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09 (수)

‘오직 부처님 말씀’ 역경불사의 길을 걷다

어머니 임종 앞에서 마주한 삶의 무상
삶과 죽음의 물음이 열어 준 출가의 길
삼묵 스님과의 만남, 화두 정진의 시작
초기불교와의 인연, 역경 서원의 전환점
병고와 죽음의 문턱에서 더 깊어진 원력

각묵 스님은… 195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수학교육과에 재학 중 출가했다. 1979년 화엄사 도광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82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출가 후 7년간 선방에서 정진하던 중 초기불교 경전에 관심을 갖고 인도 뿌나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산스크리트어, 빠알리어, 쁘라크리트어를 수학한 뒤 1998년 귀국했다. 2002년 대림 스님과 함께 초기불전연구원을 설립해 지도법사로 활동하며 빠알리 삼장을 완역하는 역경불사를 이끌었다. 〈디가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담마상가니〉, 〈위방가〉, 〈이띠웃따까〉, 〈우다나〉 등을 잇달아 번역했다. 또 〈맛지마 니까야〉, 〈앙굿따라 니까야〉, 〈청정도론〉 교열에 참여했고, 불교 교리 입문서 〈초기불교 이해〉와 〈초기불교 입문〉 등을 저술했다. 실상사와 보리원 등에서 경전 강좌와 수행 지도를 이어 왔고, BTN불교TV와 BBS불교방송, 유튜브 등을 통해 법문을 널리 전하고 있다. 2006년 〈디가 니까야〉 완역으로 보현학술상을, 2011년 〈상윳따 니까야〉 번역으로 행원문화상 역경상을 수상했다.
각묵 스님은… 195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수학교육과에 재학 중 출가했다. 1979년 화엄사 도광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82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출가 후 7년간 선방에서 정진하던 중 초기불교 경전에 관심을 갖고 인도 뿌나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산스크리트어, 빠알리어, 쁘라크리트어를 수학한 뒤 1998년 귀국했다. 2002년 대림 스님과 함께 초기불전연구원을 설립해 지도법사로 활동하며 빠알리 삼장을 완역하는 역경불사를 이끌었다. 〈디가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담마상가니〉, 〈위방가〉, 〈이띠웃따까〉, 〈우다나〉 등을 잇달아 번역했다. 또 〈맛지마 니까야〉, 〈앙굿따라 니까야〉, 〈청정도론〉 교열에 참여했고, 불교 교리 입문서 〈초기불교 이해〉와 〈초기불교 입문〉 등을 저술했다. 실상사와 보리원 등에서 경전 강좌와 수행 지도를 이어 왔고, BTN불교TV와 BBS불교방송, 유튜브 등을 통해 법문을 널리 전하고 있다. 2006년 〈디가 니까야〉 완역으로 보현학술상을, 2011년 〈상윳따 니까야〉 번역으로 행원문화상 역경상을 수상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죽음을 맞는 어머니의 얼굴. 임종의 순간, 아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중학교 3학년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8월 31일입니다.”

날짜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각묵 스님은 그날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까까머리 소년은 이제 내년이면 칠순을 맞는다. 각묵 스님은 죽음에 대해 “거창하게 말할 게 아니라, 단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 했다. 병고로 수술대에 눕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고, 마취를 할 때면 호흡을 살핀다. 마치 죽음의 순간을 연습하는 듯했다. 담담하게 느껴지는 스님의 설명에는 ‘생로병사’를 편안히 받아들이는 평온함이 전해졌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삶의 무상함을 경험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부처님께 귀의한 각묵 스님. 스님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오직 부처님 말씀’이다.

‘부처님 말씀’을 위해 각묵 스님은 초기불교 경전의 번역과 교리 보급에 헌신해 왔다. 〈디가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담마상가니〉, 〈위방가〉, 〈이띠웃따까〉 등 빠알리 경전을 번역해 학문과 수행의 기반을 넓혔다. 교리 입문서인 〈초기불교 이해〉와 〈초기불교 입문〉을 저술했고, 전통 용어를 우리말로 풀어 대중에게 전하는 데 힘썼다. 단독 역서와 공역은 총 11종 24권이며, 다른 저술도 포함하면 13종이 넘는다.

위빠사나 수행과 교학의 통합을 강조하며, 법문과 강좌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 있는 각묵 스님을 9월 16일 김해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만났다.

제22기 초기불전학림에서 각묵 스님이 번역한 '테리가타'  1강을 마친 뒤, 참석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제22기 초기불전학림에서 각묵 스님이 번역한 '테리가타'  1강을 마친 뒤, 참석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화두를 붙들고 출가의 길에 서다
밀양 평산 신씨 집성촌의 장손 장남.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란 소년은 수학 교사가 되어 평범하게 사는 삶을 꿈꿨다. 공부에 재능을 보여 가족들의 기대는 컸지만, 그가 꿈꾸는 미래는 단순했다. 대신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로 도서관과 서점을 자주 찾았고 사르트르의 대표작 〈구토〉, 까뮈의 〈이방인〉 등을 탐독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청담 스님의 책 〈마음〉을 접하며 불교에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고, 소림사 인근 독서실에서 공부하며 불교학생회 활동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1976년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수학교육과에 입학해 대학생불교연합회에 가입했다. 교화부장을 맡아 정기법회를 준비하며 법사 스님들을 모시는 역할을 했다. 1970년대, 학생들이 십시일반 모은 회비로는 동아리 운영이 쉽지 않아, 직접 사찰을 찾아가 법을 청하며 스님들과 인연을 맺었다.

