새 이파리를 달고 있다. 얼마나 속이 뜨거웠을까. 잎 색이 붉다. 사람주나무 옆에는 서어나무 굴참나무들이 저마다 잎을 내밀고 있다. 세상에 있는 색깔 중에서 봄 나무의 잎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굴참나무 서어나무는 투박한 남정네의 손처럼 굵은 각질의 피부를 가졌고, 사람주나무는 열여섯 처녀애의 종아리처럼 미끈한 피부를 가졌다. 절로 가는 길은 언제든 마음 접는 길. 거듭 절하며 나보다 더 하찮게 여겼던 것들에게 미안해하며 가는 길. 뉘우치며 가는 길. 느리게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 양산의 통도사, 합천의 해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보 사찰의

    이대흠 객원기자
    2007-06-27
  • 문화 갈등엔 '상생의 조화' 필요

    {image1 center} 현대의 욕심으로 채우지 말고 곱게 나이 먹도록 놔두어야 할 곳이 절집이다. 문명의 헛바람을 따돌리고 자연 미학을 간직한 채 늙어가는 절집은 피붙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다 보면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화려하게 분장을 한 가람들을 볼 수가 있다. 세월을 거스르려는 욕심을 덧바르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울 때가 있다. 사람들은 삶이 복잡해질수록 자연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절접에서, 묵은 근심을 풀어버리고자 한다. 도심에서 가까운 용주사를 찾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택지개발붐이 일고 있는 지역이라 잘 못 길을 들어서 헤매느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 싶었다. 수원 팔달문 앞에서 용주사로 향하는 버스를 타려고 한 시간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정수리로

    김상미 객원기자
    2007-06-27
  • 숲 연꽃 있어 신나는 '寺村 사이'

    세조의 원찰로 조선시대 교종의 총본산인 봉선사는 한글과 인연이 깊은 절집이다. 많은 절 마당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한글 주련과 편액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운허 스님이 1970년 대웅전을 세우면서 편액을 큰 법당이라고 새겨서 달았다고 한다. 주련에 씌어진 글씨를 곱씹으며 깊은 도량에 빠져 보았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로 못하고 한자에 익숙하지 못한 대중들의 깜깜한 눈을 밝혀 준 스님이 진정한 법시를 한 것 아닌가. 아무나 무시로 드나들 때마다 읽고 진리를 구하라는 큰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마음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처소에 따라 그 곳에서의 주인이 되라’는 스님의 온화한 가르침은 불자들 가슴 속에 법향으로 남아

    김상미 객원기자
    2007-06-22
  • 이 마을은 이상해요 기독교가 안 돼요

    큰 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주 남산은 산 자체가 커다란 불국정토다. 일설에 의하면 팔만 구 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현재 남아있는 어떤 절 보다도 규모가 큰 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의 안산인 남산. 이러다할 절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골짝 골짝에 남아있는 수많은 불상들이 옛날의 흥성을 짐작하게 해 준다. 현재도 남산을 빙 둘러 여러 채의 절이 들어서 있지만, 대개 최근에 생긴 절들이다. 갯마을에 이른다. 마을에 사람이 거의 없다. 겨우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나 길을 묻는다. “바깥에들한테 물어 봐야지요.” 이 지역에서는 결혼한 남자들을 일컬어 ‘바깥에’라고 한다. 석불좌상이 있는 보리사에 가 보아도 인적은 없다. 갯마을이라는 지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작은 시내가 마을

    이대흠 본지객원기자
    2007-06-21
  • 서로 마음 소통하며 미래 설계

    {image1 center} 화엄사는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이 있는 조계종 17교구 본사이다. 경내에는 웅장한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끄는 각황전(국보67호)과 20여 동 부속 가람이 배치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약 30도로 꺾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 문수, 보현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른다. 금강문 서쪽 방향으로 빗겨 놓은 천왕문 배치가 독특하다. 오후 햇살을 등에 지고 아랫마을 황전리 마을회관에서 골 깊은 산자락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150호에 400여 명이 사는 동네는 산골 마을이라기보다 도시에 가까운 마을처럼 고샅길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가지런하게 쌓은 돌담 사이로 산수유 꽃이 빠끔히 낯선 나그네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전리는 다른 마을

    김상미 수필가 본지객원기자
    2007-04-19
  • "동네 여자 전부 다 차 덖는 기술자여라우"

