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22. 소설_양주길을 걷다
화염 같은 더위에 한 방울의 물이 귀하듯, 깊은 어둠 속 여린 등불이 태양처럼 귀하듯, 더는 물러날 곳 없는 겨울의 칼바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자그마한 온기. 그리고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그리운 어떤 곳이다. 저기 천보산 너른 들판 위,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왕을 기다리며 잠든 왕궁이 있다. 마르지 않는 감로의 물이 메마른 목을 적셔 주고 꺼지지 않는 등불이 깊은 밤 찾아올 이를 기다리는 곳. 첫눈 내리는 어느 날, 그렇게 돌아올 누군가를 위해 영원의 궁전은 겨울 산을 지킨다. 첫눈을 기다리며눈이 내릴 것이다. 지금의 절기는
장보배 작가11-21 10:26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21. 입동_봉은사 길을 걷다
펄럭이는 깃발들 너머로 보이는 것은 장엄한 새 세상의 모습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불보살과 천신들이 부처님의 곁을 호위하고 삼계의 독경 소리가 노래처럼 울려 퍼지는 곳. 영원히 지지 않는 꽃들의 향기 가득하고 결코 춥지도 않고, 배고픔도 없는 그런 세상. 그 안에 들어설 방법은 오직 지난날 내가 쌓은 자비와 선업(善業)만이 말해 줄 것이다.지금은 차가운 계절. 모진 바람 몰아치는 이 세계를 바꿀 방법은 오직 하나, 그뿐이다. 겨울이 일어선다입동(立冬). 마침내 겨울이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24절기 중 19번째 절기이자, 겨울
장보배 작가11-07 10:13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20. 상강_한강 길을 걷다
상강을 맞이하니 모든 일 그치네매서운 날씨에 기분이 슬프도다 기러기는 새끼를 데리고 이르고황화는 뜻을 얻어 활짝 피었네 - 상강(霜降), 채지홍 〈봉암집〉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천문학, 지리, 수학에도 능통했다는 대학자 봉암 채지홍(鳳巖 蔡之洪, 1683~1741). 근 삼백여 년 전 조선의 어느 날, 뜨겁고 치열했던 여름과 풍요의 기운 넘실대는 가을도 다 사라져 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매서워지는 10월의 찬바람 앞에서, 그날의 봉암은 막연한 슬픔을 마주했을 것이다. 서리가 내리다 황금빛 벼로 가득했던 들녘은 텅 비어 버리고 산천을
장보배 작가10-24 10:20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9. 한로_남해 길을 걷다(2)
남해 금산, 험준한 바위산 절벽 위에 석탑이 하나 있다. 잠들지 않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천년을 하루처럼 머물렀던 시간. 그것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탑의 틈새마다 저마다 간절한 소원을 숨겨 두고 떠나곤 했다. 밤이 되면 탑은 품었던 소원들을 하늘로 보낸다. 소원은 하늘로 올라가 반짝이는 별이 되고, 길을 헤매던 이들은 그 별을 보며 다시 가야 할 곳을 찾았다. 지금은 차가운 이슬이 내리는 시간. 탑은 숨겨 두었던 품속의 별을 꺼내어 다시 밤을 밝힌다. 길을 찾는 누군가를 위해, 다시 돌아올 이들을 위하여.석탑의
장보배 작가10-03 10:07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8.추분_남해 길을 걷다(1)
마침내 추분(秋分)이다. 지난 3월 봄을 알리던 춘분의 시간. 태양 황경 0도로 시작되었던 절기는 이제 지구 반 바퀴의 여정을 완주하며 ‘추분’이라는 새로운 계절의 관문을 통과한다. 일 년에 단 두 번, 이 두 절기는 서로의 대척점에 서서 낮과 밤의 시간을 똑같이 나눠 갖는다. 하지만 춘분을 기점으로 낮이 길어지고 따뜻한 계절이 시작된다면, 추분은 정확히 그 반대를 향해 나아간다.세상에서 가장 다르고, 또 닮아 있는 두 세계의 권력 이동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추분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밤은 낮으로부터 힘을 탈환하고 그의 세력을
