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종료 알림] 니까야서 길을 묻다
올해 연말까지 예정돼 있던 김준호 교수의 '니까야서 길을 묻다' 연재가 필자의 개인사정으로 인해 종료됐음을 알려드립니다.
현대불교2016-11-30 -
대상세계 규칙성을 파악하라
‘대상세계’(境)를 제대로 보고 아는 데는 여러 가지 능력이 요구된다. 어원에서 드러난 것처럼 대상세계란 움직이는 것이어서, ‘여섯의 감각기관’(六根)으로 그 대상을 받아들이는 양상은 매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고 있는 대상을 시각으로 포착할 때에 주어지는 자료는 ‘동영상’이다. 그러나 실제가 동영상의 형태라고 해도 ‘대상과 접촉’(觸)하여 ‘받아들일’(受) 때에는 1차적으로는 그 영상들을 일련의 정지된 화면으로 붙잡는다. 곧 ‘시각의 대상’(色)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시각 자료의 특정 부분에 먼저 초점을 맞출 것인데, 시각을 어느 지점에 두느냐에 따라 생겨나는 느낌과 인식과 감정의 굴곡은 다양한 층을 이룬다. 하나의 동영상에서 저마다 선택한 정지화면들의 집합, 이로써 저마다 ‘시각으로 구
김준호 교수2016-11-18 -
제대로 알고 볼 때 지혜 열려
우리들의 삶은 ‘감각기관’의 문(門)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감각 대상’을 마주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인도인들은 감각기관의 존재를 ‘외부 대상을 알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에서 ‘인드리야’(Indriya)라고 불렀다. 이 말은 고대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인드라(Indra, 帝釋天)와 유사한’이라는 뜻이다. 인드라신은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고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기 때문에 인도의 종교 문헌에 등장하는 신들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위에 있다. 따라서 우리들의 감각기관이란 마치 인드라신이 출현하여 비를 내려주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는 발상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말을 ‘뿌리’(根)로 옮겼다. ‘외부의 대상세계’(境)를 아는 작용이야말로 우리들의 삶을 꾸려
윤호섭 기자2016-11-07 -
최적의 선택이 곧 지혜
이제 ‘지혜의 갖춤을 지향하는 사유체계’(慧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먼저 ‘지혜’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핵심이 될 것이다. 지혜의 팔리어 원어는 ‘판냐’인데, 현존하는 팔리어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판냐는 ‘알다’에서 파생된 말이므로 ‘앎’에 관련된 말이다. 따라서 지혜는 ‘앎’의 문제와 일차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지식이 곧 지혜는 아닐 것이다. 한자어 ‘지식(知識)’에 ‘앎과 이해’의 균형적 갖춤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상적 용법에 따르면 지식은 ‘축적된 앎’, ‘실용적 앎’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지혜를 지식과 동의어로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지혜를 불교적 ‘혜학’으로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지식과 구별될 수 있는 지혜의 면모를 살펴보자. 영국의 몽고메리
김준호 교수2016-10-24 -
사띠의 힘은 명상의 일상성
지금까지 네 가지 대상에 대해 ‘주의 깊음의 발휘와 지속’을 명상의 내용으로 하는 사념처(四念處)를 살펴보았다. 사념처라는 체계 안에서의 ‘사띠(念)’는 ‘대념처경-청정도론’의 설명을 지침으로 삼아 ‘주의집중/알아차림’을 발휘하고 지속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계발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과 실천의 체계는 현재의 남방불교에서도 확고한 지침으로 견고한 위상을 확보하고 있으며, 불교 밖에서도 스트레스 완화 등 갖가지 치유의 방법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는 불교명상의 사띠를 ‘주의집중/알아차림’으로 해석하여 확립한 하나의 의미 있는 사용설명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 관련 서적에서 보듯이 사념처를 ‘유일한 길’ ‘부처님이 직접 수행한 최고의 명상법’ 등으로 자리매김 하려는 태도에만 빠져 있으면 마치 불교의
김준호 교수2016-10-10 -
사념처 기본은 현 상태 인지
네 가지 대상을 바탕으로 ‘주의 깊음의 발휘와 지속’을 의미하는 사념처(四念處) 수행의 두 번째는 ‘느낌’에 대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느낌이란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즐겁다는 느낌, 괴롭다는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세 가지를 말한다. 의 ‘사띠파타나’경에 따르면, ‘느낌’을 느끼고 있는 지점, 곧 자신의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하여 구체적인 하나의 질감으로 드러난 그 느낌이 어떻게 느껴지고 있는가를 그대로 인지하는 것이다. 나아가 지금 느끼고 있는 느낌의 발생과 소멸과정 또한 주의 깊음의 힘이 작용되어야 할 지점으로 제시되고 있다. 세 번째 심념처(心念處)는 마음에 대한 주의 깊음의 발휘와 지속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음이란 지금 이 순간에 감지되는 마음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이니
