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꽃이 폭설처럼 흩날리는 오월이다. 아카시아꽃 산사나무꽃 찔레꽃이 서둘러 흰빛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구름은 하늘 높이 노닐고, 청보리밭 뒷산에서는 뻐꾸기가 신록의 숲으로 들어오라고 노래한다. 우리를 부르는 오월의 환한 웃음소리에 어찌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오.
어린이 대공원에는 어린이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이리저리 뛰놀고 있다. 비릿한 연둣빛을 흔들어 깨우는 풋풋한 나뭇잎과 부풀어 오른 장미꽃보다 어린이들의 자유 발랄한 모습이 우리의 가슴을 신생의 설렘으로 부풀게 한다. 유난히 5월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것은 어린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계관 시인 워즈워스(1770~1850)는 무지개를 바라보며 가슴 설렐 때는 어린이를 생각하면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했다. 예수 또한 우리가 어린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어린이는 인생의 무지개라는 것이다.
어린이는 아무 곳에서나 떼를 쓰고, 배가 고프면 운다. 윗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들은 염치나 거리낌이 없다. 딱딱한 예절이나 간교한 속임수를 모른다. 이별의 슬픔도 분단의 아픔도 모른다. 어린이는 순수 그 자체다. 그래서 장자는 참만고일성순(參萬古一成純)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인간은 자고로 순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린이는 대공원에 피어나는 튤립 꽃과 말을 하고, 철장 안에서 목을 길게 내민 기린과도 이야기를 나눈다. 사나운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고, 구불거리는 뱀을 징그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 만난 아이와 공놀이도 함께 한다. 그들에게는 분별이 없다. 꽃과 동물이 나와 다르지 않고, 여자와 남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부잣집 아이나 가난한 집 아이나 놀이터에 나오면 그들은 하나 되어 함께 뛰논다. 지배하는 자나 피지배자의 구분이 없는 일체의 세계. 사람은 누구나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린이는 알고 있다. 삼라만상이 하나라는 것을 그냥 알고 있다.
어린이에게는 죽음도 없다. 말 못 하고 움직이지 않는 인형을 곁에 두고 말을 건다. 인형은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인 것이다. 어른들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사후를 두려워하는 그 마음에는 생과 사의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을 돌아 볼 겨를이 없다. 공원에서 활짝 핀 꽃을 보고 즐거워하는 어린이가 꽃잎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겠는가. 현세가 끝나면 내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것이 오늘을 죽는 것이요, 오늘을 죽는 것이 오늘을 사는 것이다”라고 현재(鉉齋 1919~2012) 선생님은 말했다. 생사는 일여(一如)다. 어린이에게는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가 무용지물이다.
나는 어린이를 바라보면서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떠올려 본다. 어린이들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행동한다. 무엇을 붙잡고 움켜쥐려는 집착 없이 마음에서 이끄는 데로 움직인다. 슬픔, 두려움, 후회 등의 번뇌에 휩싸이지 않으며 죽음이라는 개념은 애당초 없다. 마치 파란 하늘에 구름이 그저 흘러가듯, 머무는 바 없이 마냥 뛰어노는 어린이의 마음. 많은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오월이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