장보배 작가09-19 10:20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17. 백로_서울 길을 걷다
백로(白露)는 지나는 것과 새로운 시간의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계절.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과 그리움의 온기가 새벽이슬로 맺히는 절기다. 아직은 물기 머금은 더운 바람이 등허리를 적시지만, 일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속에 가을은 어느새 머물러 있다. 이른 새벽, 대지를 적시는 이슬로 먼저 알려 주는 절기. 백로가 시작된다. 이슬의 시간새벽이슬이 뜰 오동나무에 내리니 둥글둥글 맺힌 것이 새하얀 옥 같구나봉암 채지홍의 〈봉암집〉에 담긴 시 ‘백로’의 한 구절이다. 한 해의 15번째 절기이자, 하얀 이슬이라는 의미를 지닌 백로. 이 무렵의
장보배 작가09-05 11:26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16. 처서_남원 길을 걷다
처서는 햇살과 바람, 별의 이야기로 채워진 절기다. 낮이면 태양과 바람이 사이좋게 제 할 일을 하고, 밤이면 별의 모습을 한 신들이 그 어느 때보다 성스럽게 빛나는 때.기세등등하던 더위가 슬며시 제 풀을 꺾고, 깊은 밤 귀뚜라미와 함께 이별 노래를 부르는 시간. 지금은 처서다. 가을로 간다 “처서가 얼마나 남았지?” “글쎄, 앞으로 두어 달 정도 남은 것 같은데.” “아이고, 아직도 한참이네!”지난 7월 말, 재래시장을 걷던 중 우연히 듣게 된 어르신들의 대화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올해 처서는 8월 23일. 고로 처서는
장보배 작가08-22 10:18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15. 입추_제주 길을 걷다(2)
칠월이라 맹추 되니 입추 처서 절기로다화성은 서쪽으로 흐르고 미성은 중천이라늦더위 있다 한들 절서야 속일소냐비 끝도 가벼웁고 바람끝도 다르도다19세기 조선,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의 ‘농가월령가’가 전하는 가을의 시작. 저 오랜 노래 속 계절이 흐르는 모양은 하늘과 땅, 대지를 흘러 뭇 생명의 눈과 피부, 코끝을 돌아 나간다. 흐르는 별의 길에서, 질기고 질긴 더위와 그 진득한 열기를 툭 치고 가는 변해 버린 바람 끝에. 시간은 그렇게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오고 감의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장보배 작가08-08 10:29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4. 대서_제주길을 걷다(1)
우주 만물이 상생하고 순환하는 과정을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 가지 기운으로 설명한 음양오행 사상. 옛사람들은 뭇 생명의 본질을 자연의 다섯 가지 성질을 통해 이해하고, 계절의 흐름과 그사이의 미묘한 변화를 읽어 냈다. 그중에서도 일 년 중 땅의 기운이 가장 왕성해지는 때, 그것이 바로 토용의 시간이다. 일 년에 단 네 번. 입춘·입하·입추·입동이 시작되기 전 18일간을 ‘토왕용사(土旺用事)’ 혹은 ‘토용’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겨울은 혹한(酷寒), 여름은 혹서(酷暑)의 시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입
장보배 작가07-18 10:45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3. 소서_영월길을 걷다(下)
하지 전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망칠까, 마른하늘 걱정만 했더니 예년보다 빨리 달려온 장맛비 소식에 또 한 번 세상이 어수선하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막연한 침묵뿐. 다만 빗줄기를 헤집고 다가오는 후끈한 열기만이 이 계절을 설명하려 애를 쓴다. 두 얼굴의 여름이 숨 가쁜 몸부림을 시작하는 지금, 소서(小暑)의 시작이다. 작은 전쟁6월 중순이 지나자마자, 전국 메밀 농가의 피해를 우려하는 뉴스가 연달아 들려온다. 때 이른 장마로 메밀의 수발아 현상이 일어나 수확량과 상품성이 떨어질 상황에 놓인 것이다. 수발아는