김준호 교수2016-09-23 -
동작 하나하나의 알아차림
‘주의력/알아차림’으로 짝을 이루어 명상의 기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닦음의 계열은 ‘네 가지 대상에 대한 주의 깊음의 발휘와 지속’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네 가지는 몸[身], 느낌[受], 마음(상태)[心], 현상[法]을 말하는데, 이들 각각에 대해 ‘주의력을 불러일으켜’ 그러한 상태를 지속시켜 확립해나가는 명상의 방법을 ‘사념처(四念處)’라고 부른다. 경전에 따라서 사념주(四念住), 사의지(四意止), 사지념(四止念), 사념수관(四念隨觀)이라고도 한다. 사념처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서술은 〈디가-니까야〉의 ‘마하사띠파타나(大念處)’경에 나타나고 있어서 사념처의 이해와 실천을 위한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니까야 가운데는 ‘법구경’ 등의 운문(韻文)으로 이루어진 경전처럼, 몸에 대해 주의력을
김준호 교수2016-08-29 -
매순간 인지할 때 ‘앎’ 얻는다
〈법구경〉 제293 게송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러나 잘 행하여 몸에 대해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끈기 있게 해나가는 이들에게는 ‘주의 깊음’(sati)과 ‘분명한 앎’(sampaja-na)의 이익으로 번뇌들은 사라져간다. 여기에는 사띠가 2번 나오는데 첫 번째는 ‘몸에 대해 주의를 기울임’이다. 이는 사념처(四念處)의 첫 번째 내용인 신념처(身念處)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경문의 끝부분에 사띠가 다시 등장하는데, 두 번째는 ‘분명한 앎’(正知)과 짝을 이루고 있다. 북전 아함경에서 정념정지(正念正知)라는 술어로 등장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니까야에는 정념정지에 해당하는 구절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주의 깊음’과 ‘분명한 앎’이 짝을 이
김준호 교수2016-08-12 -
한 뜻으로만 해석하면 갇힌다
‘잊지 않기, 주의력을 일으킴, 주의 깊음의 발휘와 지속’의 세 가지로 사띠의 의미를 정의해보았다. 사띠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한 이유는 에 등장하는 갖가지 사띠의 용례에 부합하는 최적의 이해를 위해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앞에서 제기한 것처럼, ‘사띠’라는 말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다의적인 면모에 걸맞은 접근법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필자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한 것이라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고 작은 안내 정도일 것이다. 이 풀이에는 사실 숨어 있는 전제가 있다. 이른바 ‘힐링 프로그램’에서 설명되고 있는 사띠의 이해와 연습에서 보이는 경직성을 염려하는 시각이다. 경직이라는 말은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흔히 유일신을 믿는 이들을 맹신
김준호 교수2016-07-29 -
사띠는 자동차 엔진이다
초기불교 명상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두 축은 ‘그침/몰입’ 유형의 명상(사마타)과 ‘살펴봄/이해’ 유형의 명상(위빠사나)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와 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명상들이 등장할 때면, 어느 한쪽에 속하는 명상 수행을 설명하거나 닦을 것을 안내하는 서술 형태가 많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한역에서 지관(止觀)으로 부르는 용어에서 드러나듯이, 처음부터 짝을 이루어 ‘그침/몰입’ 유형과 ‘살펴봄/이해’ 유형의 명상을 동시에 강조하는 형태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방식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띠(sati)’가 이들 명상과 매우 긴밀한 연관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사띠의 힘을 토대로 ‘그침/몰입’ 유형에 속하는 명상의 길을 택하거나 ‘살펴봄/이해’ 유형
김준호 교수2016-07-15 -
마음의 동요 그치는 힘
앞에서 ‘사띠(sati)’의 기본적인 의미를 ‘잊지 않기’로 풀 수 있는 근거로 〈법구경〉의 게송만을 제시했지만, ‘사띠’를 ‘잊지 않기’로 풀어야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는 경전의 내용은 한두 쪽만으로 다 소개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잊지 않기’가 사띠의 기초적인 의미라고 해서, 이 풀이만을 가지고 사띠의 전모를 이해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잊지 않기’가 사띠에 내재된 하나의 의미가 분명하다고 해도, 이 의미는 공부하는 이들의 마음가짐, 자세, 일상의 마음 살림 꾸리기를 위한 대의에 속하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과 차별되는 불교적인 명상의 면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잊지 않기’는 닦음의 출발점에 서게 해주는 소중한 영역이지만, 닦음의
