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의 아쇼까대왕 유적기행 <11>

아쇼카왕‘佛法 통치철학’
현대 정치인에게도 귀감
지계 지킨 공덕 5가지
현재 수행자들 자문해야
7년 간의 야육왕사 분란
승단 정화의 어려움 전해

아육왕사 터에 있는 동간 아쇼까 석주. 정복 군주면서도 불교에 귀의해 승단을 정화하고, 생명 존중의 통치 철학을 펼친 아쇼까왕의 통치철학은 현대 정치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행실 바른 사람, 죽을 때 허둥대지 않는다
라즈기르에서 파트나까지는 90km로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그러나 인도의 교통 사정을 감안하면 3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파트나는 비하르주의 주도로서 강가강 남쪽에 있는데, 일행이 그곳을 답사하려고 하는 까닭은 거기에도 아쇼까왕 석주가 있기 때문이다.

파트나의 옛 이름은 빠딸리뿌뜨라, 혹은 꾸수마뿌라이다. 한역경전에는 꽃들이 많다고 해서 화씨성(華氏城)으로 나온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왕이 수도를 라자그리하(왕사성)에서 빠딸리뿌뜨라로 천도한 이후 도시는 더욱 번성하게 된다.

마가다국이 멸망하고 마우리아왕조가 인도를 통일한 이후에도 계속 번영했지만 7세기 중반쯤에 순례한 현장은 유적지만 남아 있을 뿐 황폐한 도시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마가다국의 수도 빠딸리뿌뜨라는 원래 ‘빠딸리’라고 불리는 조그만 마을이었던 것 같다. 부처님이 사리불 고향 나란다마을의 망고동산에 머물면서 바라문교를 믿는 주민들을 교화한 뒤, 다시 이동하여 멈추었던 곳이 빠딸리마을이었는데, 그곳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설법을 했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행실이 나쁜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손실이 있다. 첫째는 재산이 크게 줄어든다. 둘째는 평판이 나빠진다. 셋째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면 겁이 나 두려움이 생긴다. 넷째는 죽을 때 괴로워한다. 다섯째는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
이와 반대로 계율을 잘 지켜 행실이 바른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첫째는 재산이 크게 늘어난다. 둘째는 평판이 좋아진다. 셋째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더라도 자신 있게 처신한다. 넷째는 죽을 때 허둥대지 않는다. 다섯째 죽은 다음에 천상에 태어난다."

부처님이 빠딸리마을 사람들에게 왜 계율과 행실을 강조하셨는지 궁금해진다. 계율을 지키지 않아서 행실이 나쁜 사람은 죽을 때 괴로워하고 죽은 다음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이와 같은 설법이 재가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출가수행자들도 자문해 봤으면 좋겠다.

아쇼까왕이 건립한 아육왕사 터 일부. 이곳에서 아쇼까왕은 경전결집, 승단 정화 등 불교 발전에 힘썼다.
아쇼까왕, 삼고초려해 무질서한 승단 정화
일행을 태운 버스는 파트나 시내에 진입하자마자 서행한다. 도로변에는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달동네다. 마을사람들은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듯하다.

대부분 집들의 마당에는 물레가 하나씩 있고, 실제로 작은 잔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잔의 크기로 보아 짜이 잔들이다.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 달달하게 마시는 음료수가 짜이다. 인도를 여행하려면 짜이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그래야 인도의 풍토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행이 지금 답사하려는 곳은 파트나 시내에 있는 쿰나하르(Kumnahar)다. 쿰나하르에는 마우리아왕조의 궁전 터도 있고, 아쇼까왕의 이름을 붙인 아쇼까라마(Asokarama)도 있다. 아쇼카라마를 한역하자면 아육왕사(阿育王寺) 혹은 아육원사(阿育園寺)가 된다. 물론 사원 터만 남아 있을 터이지만 파괴된 아쇼까왕 석주가 있다니 답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육원사에는 6만 명 이상의 수행자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이교도들이 많았다. 이교도들도 노란 색 가사만 입으면 아육원사에 들어와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교도들은 불교수행자들을 비방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매달 한 번씩 갖는 우뽀사따(Uposatha; 포살법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포살법회란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함께 모여 계율을 외우며 장로의 설법을 듣고 자기를 되돌아보는 참회법회인데, 이교도들은 참석하기를 거부하며 법회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불교 장로들은 아쇼까왕 즉위 10년에 더 이상 법회를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목갈라뿟따띳사 장로가 아육원사의 관리를 제자인 마힌다 장로에게 맡기고는 강가강 상류인 아호강가의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이러한 사실은 곧 아쇼까왕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아쇼까왕은 이교도들을 내쫓지 않고 그들과 함께 포살법회를 하도록 명을 내렸다. 왕의 취지는 여러 종교 수행자들이 서로 화합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해 아쇼까왕은 신하를 보내 포살법회를 감독케 하고 왕명을 거부하는 불교 장로는 궁으로 데려와 사형을 시켰다. 나중에는 아쇼까왕의 동생 띳사꾸마라 장로가 잡혀왔다.