장보배 작가07-04 10:21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2. 하지_영월길을 걷다(上)
2월 정월 대보름 무렵, 냉기가 채 빠지지 않은 땅은 아직 돌처럼 단단하지만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농가는 쉴 틈이 없다.겨우내 아껴둔 감자들을 꺼내어 둥글둥글 예쁘고 튼실한 것들만 골라내는 시간. 큰 것은 뚝뚝 잘라 잘 태운 나뭇재를 묻혀 재워 두고 작은 것들은 그대로 두어도 될 일이다. 씨감자를 만드는 일은 그렇게 시작된다. 3월이 오고, 춘분이 되면 푸릇한 싹이 난 씨감자는 비로소 땅속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몇 달의 시간이 흘러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면 찬란한 기쁨이 되어 돌아올 테지. 태양의 온기와 함께 달큰한 햇
장보배 작가06-20 10:34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1. 망종 _ 수원 길을 걷다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망종(芒種)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좋은 속담이 또 있을까. 기나긴 허기짐에 봄이 채 오기도 전 부랴부랴 심었던 보리. 이제 겨우 먹을 만해지니 쉴 틈도 없이 모내기철이 다가왔다.태양의 황경은 75도, 소만(小滿)과 하지(夏至) 사이에 자리한 여름의 절기. 부지런히 달려온 지구의 6월은 망종과 함께 시작된다. 푸르름을 먹는 계절너 나 할 것 없이 아직 채 다 익지 않은 풋보리를 베어다 까끌거리는 그것을 맨손으로 비빈다. 톡톡 떨어지는 귀한 보리알을 알뜰히 모아 솥단지에 볶
장보배 작가06-06 13:37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10. 소만 _ 화성 길을 걷다
“한 번 더. 한 번 더 뛰어봐. 할 수 있어!”산문을 나서는 길. 귓전을 스치는 다정한 목소리에 잠시 발길을 멈춘다. 자그마한 돌다리를 넘지 못하는 어린 딸의 손을 꼭 붙잡고 다독이는 젊은 아버지. 아직은 누군가의 아들인 편이 더 어울릴 법한 앳된 얼굴의 그가 자신의 아이를 지킨다. 하나의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우주의 법칙. 그 오랜 이야기를 닮은 또 한 번의 절기, ‘소만(小滿)’이 시작된다. 소만의 얼굴5월의 끝자락, 햇살은 부드럽고 바람은 맑다. 들녘의 보리는 어느덧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고 모내기를 위한 손길이
장보배 작가05-23 10:15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9. 입하 _ 홍제천 길을 걷다
사월이라 한여름 되니 입하 소만 절기라네/비 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로 울고/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 농가월령가 中 ‘사월령’농가월령가에 그려진 이른 여름의 모습은 더없이 맑고, 싱그럽다. 땅에는 푸른 보리에 알알이 이삭이 맺히고, 하늘에는 고운 새소리 가득한 이 계절을 어느 누가 마다할까. 만개했던 봄이 저무는 대신 녹음이 더욱 짙어지는 5월. 바야흐로 여름을 알리는 입하(立夏)의 시작이다. 오월의 입하를 시작으로 칠월의 대서까지, 이제 여름은 힘찬 말처럼 시절을 내달릴 것
장보배 작가05-05 15:06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8. 곡우 _ 선암사로 향하는 길
유유자적 달려가던 버스는 마침내 느리게 걷기 시작한다. 4월이 되면, 호수에 맑은 물이 일렁이고 그 곁을 따라 분홍 벚꽃이 수십 리 가득 피어난 날이라면. 그런 곳에서라면 달리던 버스도 제 속도를 줄이고 느린 걸음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봄이면 그런 일도 더러 일어나곤 하는 것. 밤 길었던 겨울을 지나 빛으로 온 이 계절은 마침내 생명의 비마저 손짓해 부른다. 6번째 계절, ‘곡우’의 시작이다. 선암사 가는 길순천으로 향하는 기차 안. 문득 사람들의 탄성에 고개를 들어보니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저 멀리 섬진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장보배 작가04-18 09:21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7. 청명 _ 경주 길을 걷다(2)