    조계산 남쪽 선암사는 태고종의 본찰이다. 절까지 걸어 들어가는 거리가 만만치 않고, 휘어진 길모퉁이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버티고 서 있어서 오랜 고찰임을 증명한다. 맨 먼저 만나는 건물은 강선루다. 강선루 아래쪽의 홍교는 새로 보수를 하였지만, 옛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 강선루는 두 줄기의 물이 만나는 곳에 세워졌는데, 돌기둥의 길이가 제각각이다.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으려한 선조들의 자연관이 그대로 살아있다. 강선루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은 여느 절과 다르게 길다. 굽이굽이 돌아서 만난 건물이 강선루인데, 여기에서 두 굽이를 더 가야 일주문이 나타난다. 녹차로 유명한 곳답게 야생차밭이 도처에 널려있다. 일주문에서 범종루, 만세루, 대웅전에 이르는 건물의 배치가 이채롭다. 단정한 건물들이 일직

    이대흠(시인, 본지객원기자)
    2007-04-12
  • 사하촌과 공동체를 이루어 잘 사는 곳

    {image1 center} 절집에서 하룻밤은 부처님 품속인 듯 편안했다. 시대에 맞는 포교를 하는 산중 사찰 미황사는 문턱이 낮다. 달마산을 내려온 바람이 풍경 소리 법문을 밤새도록 들려주었다. 누구나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는 미황사에서 짧은 수행은 마음을 닦는 시간이었다. {image2}산사 초입에 서있는 동백꽃만큼이나 수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미황사의 창건 설화를 들어보자. 경덕왕 749년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고, 배안에서 범패 소리가 들려 어부가 다가가자 배가 멀어져 갔다. 이야기를 들은 의조 화상이 정갈하게 목욕을 하고 동네 사람들과 포구로 나갔을 때 배가 포구에 다다랐는데 금인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안에는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김상미 본지 객원기자 수필가
    2007-04-12
  • 절집 돌아가는 일 훤해

    {image1 center} 법이 안주할 수 있는 탈속의 절. 법주사는 호서 지방의 제일 승가람마로 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 조사가 창건했다. 1500년의 깊은 역사만큼이나 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는 법주사. 목탑 팔상전과 화려하고 웅장한 청동미륵대불이 미륵 신앙을 정신적 지주로 삼게 했다. 사하촌 오리 숲길은 역사와 문화의 흔적 속으로 안내를 했다. 내속리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정이품송을 만난다, 조선시대 세조의 행차 때 가지를 들어 올려 길을 내주고 벼슬을 얻었다는 정이품송은 지금도 건강하게 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내속리면에 100센티미터 폭설이 왔을 때 한 쪽 가지가 부러졌다. 팔을 잃은 나무를 보며 철저하지 못한 문화재 관리가 아쉬움으로 남았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힘

    김상미(수필가 본지 객원기자)
    2007-04-04
  • 여는 중리 요 위로 가면 돌박이 있고

    {image1 center} 꽃샘이 지독한 날이다. 3월인데, 길바닥에는 언 곳이 많다. 진눈깨비도 흩날린다. 평일이어서인지, 오가는 사람이 드물다. 새로 만들어진 주차장과 절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주차 단속을 한다는 살벌한 내용의 플래카드가 이물스럽다. 한적한 길 여기저기에 주차 단속중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다. 단지가 된 식당과 숙소들을 지나 절로 향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절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니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보인다. 대개의 큰 절 앞과 다르게 노점상 하나 없다. 한참을 올라갔더니, 절 조금 못 미치는 곳에 할머니 두 분이 나물과 밭작물 몇 가지를 놓고 팔고 있다. {image2 center} 불국사는 절집 중 가장 완벽하다는

    이대흠(시인/본지객원기자
    2007-04-04
  • [불교문화클러스터 사하촌] 유원지가 된 사하촌

    {image1 center} 통도사 사하촌은 통도사 아래의 순지리와 통도사 뒤쪽의 지산리이다. 오후 세 시쯤 통도사에 도착해 절집을 둘러보고, 절 아래 마을인 순지리로 향했다. 사하촌이라고는 하지만 촌(村)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보이는 것은 식당이요, 러브호텔이요, 술집이다. 어지간한 크기의 읍내보다 번화한 곳이다. 마을의 내력을 물어보러 이 사람 저 사람 붙들어보지만, “모립니더”라는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안내소에 문의를 했더니, 평산이나 지산리에 가면 더러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한다. 그곳으로 갈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 “저 쪽으로 가서 구도로를 타고 가면 됩니더” 한다. 구도로가 어디 있는지, 알 턱은 없지만, 무작정 가리킨 방향으로 향한다. 야트막한

    이대흠(시인, 본지 객원기자)
    200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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