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 송마나의  시절인연] 존재의 탈선, 열대야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했습니다.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했습니다.

여름 햇빛이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태양의 고삐에서 풀려난 빛들은 산과 바다와 사막을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퍼붓는다. 무자비한 여름빛은 사람이 사는 세상쯤은 안중에도 없다. 빌딩의 외벽을 달구고 아스팔트를 녹이며 공원에 놓인 벤치를 염전 바닥처럼 부석거리게 한다. 

여름의 열기를 피해 바다를 찾았다. 해변은 사람들로 들끓었고 파도는 출렁이기를 포기한 채 더위에 지친 몸처럼 드러누웠다. 숲도 다르지 않았다. 제철을 맞은 매미들이 악에 받친 듯 울어 대자 바람조차 끼어들지 못하고 나뭇잎 뒤에서 머뭇거렸다.

여름은 아이들의 웃음이 폭죽처럼 터지던 계절이었다. 학생들은 방학에 들떠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볐고, 가족들은 피서 계획을 짜느라 가슴이 부풀었다. 시골 할머니들은 손자들을 맞으려 이부자리에 풀을 먹이고 모기를 쫓아낼 마른 쑥을 장만하느라 종종거렸다.

그늘 아래 부채를 부치며 아이스크림을 핥던 달콤한 여유, 저녁이면 식구들이 둘러앉아 수박을 자르던 순간, 얼마나 가슴이 설렜던가. 하지만 언제부턴가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이 붉게 익은 수박은 그 설렘마저 앗아 갔다. 정겨웠던 여름 풍경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아련히 피어난다.
세월이 흐를수록 여름의 흰빛은 난폭하게 날뛴다. 급기야 올여름은 40도를 넘어섰다. 짧은 거리를 걸어도 태양 빛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두 눈을 찌른다. 정수리를 꿰뚫듯 자외선이 쏟아져 정신이 아찔해진다.

더구나 여름의 강렬한 열기는 낮을 초토화한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듯 밤까지 지배하려 든다. 우리는 낮과 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며 하루를 살아간다. 낮에는 노동의 땀방울을 흘리고, 밤에는 그 수고와 피로에서 벗어나 잠을 잔다. 잠은 치열한 삶을 정돈하는 영혼의 숨결이다.

열대야는 보석 같은 잠을 조각내어 어디론가 가져가 버린다. 빼앗아 간 잠에 대한 보상조차 외면한다. 잠은 살아 있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필수의 선물이다. 우리는 잠이라는 작은 죽음을 지나 새날을 얻는다. 깊이 잠들수록 새날은 더 밝고 활기차다. 그러나 잠들지 못한 사람에게 열대야는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생의 리듬을 깨트리는 존재의 탈선이다. 

열대야로 불면을 앓는 사람들은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어디론가 흘러가듯 삶의 에너지를 방전시킨다. 마침내 불면은 우리의 의식을 흐릿하게 하고 정신을 서서히 피폐하게 한다. 나는 찢긴 잠의 틈새에서 몸을 일으켜 멈춰 버린 선풍기의 타이머를 다시 맞추고 찬물을 한 컵 마신다. 흐릿한 깨어 있음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태양은 이미 졌는데, 왜 깊은 밤에도 불길은 꺼지지 않는가. 내 안에서 번뇌의 불꽃이 일렁거려 밤이 식을 줄 모르고 열기를 뿜어내는 것인가. 허공에는 그믐달이 아스라이 떠 있고, 벌레 떼가 붕붕거리며 어둠을 맴돈다. 머지않아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이 찾아오련만 나는 저들처럼 여름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면으로 뒤척이고 있다. 열대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놓아 버리면 잠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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