태양의 황경이 0°를 이루었던 지난 절기. 춘분은 그렇게 겨울로부터 태양의 힘을 돌려받아 빛의 계절을 열었다. 봄의 문이 열리는 그 0의 선에서 태양은 다시 힘차게 발을 구르고, 마침내 황경 15°에 다다르는 시간. 다섯 번째 계절, 청명(淸明)이 시작된다. 청명과 한식4월은 청명과 함께 문을 연다. 하늘이 맑고, 밝아지기 시작한다는 이 절기에는 열린 하늘 틈으로 일조량이 많아지면서 기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일 년의 24절기 중, 본격적인 농사력을 셈하는 것도 청명부터다. 청명 전후로 논과 밭의 흙을 고르고, 비로소 봄 밭갈이가 시
장보배 작가04-07 17:07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6. 춘분 _ 경주 길을 걷다(1)
옛사람들이 남긴 저 오랜 탑은 오늘 하루 제 속 가득히 빛을 가두고 삼킨다. 밤이 되면 딱 그만큼의 어둠도 저곳을 찾을 것이다. 살다 보면 하루쯤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이 서로를 마주 보며 하나가 되고, 그렇게 꽉 찬 내가 되는.우주의 균형이 온 세상에 머무는 시간. ‘춘분’이다. 0으로부터태양의 황경이 0°가 되는 순간, 지구별의 낮과 밤은 그 길이가 같아진다. 저 높은 하늘 위 황도와 적도가 교차하는 춘분점. 태양이 그 0°의 점에 도착하면 빛은 적도 바로 위로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지구는 일순 어둠과 빛을 반으
장보배 작가03-20 23:04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5. 경칩 _ 용인 길을 걷다
저 멀리 산 높은 곳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순식간에 적막했던 산길과 숲을 채우고,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거대한 소리의 물결. 하늘에서 땅으로, 사람으로, 이제 막 돋아나는 저 새잎까지 공명하며 흩어지는 청아한 소리. 어느새 숲은 다시 고요해지지만, 종소리가 퍼지기 전과 후의 세상은 다르다. 이제 천둥 같은 저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을 향해 떠나야 할 때. 다시, 빛으로 나아갈 시간이다. 다시 일어날 시간, 경칩3월이다. 한 해의 세 번째 달에 접어들면 24절기의 세 번째 절기도 함께 시작된다. 바야흐로 천둥소리에 잠자던 개
장보배 작가03-07 11:08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4. 우수 _ 여주 길을 걷다
꽃샘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린다 해도, 기온이 서서히 오르며 눈과 얼음이 녹고 온 대지에 수기가 차오른다어느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순리라고 하는 것, 이치대로 산다는 것.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것 마냥 툭, 하고 내던져지는 것들이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이다.해와 달이 번갈아 하늘을 오르고, 바람이 불고, 더위에 가쁜 숨을 내쉬다 보면 다시 새싹이 돋아나는. 그 별일 없는 세상이야말로 우주의 비범함이 빚어낸 선물인지 모른다. 그러니 또다시 비가 내린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 기쁨을
장보배 작가02-20 20:29 -
[장보배의 24번의 계절] 3. 입춘 _ 부산 길을 걷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 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 푸른 봄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시인 고월(古月) 이장희(1900~1929)의 시 안에서 봄은 이토록 살아있다. 고운 향기로, 금방울 같은 눈동자에 흐르는 미친 불길처럼, 포근한 졸음 뒤에 끝내 푸른 생기가 뛰어노는. 일제강점기, 짧은 생을 우울과 부조리에 대한 결
장보배 작가02-07 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