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계종 제14교구본사 범어사
전통과 시대요구 응답하는 범어사 도량
도심형 국립공원과 수행환경 개선 추진
사찰음식 수행가치 생활 체험형 도량화
호국정신 청소년 인성 교육과 연계해야
금정산 자연보전은 생명 존중 수행연장
소통과 공감기반 교구본사 본질적 역할
| 조계종은 24곳의 교구본사를 통해 교구 자치를 실현 중이다. 한국불교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지역에서 전법과 포교에 매진하고 있는 교구본사 주지 스님을 만나 각 교구의 활약과 미래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
조계종 제14교구본사 범어사가 우리나라 첫 ‘도심형 국립공원’ 지정으로 새로운 전환을 맞았다. 선찰대본산으로서 수행과 전법의 도량인 범어사는 이제 국민이 함께하는 열린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금정산의 생태 보전과 더불어 시민이 찾는 힐링 공간으로의 역할 강화에 나선 것. 특히 올해는 사찰음식체험관 개관을 비롯해 템플레킹, 가족문화행사 등 참여형 프로그램을 확대하며 시민들과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시대적 요구에 적극 호응한 결과다.
범어사가 추진하고 있는 변화의 기조와 방향을 듣기 위해 한명우 현대불교신문 대표이사가 주지 정오 스님을 만났다. 대담은 11월 4일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진행됐다.
Q : 취임 2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소감과 그간의 주요 성과를 들려 주십시오.
범어사 주지를 맡은 지도 벌써 2년이 되어 갑니다. 이 기간은 사찰의 전통을 이어 가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직면하고 실현한 시간이었습니다. 방장 스님을 비롯한 소임자 스님들이 함께 정진하고, 신도와 신행단체, 봉사자, 종무원들이 외호해 준 덕분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취임 후 어린이·청년·시민이 사찰에서 불교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배우는 참여형 프로그램의 기반을 차근차근 다져 왔습니다. 말사와의 협력 체계와 성보 및 문화유산 관리 체계를 정비한 부분도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범어사가 국민 모두가 행복을 느끼고 마음을 내려놓고 쉬어 갈 수 있는 ‘선찰대본산’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Q : 범어사는 도심과 가까워 부산 시민들이 자주 찾는 사찰이고, 최근에는 가족 단위 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일상이 바쁘고 힘들기 마련인데, 범어사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찰대본산이라는 말은 본래 ‘내 마음을 찾는다’는 뜻이고, 범어사는 잃었던 자기를 찾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지친 마음이 회복될 수 있는 심신 치유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천혜의 환경을 활용해 시민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고자 합니다. 현재 일주문에서 전각과 숲길, 계곡이 어우러지는 산책로를 정비하고 있으며, 부처님오신날 즈음에는 상사화와 맥문동을 심어 사계절 아름다운 길로 만들 계획입니다.
Q : 사찰음식교육관 개관의 의미와 향후 운영 방향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사찰음식교육관 개관으로 사찰음식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새로운 수행 도량을 열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찰음식은 몸을 지탱하는 음식이자 동시에 마음을 닦는 수행입니다. 방문객들이 이 공간을 통해 생명존중과 상생의 가르침을 직접 체험하길 바랍니다.
또한 범어사는 자체 사찰음식 프로그램 브랜드 ‘비오마인드’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초심자부터 전문 인력까지 단계별 교육과정을 운영해 사찰음식의 철학과 조리법을 올바르게 전승하고, 지역 농산물을 활용함으로써 지역경제에도 보탬이 되도록 할 방침입니다.
Q : 범어사는 역사적으로 호국과 교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날 ‘호국사찰’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계승하고자 하십니까?
임진왜란 당시 범어사도 국청사에서 승병이 훈련받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나섰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범어사 만세운동이 1919년 명정학교에서 시작하는 등 독립운동을 물밑에서 지원했습니다.
한국전쟁 때도 범어사에 야전병원과 유해안치소가 설치되는 등 사실상 ‘현충원’ 역할을 했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2년 전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됐습니다.
