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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이룬 왕, 그러나 ‘몸 잃은 넋’ 어디에…”
성종 1457-1494(38세) 재위 25년 1개월 1469.11(13세)-1494.12(38세) 땅값이 가장 비싼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에 성종이 묻혀 있다. 주변 땅값이 평당 1억을 넘나든다. 뚝섬 나루를 건너 봉은사 지나 멀찍이 능을 조성했는데 세상이 변해 돈과 환락이 몰린 곳이 되었다. 성종은 부인이 12명이다. 조선 역대 왕 중 랭킹 1위다. 공동 1위 : 11대 중종도 12명, 그들은 부자지간이다. 조선조 최대 스캔들을 일으킨 어우동도 성종 때 사람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성종이 얼마나 야행을 즐겼는지 짐작케 한다. 성종은 20여년에 걸쳐 완성한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을 비롯해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을 완성했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10-10 -
집요한 책략가의 딸…어질고 자애롭지만 ‘단명’
장순왕후 1445~1461(17세) ‘압구정동엔 출구가 없다’ 어느 시인의 시집 제목이다. 필자는 매일 지하철 압구정역을 지나다닌다. ‘압구정(狎鷗亭)’은 한명회가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하여 한강변에 지은 정자다. 지금 압구정동엔 압구정이 없다. 갈매기도 없다. 대한민국 대표적 부촌의 대명사, 강남 1번지로 자리매김 한 곳, 고급 패션, 외제차가 넘치고 성형외과가 즐비한 곳이 압구정동이다. 역사에는 위대한 인물이 있고 드라마틱한 인물, 문제적 인물이 있다. 한명회는 후자에 속한다. 사극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할 만큼 캐릭터가 강하다. 드라마, 소설은 평범한 위인보다 자극적이고 절묘한 캐릭터를 선호한다. 역사는 교훈의 창고만이 아니라 재미의 샘이다. 교훈은 숙성이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9-18 -
부왕의 펄펄한 정기 잇지 못하고 스무살에 요절
{image1 center} 예종 1450~1469년(20세) 재위 1년2개월, 1468.9(19세)~1469.11(20세) 형 만한 아우가 없다. 아비만한 자식도 없다. 부는 대물림될 수 있지만 건강은 대물림되지 않는다. 세조의 아픔은 자식복 없음이다. 온갖 공을 들인 맏아들 의경세자 20세 요절, 부랴부랴 둘째 놈을 여덟 살에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그는 즉위 14개월만에 20세로 역시 요절했다. 아비의 펄펄한 정기를 잇지 못하고. 못난 놈들. 창릉에는 세조의 비통이 자욱하게 서려 있다. 모든 생명은 안락을 바라는데/ 폭력으로 이를 해치는 자는/ 자신의 안락을 구할지라도/ 뒷세상의 안락을 얻지 못한다. 허공중에서도 바다 가운데서도/ 혹은 산속의 동굴에 들어갈지라도/ 악업의 갚음에서 벗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9-05 -
아비 업보 지고 요절…세조가 직접 무덤 챙겨
{image1 center} 덕종(의경세자):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맏아들, 1438~1457(20세) 아비의 업보를 지고 꽃다운 스무 살에 종생한 의경세자. 산맥보다 더 듬직한 아버지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특히 해서에 능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세상 이치의 전후를 가늠할 정도가 되자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날이 갈수록 악몽의 강도가 세어진다. “이노옴! 네 아비가 저지른 악행만큼 네가 받아라.” 하얀 소복에 뻘건 핏물을 뒤집어쓴 여인이 칼을 들고 달려든다. 세자는 비명을 지른다. 자리옷은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내관이 들어와 세자를 흔든다. 야윌대로 야윈 세자의 몸은 부처의 고행상처럼 뼈만 앙상하다. 악몽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목을 조르고 사지를 비틀고 가
글=이우상(소설가)/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8-28 -
"전하, 문수동자 만났다는 것 절대 발설치 마십시오"
{image1 center} 상원사로부터 월정사에 이르는 계곡물은 콸콸 거침없이 흐른다. 왕은 호위하는 시종들을 멀찌감치 물리고 홀로 상수리나무 가지를 헤치며 계곡으로 내려간다. 온몸을 뒤덮다시피한 피부병에 정신이 혼미하다. 긁고 긁어서 진물이 나고 딱지가 일어 그 꼴이 처참하다. 누구를 원망할 힘조차 없다. 꿈에 침을 뱉어 이 지경을 만든 형수도, 온 나라를 뒤져 명약이라고 갖다 바친 어의들도 미워하고 호통 칠 힘이 없다. 목덜미를 긁으면 옆구리가 또 가렵다. 손톱에 살점이 묻혀나도록 긁는다. 거추장스런 용포가 나뭇가지에 걸린다. 시종들이 보이지 않는 바위 뒤에 이르러, 화려한 용포를 찢듯이 벗어던진다. 진물 질질 흐르는 알몸이 된다. 중천에 든 여름해가 벌거벗은 왕을 내려 본다. 돌부리를 피해