김준호 교수2016-07-08 -
사띠의 기초 ‘잊지 않기’
‘기억, 인식, 의식, 마음의 주의, 마음의 깨어 있음, 주의 깊음, 정신 차림, 마음의 평정, 자의식의 의식.’ 열거한 말은 팔리어 ‘사띠(sati)’의 뜻으로, 팔리어 텍스트 협회에서 출간한 팔리어 사전의 풀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하나의 불교용어 해석에 이처럼 갖가지 언어가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띠에 내재된 다의적인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함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사띠’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에 ‘위빠사나’ 명상 관련 서적이 번역 출간되면서이지만, 불교계를 넘어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현대 심리학과 명상의 기법을 결합시켜 만든 ‘치유의 방법’들이 도입되면서일 것이다. 이 치유의 방
김준호 교수2016-07-01 -
계율 바탕 둔 유익함의 성취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하도록 노력하여 나아감’(正精進)에 대한 〈대념처경〉의 설명을 들어보자. “비구들이여, 여기서 비구들은 [마음속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생기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에 힘쓰고 마음을 잡아 노력을 기울인다. 이미 생겨난 악하고 유익하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의욕을 일으켜 정진에 힘쓰고 마음을 잡아 노력을 기울인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유익한 것들은 생겨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에 힘쓰고 마음을 잡아 노력을 기울인다. 이미 생겨난 유익한 것들은 지속시켜 흩어지지 않게 하고 더욱 넓히고 닦아서 가득 채우기 위해 의욕을 일으켜 정진에 힘쓰고 마음을 잡아 노력을 기울인다.” 긴 내용으로 보이지만, 반복되는 구절을 제외하면 네 가지 노력으로 압축된다. 여기
김준호 교수2016-06-27 -
꾸준함이 곧 성장 동력
‘여덟 가지 성스러운 수행 길’(八正道)의 여섯 번째는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하도록 노력하여 나아감’(正精進)이다. 팔리어 원어에 따르면 이 말의 핵심주제어는 ‘노력’, 곧 ‘힘을 기울임’이다. 얼핏 생각하면 그 어떤 분야든 ‘노력’을 권장하지 않는 데가 없다는 점에서 팔정도만의 독특함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正)’자의 의미인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함’에 그 독특함이 있다. 여기에는 꾸준함이 동반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노력하여 나아감’의 면모라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권에서 쓰는 ‘정(精)’자의 기본적인 뜻은 ‘쌀을 찧는 것’이다. 벼를 재배하여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쌀로 가공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자에는 ‘가공’으로써 ‘힘을 기울임’이라는 뜻이 있고, 대강이 아니라 곱게 빻
김준호 교수2016-06-17 -
도덕적 완성 위한 사고체계
‘여덟 가지 성스러운 수행 길’(八正道)의 세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의 내용은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한 말(語), 행위(業), 생계유지(命)이다. 이 셋은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하다’(正)는 말을 제외하면, 세상 사람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내용에 해당한다. 따라서 매우 평범하게 보이기 때문에 중요성을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대념처경〉의 설명에서 반복되는 구절은 생략하고 핵심 내용을 들어보자. “비구들이여, 거짓말, 이간질, 욕설을 하지 않고,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이를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한 말’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살생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고, 부적절한 성욕을 멀리하는 것을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한 행위’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부적절한 생계[수단]를 버리고 적절한 생계[수단]에
김준호 교수2016-06-13 -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