“대학생들의 어려운 형편을 살펴 주신, 정말 고마운 스님들이 계셨습니다. 당시 인연이 된 화엄 스님(김해 영구암)과 삼묵 스님(선암사)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삼묵 노스님을 만나자 각묵 스님은 삶과 죽음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던졌다.

“스님 앞에 누가 앉아 있는데, 그놈이 어떤 놈입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버릴 수 있는 거 싹 다 버리고 가면 뭐가 남느냐?”고 반문했다. 당시의 불교 상식으로는 ‘마음’이라 답해야 할 것 같았지만, 스님은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순간 떨어진 불호령.

“내가 시체하고 이야기했구나. 이놈을 당장 들고 나가 묻어 버려라!”

노스님은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뜨며 큰 손으로 경상(經床)을 내리쳤다. 스님의 고함 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각묵 스님은 순간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정신도 없었고. 내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잘못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만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 길로 삼묵 스님의 제자가 되어 화두를 받고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갔다. 강렬한 의정(疑情)이 이어지면서 ‘선방에서 화두를 타파해 확철대오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굳혔고,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친 뒤 출가했다.

부처님 원음 전하는 역경불사의 시작
군 복무 후에는 1987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선방에서 화두와 대면하며 정진했다. 그러나 출가 이전에 그렇게 또렷이 들리던 화두에 의정이 붙지 않았다.

수행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던 1986년, ‘나는 부처님의 제자인데 정작 부처님의 가르침, 곧 불교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라는 강한 반성이 일었다. 이를 계기로 대불련 시절 탐독했던 법정 스님 번역의 〈숫따니빠따〉를 다시 펼쳤다. 특히 스리랑카의 월뽈라 라훌라(Walpola Rahula) 스님이 쓴 불교 개론서 〈What the Buddha Taught〉를 접하면서 초기불교에 대한 확신을 굳혔다.

부처님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며, 그분의 가르침이야말로 불교의 본령이라는 자각이 뚜렷이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이는 부처님의 원음인 초기불교로 눈을 돌리는 전환점이 됐다. 이후 활성 스님의 지도와 도반 함현 스님, 입적한 철오 스님의 배려로 ‘고요한 소리’의 후원을 받아 인도 유학길에 올랐다.

1989년 3월 인도에 도착한 각묵 스님은 곧바로 부처님 성도지인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대탑을 참배했다. 그 자리에서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금생에 반드시 빠알리 삼장(三藏)을 우리말로 옮기겠다는 원을 세웠다.

대학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진흙탕 속에서 먹이를 찾으려 몸부림치는 돼지를 마주했다. 그 순간 〈청정도론〉의 한 구절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가 비구이다(삼사레 바얌 익카띠 띠 빅쿠)’가 떠올랐다. 윤회 속에 머리를 처박고 살아가는 자기 모습이 겹쳐 깊은 반성을 했고, 이 체험은 지금도 역경불사에 매진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인도에서 대림 스님과 인연을 맺은 각묵 스님은 본격적으로 초기불전 번역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2002년 두 스님은 빠알리 삼장의 한글 완역을 목표로 초기불전연구원을 설립했다. 이후 초기불전연구원은 〈디가 니까야〉(2006, 각묵 스님), 〈앙굿따라 니까야〉(2007, 대림 스님), 〈상윳따 니까야〉(2009, 각묵 스님)를 번역했고 2012년 〈맛지마 니까야〉를 출간하며 4부 니까야 완역을 마무리했다. 연구원 설립 10년 만에 이룬 성과다. 이어 각묵 스님은 〈금강경 역해〉, 〈아비담마 길라잡이〉, 〈네 가지 마음 챙기는 공부〉 등을 출간하며 부처님의 원음을 전하는 데 헌신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역경한 불전들. 설립 10년만에 4부 니까야를 완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역경한 불전들. 설립 10년만에 4부 니까야를 완역했다.

삶과 죽음 앞에서 다시 세운 서원
역경불사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뇌종양과 암, 결핵 등 중병을 겪으며 삶과 죽음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죽음은 겸허히 받아들일 부분”이라는 스님은 매번 마취에 들기 직전 화두를 들었다. 마치 죽음과 삶이 반복되는 매 순간을 알아차리며 받아들이는 윤회의 과정과도 같았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스님은 오래된 서원을 꺼내 놨다. 군 복무 시절 정보사령부 군종병으로 서울 봉은사 충령각을 관리하며 지장보살과 깊은 인연을 맺었고, 수좌 시절에는 〈지장십륜경〉으로 지장보살의 서원을 가슴 깊이 새긴 바 있다.

“지장보살님은 출가 성문의 모습을 하신 분입니다. 세세생생 불교의 정법을 수호하고 이웃을 이롭게 하며 살아가겠다는 그분의 서원을 본받고 싶습니다.”

각묵 스님은 “초기불전연구원을 통해 역경불사에 매진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지장보살의 서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수년 전부터 매일 아침 절을 올리며 이 서원을 반조해 왔다. 그리고 남은 생에 율장 번역을 완성하는 것을 마지막 원력으로 하루하루 정진하고 있다.

경남 김해에 위치한 초기불전연구원의 전경. 초기불교 경전 연구와 역경불사의 거점이다.
경남 김해에 위치한 초기불전연구원의 전경. 초기불교 경전 연구와 역경불사의 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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