글=이우상(소설가)/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8-28 -
“나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석곽 사용 말라”
{image1 center} 세조 1417~1468년 (52세) 재위 13년 3개월 1455. 6(39세)~1468.9(52세)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쓰지 말라.” 세조의 유명(遺命)이다. 세조는 1468년 9월 7일 병세가 악화되어 왕세자(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이튿날 수강궁에서 52세로 승하했다. 역사의 영욕과 파노라마, 그 기승전결을 온몸으로 보여 준 이가 세조다. 권력의 잉태와 성장, 소멸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 이가 세조다. 영광과 비난을 한 몸에 듬뿍 받으며 지금 ‘빛나는 무덤(光陵)’에 누워 있다. 그의 유언은 영욕의 생애를 압축한 묘비명 같다. 광릉은 조선시대 440여 년 동안 풀 한 포기 채취도 금지되었을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7-25 -
정순왕후여, 이제 한을 푸소서
{image1 center} 제향을 서둘러 마치자 기어이 하늘이 터졌다. 아침부터 시커멓게 심술인지, 독기인지, 원한인지, 잔뜩 머금고 있던 하늘이 북북 찢어진다. 천둥 번개가 연거푸 으름장을 놓더니 소나기가 쏟아진다. 3월 비 치고는 세차다. 찬비는 이내 우박으로 변한다. 바둑돌만한 우박이 파편처럼 사정없이 내리 꽂힌다. 참반원(제향에 참가한 사람)들은 체면 불구하고 관리소 옆 비닐하우스로 냅다 뛴다. 초대받지 않은 참반원인 나도 총탄을 피하는 전장의 병사처럼 머리를 감싸며 뛰었다. “왕후님이 아직도 원한을 풀지 않았구먼.” “쉽게 풀리지 않겠지. 80평생 수모와 핍박으로 살다가 죽어서도 남편을 300리 밖에 두고 그리워해야하니 오죽하겠는가.” “그러게나. 영월로 천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7-10 -
청령포에 떠도는 외로운 고혼
{image1 center} 단종 1441년~1457년, 17세 졸 재위 3년 2개월 1452.5(12세)~1455.5(14세)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열일곱 살 소년을 철벽 요새 청령포에 유폐시키고 돌아오는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다. 세월은 약이다. 역사는 멀리서 바라보는 드라마다. 당대 복잡한 현실은 접어두고 후대인들의 측은지심 반상 위에 오롯이 놓인 존재가 단종이다. 권력의 묘약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왕위에 올라 항거할 근육도 없는 어린 나이에 이승을 하직했다. 민주주의란 개념이 씨앗조차 없던 시절, 세습 왕조의 희생물이다. 철부지로 맘껏 뛰놀 나이에 무거운 용포를 입고 딱딱한 용상
강지연 기자2007-07-10 -
29년간의 왕세자, 재위 2년 4개월
{image1 center} 문종 1414~1452 (39세 졸) 재위 2년 4개월 1450.2(37세)~1452.5(39세) 문종은 세종의 장자다. 조선 왕조 최초로 적통 장자의 왕위 계승이 실현되었다. 문종은 1414년(태종 14년) 10월3일 한양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며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다. 1421년(세종3년) 10월27일 왕세자로 책봉(8세)되어 1450년 2월22일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시시콜콜 연월일을 밝히는 이유는 그에게 시간은 참으로 애석한 토막토막이기 때문이다. 왕들의 재위 기간과 업적은 비례한다. 재위 기간이 짧은 왕들 몇몇을 살펴보면, 12대 인종-9개월, 8대 예종-1년 2개월, 5대 문종-2년 5개월, 27대 순종-3년 1개월, 6대
강지연 기자2007-06-20 -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글 쓰는 행복 가이 없어라
{image1} 한때 국보 1호를 재지정하자는 논란이 있었다. 그 때 남대문 대신 교체 대상 1호가 훈민정음(한글)이었다. 지금은 흐지부지 되었으나 한글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감격할 노릇이다. 한글만큼 표현 영역이 심화, 광역화, 고등화, 고급화, 다양화된 문자는 없다. 국력과 언어 세력이 약하여 세계에서 힘을 쓰지 못할 뿐이다. 60억 인구 중 남북한 합쳐 7천만 정도만 사용하니 1% 약간 웃도는 세력이다. 언중(言衆)이 5억 명만 된다면 당당한 세계어다. 세종의 위업을 꼽자면 손가락, 발가락이 부족하다. 그 중 엄지손가락의 몫은 한글 창제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는 서로 사맛디 아니할쌔…’ 지금도 달달 외고 있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이것 역시 자다가 깨워도 왼다. 전자가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6-19 -
