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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의 기틀 마련한 청담 스님의 주석처
삼각산과 도봉산이 만나 고개를 이루는 곳이 우이령(牛耳嶺)이다. 이름에 걸맞게 그곳엔 소의 귀를 닮은 우이암이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우이동이다. 이곳에서 삼각산 백운대로 오르다보면 도선사가 나온다. 사찰 홈페이지를 보면 신라 말 고승 도선국사를 개산조로 하고 있다. 처음부터 도선사였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조 기록에 의하면 도선사의 명칭은 도성암(道成庵)이었다. 우이동에서 동쪽으로 산길을 따라 방학동으로 가다 연산군 묘를 지나면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남편 죽산 안씨 양효공 안맹담(安孟聃)의 묘가 나온다. 도성암은 정의공주의 원찰이었다. 정의공주는 1428년 그와 결혼하였다. 이 무렵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음과 토를 붙이는 문제가 난제였다. 세종은 여러 자식들에게
김경집 진각대 교수2012-02-07 -
진취적이며 한국적인 불교이념 구현 도량
지금도 전국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발견된다. 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아 한국의 정기를 끊으려 한 흔적이 대표적이 예이다. 일제는 경복궁에 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 근정전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방향에서 약간 빗겨나게 지었다. 북악에서 뻗어 내려오는 혈맥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총독부 청사에 소요되는 석재를 좌청룡인 낙산에서 채석함으로써 혈의 파괴와 지배자의 권위의식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조선이 건국하고 한양을 도성으로 정할 때 가장 걱정했던 것은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의 지세가 약한 것이었다. 이를 우려한 사람들은 좌청룡의 지세를 강하게 하는 묘안을 내었다. 먼저 동대문 운동장이라 불렸던 곳까지 흙을 쌓아 낙산 좌청룡의 지세를 강하게 했다. 그곳을 성 동쪽이라 해서 성동원두라 불렀다
김경집 진각대 교수2012-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