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들판을 걸으면 바람이 따라온다. 습기 빠진 바람은 가볍게 바스락거리며 세상을 스쳐 간다. 태풍을 몰고 오는 여름 바람은 들판을 휩쓸고 지나가 세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맵고 혹독한 겨울바람은 생명의 숨결을 냉혹한 어둠으로 얼려 버린다. 그러나 11월의 바람은 존재를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옥수수를 떠나보낸 기다란 잎은 바람에 흔들리며 초록을 벗어 내고 허연 잎맥만 남긴다. 추수가 끝난 휑한 논둑에 서 있는 억새는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려 버리고 제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모습은 채색된 삶의 껍질을 벗고 무여(無餘)의 마음으로 대중을 일깨우는 선승을 닮았다.
11월의 바람이 몸을 스치면 눈이 맑아져 멀리 있는 산이 가까워진다. 빽빽했던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헐거움과 여유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나무들은 잎과 가지가 뒤엉켜 숨 가빴던 여름의 삶을 밀어내고 청량한 빛의 입자를 마음껏 받아들인다. 한때 죽음을 거부하듯 혈기를 쏟아 붉게 물들었던 단풍잎들도 바람에 몸을 맡겼다. 오욕(五欲)의 잎을 떨군 나무들이 뚝뚝 떨어져 본래의 결을 드러낸다.
여름 장마의 눅진한 물기가 빠져나간 벌판은 말라 있다. 촘촘히 몸을 비볐던 벼 이삭들이 베어진 논의 흙은 부슬부슬 속살을 내보인다.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가 일제히 내려앉는다. 바람이 그들 위를 스치며 깃털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기러기들은 몸뚱이와 날개를 둥글게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지와 하나 되어 갈색으로 물들어 있다. 그 색은 신생의 비릿함도 여름의 화려함도 아닌 죽음의 침묵에 닿아 있다. 어쩌면 애초부터 생과 사의 분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름마저 앞뒤가 없는 ‘기러기’처럼, 그들은 묵묵히 대지의 빛을 호흡하고 있다.
11월에는 강물마저 몸을 가볍게 한다. 들판을 가로지르며 거칠게 흘러가던 모습은 사라지고 몸을 낮춰 뼈만 남긴 채 고요히 흐른다. 탁류를 쏟아 내던 사나움을 흘려보내고 눈부신 투명함으로 자신을 비웠나 보다. 그동안 얼마나 분주했는지, 어쩌면 오만했을지도 모른다.
대지의 모든 식물이 싹트고 자라나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이다. 물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모든 생명의 얼굴을 비춘다. 익어 가는 열매는 마르고 비틀리며 붉거나 누렇거나 검게 변한다. 완숙의 순간, 바람이 강물의 물기를 말려 주지 않았다면 억새와 구절초는 축축함 속에서 생명을 지켜 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 번뇌와 욕망의 절정에서는 늘 물기가 고이고 눈물이 흐른다. 인간이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번뇌는 벽 사이로 스며드는 물기처럼 피어나고 욕망은 곰팡이처럼 번식해 온 집안을 악취로 뒤덮듯 내 마음의 방은 탐진치(貪瞋癡)의 습기로 젖어 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스며드는 습기와 같다. 오욕과 집착이 마음속에 맺혀 이내 물기로 변하고, 그 물기는 마음을 갈애(渴愛)의 물웅덩이로 만든다. 우리는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신을 잃어 간다.
이제 나는 11월의 바람에 몸을 맡긴다. 바람은 마음의 물기를 말리고 본래의 가벼움으로 나를 풍화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