석가모니를 '석씨'로…불교 탄압 절정
{image1 center} 세종1397~1450년, 54세. 재위 31년 6월. 1418년 8월(22세)~1450년 2월(54세) 완전한 영웅, 무결점의 완인(完人)을 우러르고 싶은 것이 민초들의 욕망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인물은 없다. 그래서 신(神)이란 추상을 조성하기도 하고 부처란 실체 구현에 매달리기도 한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세 살 많은 큰형 양녕대군은 일탈의 극치를 달리다가 폐세자가 되고 한 살 많은 둘째형 효령대군은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제행무상을 통감하고 절로 찾아들어 불교에 귀의했다. 회암사 중수를 건의하고 원각사 조성도감 제조(총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465년엔 ‘바라밀다심경’을 언해했다. 권력에 대한 유혹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5-07 -
업장(業障)은 짧고 과보(果報)는 길다
{image1 center} “아바마마, 아바마마! 태상왕 전하!” 태종의 흐느낌이 침전 밖까지 들린다. 강철 덫에 발목 걸린 맹수처럼 깊고 처절한 울음이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눈물이 용포를 적신다. 내관들은 파랗게 질린 낯빛으로 안절부절못한다. 철벽같은 장애를 두려움 없이 까부시고 권좌에 올라 여기까지 왔는데, 숱한 저주의 아우성마저 환호로 여기며 예까지 왔는데, 내일은 또 어떤 보고가 올라올까. 밤이 이슥토록 용포도 벗지 못하고 앉아 주먹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다.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만든 핏물이 몸을 잠그고도 넘치거늘, 앞날은 캄캄하기만 하다. 이승에 없는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르지만 대답이 없다. 자식을 낳고 키워봐야 어버이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글=이우상(소설가)/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4-24 -
척불의 회오리가 시작되다, 아비를 부정하리라
{image1 center} 3대 태종:1367~1422, 56세. 재위 17년10개월.1400.11(34세)~1418.8(52세) 태종은 대권 재수생 출신이다. 등극 후에도 합격의 영광을 맘껏 누리지 못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치루고 피방석을 깔고 권좌에 올랐다. 왕이 된 이후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방원이 이노옴!’이다. 태종3년(1402)에 일어난 조사의(趙思義)의 난은 아버지 태조가 배후 조종자다. 이성계의 복위를 도모한 반란이다. 태종은 결심한다. 최소한의 도리를 제외하고 아버지를 부정하리라. 마음은 이미 아비를 버렸다. 아비가 귀히 여기는 것이라면 작심하고 능멸하기로 작정했다. 불교를 탄압, 말살하기로 작심한 것도 궤를 같이 한다. 숭유억불은 조선의 건국이념이 아니다. 태조는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4-19 -
왕조의 시작, 여인의 파란만장도 시작
{image1 center} 신덕왕후(? ~ 1396) 능호:정릉 부:곡산 강씨 윤성 모:진주 강씨 자: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녀:경순공주 버들잎 한줌에 운명이 바뀐 여인,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을 250여 년 동안 감당해야했던 여인, 피지도 못한 10대의 아들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여인, 죽어서도 이리저리 찢기고 밟힌 여인, 그녀가 신덕왕후 강씨다. 정릉에는 한이 많다.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다가 편한 무덤조차 갖지 못했다. 문상객 뜸한 초상집 풍경은 처연하다. 고인의 생전 이력, 자손들의 숫자와 사회적 역할에 따라 상가 풍경은 흥청거리기도하고 적막하기도하다. 외따로 떨어진 쓸쓸한 무덤 또한 처연하다. 죽어서조차 옆구리가 시리다. 신덕왕후의 정릉이 그렇다. 조선 왕릉 중 홀로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4-19 -
마음을 비우고 천수를 누리다