‘여덟 가지 성스러운 수행 길’(八正道)의 두 번째는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한 사유’이다. 견해와 마찬가지로 사유가 발휘되는 양상 또한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 어떤 사유를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하다고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특히 사유에 내재된 양면성이 문제가 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논의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의 ‘대념처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사유’(正思惟)인가? 비구들이여! ‘벗어나 떠남’(出離, 출리)에 대한 사유, ‘분노(瞋?, 진에)가 없음’에 대한 사유, ‘해치지 않음’(無害, 무해)에 대한 사유, 이를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사유’라고 한다.”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사
김준호 교수2016-06-03 -
괴로움 알고 해법 찾는 일
‘여덟 가지 성스러운 수행 길’(八正道)의 첫 번째는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견해’(正見)이다. ‘적절한 길’(中道)을 걷는 이는 특정한 하나의 판단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나아가 하나의 생각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집착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지님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렇다면,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견해’(正見)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어떤 시선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천차만별의 대답이 가능하다. 앞에서는 자동차와 보행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선의 차이만을 살펴보았지만, 어쩌면 이와 같은 차이는 세상 사람들의 숫자만큼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
김준호 교수2016-05-27 -
양면에 대한 깊은 이해
승용차 안에서 운전자의 시선은 목적지로 빠르게 달려가려는 의도에 의해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신호등의 색깔이 바뀌는 순간, 재빨리 몰고 가는 것이 의미 있는 행위가 된다. 이때의 시선이란 ‘질주’의 가치가 실현시키는 쪽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느리게 움직이거나 신호를 위반해서 길을 건너는 보행자의 잘못이 매우 크게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질주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보행자가 만들어내는 시선은 건널목을 지나가는 승용차에 집중될 것이다. 자신의 갈 길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안전 또한 위협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처럼 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과 차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방향만 다른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형성되는 의도와 가치 또한 달라진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옳고 그름이 정해져 있
김준호 교수2016-05-20 -
‘바르고 온전한’ 그리고 ‘적절한’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禪定)은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는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그는 참으로 열반에 가까우리라.” 이 경문은 〈법구경(法句經)〉의 게송 제372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그야말로 불교의 수행 길에서 명상과 지혜가 중심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 둘은 서로 협력관계 또는 보완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관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디가 니까야〉 제16 〈대반열반경〉에서도 ‘계(戒)’와 더불어 온전하게 닦아진 ‘명상’이 큰 결실을 이루고 커다란 유익함을 가져오며, 명상과 함께 온전하게 계발된 지혜 역시 마찬가지로 유익한 결과를 이룬다고 설명하고 있다. 계율과 명상과 지혜는 불교의 수행 길에서 어느 하나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
김준호 교수2016-04-29 -
불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
컴퓨터 게임에 열중한 모습은 하나의 대상에 몰입되어 있는 명상의 특성과 유사한 듯 보이지만, 이때의 마음 상태는 신경계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탐욕, 분노, 무지를 멈추고 고요한 상태에서 하나의 대상에 온전하게 집중된 상태를 지향하는 명상과 달리, 흥분으로 들떠 있는 상태를 경험하면서 계속해서 더 많은 쾌감과 흥분을 누리고자 하는 모습에서 명상에 내재된 특성과는 거리가 있음을 확인해보았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명상의 특질은 ‘마음이 그 어떤 감관대상에도 구속되지 않음’(解脫)을 추구한다는 것’ 또는 ‘탐욕, 분노, 무지 따위가 마음을 그르치지 않아서 온전한 평온을 누리고 있는 상태’(涅槃)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곧, 계율과 더불어 불
김준호 교수2016-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