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0:52 (수)

[현불논단] 성불도 과학과 공학으로

과학, 관찰 바탕한 지혜 통찰
공학, 지혜 토대 개조·개발 행위
완전한 과학·공학 완성물이 성불

 “과학과 공학의 차이가 뭔지 아나?”

이공계 취업 준비생이라면 알아야 할 단골 면접 메뉴다. 과학은 진리 탐구가, 공학은 진리 활용이 목표인 바, 이치를 터득해서 이로운 물건을 만드는 지적 과정이 과학과 공학이다. 

15세기 전후 신에 의한 일방적 진리가 마감하면서 합리적 이성에 의한 과학과 공학의 시대가 열렸다. 만유인력의 법칙, 맥스웰 법칙, 상대성 이론, 전파 발견, DNA 발견, 열역학 법칙, 양자 이론 등등 수많은 과학적 발견과 원칙과 법칙에 힘입어 자동차, 컴퓨터, 스마트폰, AI, 양자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문명 발전을 이어 올 수 있었다. 과학이 공들여 밝힌 것을 공학이 멋지게 응용한 결과다. 인류에 이익되기를 기대하며…. 

그래서 살림살이가 나아졌을까? 겉은 풍요롭고 화려해졌으나 속은 빈곤하고 삭막해졌다. 왜일까? 첫 단추부터 어긋난 과학 때문이다. 실체를 전제로 했기에 부분적으로만 통용되는 반쪽짜리 과학일 뿐이었다. 궁극적 과학이 아니었다.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코끼리 발자국에 포섭되듯이 궁극의 과학은 붓다가 통찰한 바, 공성의 연기법을 벗어날 수 없다. 

다행히 양자 역학, 뇌 과학, 인지 과학 등 현대 과학이 기존의 이원적 틀을 탈피해 비이원성을 수용함으로써 붓다의 과학을 조금씩 증명해 가고 있다. 하지만 논리적 증명에는 부득이 한계가 따른다. 언어가 갖는 이원성 때문이다. 따라서 붓다의 과학은 개별적 깨달음을 통해서만 증명된다. 물질과 마음,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상호의존성에 기반한 공성의 과학이기 때문이다. 

깨닫기만 하면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아니다. 과학이 밝힌 지혜를 개별적 공학으로 구현해 내야만 바른 삶은 완성된다. 과학이 관찰을 원인으로 하는 지혜 통찰이라면, 공학은 지혜를 원인으로 하는 개조·개발 행위다. 

실체는 없지만 상호의존성이란 근원적 작용력을 활용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체시킨 뒤 붓다의 몸과 마음으로 환골탈태한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공학이 어디 있을까? 물질적 완성은 물론 정신적 충만까지 보장할 완전한 과학과 공학의 완성물이 나와야 한다. 바로 성불이다. 인간 완성의 길이다. 과학 없는 공학은 모래 탑과 같고 공학이 뒤따르지 않는 과학 또한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깨달음 없는 방편이 그렇고, 방편으로 이어지지 않는 깨달음이 그렇다. 지혜와 방편의 양 날개를 펼쳐야만 궁극의 길은 열릴 것이다. 

칼바람 불어 대는 히말라야 끝자락 랍치설산의 높은 동굴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혹독한 눈보라를 견디며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한 밀라레빠는 랍치설산 바위에 발자국만 남긴 채 중생제도의 일념으로 속세를 향해 솟아오른다. 오른손을 쫑긋 귀에 갖다 대고 뭇 생명의 아우성에 귀 기울이며 온갖 기행과 신통을 선보인 밀교 수행자 밀라레빠는 어떤 과학과 공학을 성취했을까? 랍치설산에서 그가 읊은 깨달음의 노래 한 구절로 마무리한다. “윤회의 현상 세계에 실체는 없나니, 실체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네. 밤낮으로 마음을 관찰한다면 아무런 실체 없음을 보게 되리니 지혜와 방편의 양 날개 펼치면, 전지전능의 광대한 하늘로 솟아오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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