{image1 center} 2대 정종 원치 않던 권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칼 날 위에서 그는 훌쩍 뛰어내렸다. ‘대통령 노릇 못해먹겠다?’. 여론을 슬쩍 떠보니, ‘전하, 고정하시오소서!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시오니까. 신들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오니이다.’ 입에 발린 간언을 주유소에서 받은 1회용 휴지처럼 내쳤다. 조선 역대 왕 중 매력 없는 왕의 순위를 매기라면, 정종은 둘째가라면 서럽다. 어딜 둘러보아도 야심, 패기, 술수, 카리스마가 보이지 않는다. 2대 정종이란 묘호가 아깝다. 그래서 묘호를 얻는데 262년이 걸렸다. 40대 초반에 2년2개월 동안 왕위에 있다가 63세에 죽었다. 죽은 후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4-19 -
용의 선택, 용의 분노, 용의 눈물
{image1 center} 건원릉 봉분을 덮고 있는 갈대를 보면 낯설고 섬뜩하다. 죽어서조차 부드러운 잔디 이불을 덮지 못하고 있는 이성계의 운명을 본다. 철침처럼 숭숭 솟은 갈대 아래 태조가 누워 있다. 살아생전 함께 묻히길 원했던 그리운 여인, 계비 강 씨는 저 멀리 정릉에 있다. 창업(創業)은 쉬우나 수성(守成)은 어렵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천하의 맹장 이성계도 권력의 맛을 맘껏 음미하지 못했다. 재위 6년 2개월, 전반기는 개국 창업에 정신이 없었다. 후반기는 업장을 녹이기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또한 개인적 애증에서 자유롭지 못한 중생이었다. 태조는 6명의 부인에게서 8남 5녀를 두었다. 그 중 향처(鄕妻)인 정비 신의왕후 한 씨와 그녀의 소생 여섯 명의 아들(방우
이우상(소설가) ․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4-18 -
원치 않은 곳 그러나 최고 명당에 묻힌 태조
태조 이성계 태조는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늦은 나이에 즉위했다. 물려받은 왕위가 아니라 쟁취한 자리다. 역성혁명을 일으켜 58세에 왕이 됐다.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보면 뒷방 늙은이가 되기에도 늦다. 요즘 세상에도 정년퇴직감 아닌가. 태조 이후에는 10대 청소년기에 즉위한 왕이 13명이나 된다. 이성계는 용맹과 추진력으로 뭉쳐진 인물이다. 지혜와 자비, 반성과 성찰이 보충되지 않았다면 실패한 쿠데타의 주역이 되었을 것이고 조선의 역사는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일개 장수에서 군왕으로 이끈 선지식이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은 고려 공양왕의 왕사 책봉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랫동안 토굴에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성계를 만난 후 그의 삶이 달라진다. 그 역시 고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2007-04-12 -
매장 시효없는 ‘권력’…그들은 죽지 못한다
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죽은 자의 입은 닫혀있지만 산자의 입은 왕성하다. 민가에서 맞는 혈육의 죽음은 곡진한 슬픔마저 태부족이지만 왕의 죽음은 삼엄한 권력이동과 동의어다. 선거는 제로섬 게임이다. 이긴 자는 모든 것을 갖고 진 자는 빈 깡통 뿐이다. 국상은 대선과 같다. 장지 선정, 장례 절차에서 입김이 통하면 출세요, 후왕의 의중을 잘못 파악하면 죽음마저 감수해야 한다. 조정 대신들에게 사활을 건 암투의 계절이 국장이다. 수천 명 민초들에겐 무보수 자원봉사, 피땀 어린 부역의 계절이다. 현직 대통령이 죽으면 국가비상사태다. 계엄령이 선포된다. 10·26때 그런 체험을 했다. 왕의 승하 직전에 계령 즉 계엄령이 선포된다. 왕의 죽음, 국장은 동시대 최고의 국책사업이다. 새로 뽑힌 대통령은 화려한
이우상2007-02-12 -
'조선 왕릉에서 불교를 읽다' 연재를 시작하며
{image1 center} 최상의 법문은 죽음이다. 왕은 권력의 정점이다. 권력의 정점에 앉았던 이들의 죽음은 최상의 법문일까. 죽음 앞엔 누구나 숙연해진다. 하찮은 미물의 죽음 앞에서도 경건해진다. 500년 조선 왕조의 영욕을 온몸으로 받다가 이승을 하직한 왕들의 무덤을 찾아간다. 거기에 그들이 있다. 왕은 죽지 않는다. 아니 죽지 못한다. 육신은 소멸되었으나 그들의 행적은 불멸이다. 잊혀지길 원해도 잊혀질 수 없는 시퍼런 역사로 살아 있다. 피를 동반한 야심과 패기로 권좌에 올랐든, 얼김에 떠밀려서 왕이 되었든 불멸의 이름을 달고 높다란 봉분 이불 아래 누워 있다. 누워있는 그들을 깨워 권좌의 영광과 애환을 들어보자. 생존 당시에는 궐문 앞에도 얼씬거리지 못했을 테지만 이젠 발치까지
글=이우상(소설가)·사진 =최진연(사진작가)2007-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