이제는 후학들이 이 정신을 이어야 합니다. 교육청과의 협력을 통해 인성교육과 애국심 함양 프로그램을 논의하고 있으며, 현충시설로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고 교육하는 공간 조성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있어야 종교도 있다’는 말처럼, 호국정신을 현재형으로 실천하는 일은 중요한 숙제입니다.
Q : 금정산 국립공원 지정이라는 큰 경사를 맞았습니다.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자연과 공존하는 사찰’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임기 절반 시점에 금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300만 부산 시민의 20년 숙원이 이뤄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산림은 전 국토의 약 63%이며, 그중 약 1%인 5782ha가 사찰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부터 사찰에는 ‘산감’이라는 소임이 있어 산림을 관리해 왔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찰 주변 산림은 그러한 지속적 관리의 결과입니다.
범어사가 없는 금정산은 상상할 수 없듯 금정산과 범어사는 한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멸종 위기종을 포함한 1700여 종 야생생물 하나하나도 우리와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금정산의 자연유산과 범어사의 문화유산이 어우러지고, 그 속에서 시민들이 행복을 느끼는 금정산국립공원이 될 수 있도록 범어사 사부대중도 노력하겠습니다.
Q : 영남불교의 중심으로서 교구본사의 본질적인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구본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소통과 공감입니다. 소통이 안 되면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쌓이면 공동체는 분리됩니다. 본말사가 소통할 수 있는 힘은 곧 인내심입니다.
범어사에는 ‘감인대(堪忍待)’라는 표현이 전해 옵니다. ‘견디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동산 스님께서 강조하신 인욕(忍辱) 수행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참고 견디며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 교구본사의 역할은 이 가르침이 실제 수행과 신행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실천 방안을 찾고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Q : 말사와의 소통·협력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교구본사는 말사가 안정적으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행정·문화·교육 전반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범어사는 종무행정에 관한 도움을 요청하는 말사들에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고 특히 문화유산과 성보관리에 전문성을 더해, 각 말사가 지닌 유산이 올바르게 보존 계승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범어사는 말사와 함께 지역불교의 전통과 자산을 더욱 체계적으로 보존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Q : 수행·문화·교육을 아우르는 도량이 되기 위해 가장 집중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범어사는 불교의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와 호흡하는 변화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천년 고찰이 자리한 자연환경을 지켜 내고 ‘생명과 수행이 함께하는 도량’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사찰음식체험관 운영과 템플레킹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과 불교문화를 나누고, 어린이합창단 창단, 외국인 템플스테이, 성보박물관 운영 등으로 세대와 국경을 넘어선 열린 불교문화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지역과 함께 성장하며, 수행의 뿌리 위에 미래불교의 씨앗을 키우는 도량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Q : 청년세대 포교는 어떻게 실천하고 계십니까?
어린이, 청소년이 불교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제가 소임을 맡고 나서 2024년 12월에 어린이합창단을 새롭게 모집해 현재 50명 규모인데 108명까지 확대할 계획입니다. 성보박물관도 다채로운 어린이 프로그램을 운영해 가족이 함께 참여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청년포교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범어사 행사에 청년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하고 봉사활동 참여 기회도 열고 있습니다. 부산대학교·부산과학기술대학교 등과 협업해 청년세대와 불교문화, 디자인, 인문적 가치를 융합하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청소년과 청년이 곧 불교의 내일’이라는 생각으로 젊은 세대가 주체적으로 불교문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그 길을 함께 가는 것이 범어사의 포교 방향입니다.
Q : 스님께서 그리는 ‘범어사의 미래상’은 무엇입니까?
불교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전하는 방식은 시대에 맞게 새로워져야 합니다. 범어사가 수행·자비·생명존중의 정신을 기반으로, 교육·환경·문화가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불교문화 허브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금정총림 범어사에서 불자와 시민이 함께 수행하고 배우며, 모든 존재가 행복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합니다.
Q : 마지막으로 불자와 시민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감인대’ 정신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실패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낙엽이 썩어 거름이 되면 새싹을 틔우는 자양분이 되듯, 실패도 그 자체가 인연이 되어 때가 되면 반드시 작용합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천천히, 멀리 보아야 합니다. 저는 불자와 시민들이 이 마음을 꼭 새기셨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