신하들이 그를 알아보고 아쇼까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형을 중지시켰다. 아쇼까왕은 동생 띳사꾸마라 장로에게 그간의 사정을 보고 받고는 참회했다.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통치하고자 인도 전역에 8만 4천 개의 사원을 건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법을 전하는 장로들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육원사의 정화는 쉽지 않았다. 마힌다 장로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할 수 없이 아호강가 동굴로 은둔한 목갈리뿟따띳사 장로를 불러오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띳사 장로는 아쇼까왕이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자 그제야 왕의 부름에 응했다. 띳사 장로는 먼저 아쇼까왕에게 7일 동안 설법한 뒤 자신이 제안한 방법으로 아육원사를 정화했다. 먼저 사원 안에 설치된 이교도들의 신상(神像)들을 치웠다. 그러고 나서 모든 수행자들에게 순서에 따라 불법을 물었다.

“가장 온전하고 위없는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쳤는가?”
수행자들의 견해를 들어 본 뒤 이교도들을 가려내어 노란색 가사를 벗기고 흰 옷을 입혀 사원 밖으로 추방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6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당시 승단이 얼마나 무질서했는지 짐작이 간다.

목갈리뿟따띳사 장로가 승단을 정화하고 난 뒤, 그러니까 7년 만에 포살법회는 다시 시작되었다. 아쇼까왕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은 띳사 장로의 공은 승단정화 뿐만 아니라 또 있다. 경전결집이 바로 그것이다. 띳사 장로는 삼장에 통달한 1천 명의 장로들을 선발하여 9달 동안 경전결집을 하였던 것이다.

아육왕사 가는 길에 만난 파트나 주민들. 이제 아육왕사 터 일부는 이들의 생활터전이다.
아쇼까왕, ‘만물 행복 추구’ 생태복지 펴다
답사일행은 버스를 길가에 주차한 뒤 쿰나하르로 입장한다. 안내판에는 파트나 주변의 불교 유적지 사진들과 함께 설명이 영문과 힌디어로 쓰여 있다. 왼쪽으로 몇 십 걸음 걸어가자 동강 난 아쇼까왕 석주가 보호각 속에 누워 있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 다음과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에도 각문은 희미했나 보다.

‘불족석 정사 옆 가까운 곳에 큰 돌기둥이 있다. 높이는 30여 척이고 각문은 흐려져 있으나 그 내용은 ‘아쇼까왕은 신심이 깊어서 세 번이나 잠부주(인도)를 스님에게 보시한 다음 세 번 모두 진귀한 보물을 주고 사들였다.’고 쓰여 있다.’

아쇼까왕 석주 옆에는 마우리아 왕조의 궁전 일부로 추측되는 유적지가 있다. 동서로 8열, 남북으로 10열의 돌기둥이 선 흔적이 보인다. 아육원사로 추정되는 터는 현재 연못이 있는 부근이라고 한다. 그러나 파트나 주민들이 사원 터를 잠식하여 지금은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저 조그만 터에서 어떻게 6만 명의 수행자가 살았겠는가.

천인결집(千人結集)이라고 부르는 제 3차 경전결집을 할 때 1천 명의 장로가 머물렀던 사원 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협소하다. 답사일행은 연못가에 앉아서 아쇼까왕이 왜 전륜성왕으로 추앙받고 있는지 서로 얘기해 본다. 그의 업적은 이렇게 모아진다.

첫 번째는 재위 4년에 목갈라뿟따띳사 장로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이 8만 4천의 법장(法藏)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법문을 듣고는 인도 전역에 8만 4천 개의 사원을 짓기로 결심한 뒤 실제로 그만큼의 전법사원을 건립했다는 점이다. 아육원사도 그때 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회향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종교 간에 화합을 도모하되 부처님 정법으로 승단을 정화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포살법회의 전통을 지속하게 하여 계율정신을 되살렸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자신의 아들(마힌다)과 딸(상가밋따)을 출가시키어 수행케 한 뒤 전법사 자격으로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불교를 세계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남인도와 서인도, 그리스까지 전법사를 파견한 사실로 보아 왕의 신심에 경외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번째는 제 3차 경전결집을 하여 훼손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화하였고 특히 각 부파의 논장을 결집하였다는 점이다. 여섯 번째는 세계 3대 대왕으로 평가되는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대왕과 비교했을 때 정복왕의 면모는 같으나 그들과 달리 통치철학이 있었다는 것인데, 무력을 버리고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모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람과 동물의 행복을 더불어 추구하는 생태복지를 실현한 최초의 제왕이라는 점이다. 기원전 3세기경의 제왕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정치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 아닐까 싶다.

쿰나하르 벤치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인도 젊은이들
쿰나하르는 파트나 시민들에게 공원의 역할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젊은이들이 벤치에 앉아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일행은 마지막으로 박물관에 들러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을 살핀다. 전시된 유물들이 초라하다. 중요 유적들은 모두 주립 파트나박물관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일행은 파트나박물관을 다음에 들르기로 하고 바이샬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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