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의 아쇼까대왕 유적기행 <9>

부처님이 〈법화경〉설한 영축산
왕마저 걸어 올라가 설법 들어
골육상쟁의 빔비사라왕 감옥터
왕의 佛心 진하게 배어 있어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의 향실. 빔비사라왕마저 걸어 오르게 했던 부처님의 위의를 느낄 수 있다.
눈을 떠라, 빛이 보일 것이다
컴컴한 새벽이다. 답사일행은 영축산으로 가는 중이다. 이른 시간에 움직이기로 결정한 것은 영축산에서 좌선하며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영축산은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부처님이 빔비사라왕을 처음 만났던 곳이고, 제자들에게 〈법화경〉 등 많은 경전을 설했던 산이다. 또한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위해하기 위해 돌을 굴린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산 정상에 아쇼까왕 스투파가 있는데, 왜 그곳까지 아쇼까왕이 힘들게 순례했는지 궁금하다.

영축산은 나에게 뜻 깊은 산이다. 15년 전 첫 순례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무렵은 영축산 일대의 치안이 아주 취약할 때였다. 노상강도나 좀도둑이 산속에 숨어 있다가 드문드문 찾는 순례자들을 표적 삼아 피해를 주곤 했던 것이다. 영축산을 지키는 경찰과 동행하지 않으면 위험했다. 나 역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법한 향실로 가는데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그 경찰은 힌두 신자였지만 불교에도 조예가 깊은 것 같았다. 향실로 가는 도중에 그 경찰이 내게 농담을 했다.

“아침마다 나는 붓다가 됩니다.”
“부처님이 된다는 말입니까?”

부처님의 흔적을 찾아 순례하는 내게, 총을 맨 경찰이 아침마다 부처님이 된다고 말하니까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담으로 건넨 그의 한 마디는 내게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홀연히 깨닫게 해주었다.
“아침마다 눈을 뜨니까요.”

나는 반사적으로 ‘아, 그래. 눈을 뜬 분이 부처님이지.’ 하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새롭다.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를 보면 아난이나 가섭 같은 제자들이 부처님을 ‘부처님이시여’라고 하지 않고 ‘눈을 뜬 이여’ 혹은 ‘거룩한 이여’ 하고 불렀던바, 바로 오래된 의문이 해소됐던 것이다.

한편, 나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2천5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에 ‘눈을 뜬 이여’라는 붓다의 의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가 아닐까 싶다. 부처님은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눈을 떠라. 빛이 보일 것이다.’

영축산을 오를 수 있는 빔비사라왕 길. 왼쪽에 구 왕사성 터가있다. 멀리 영축산 정상의 아쇼까 스투파가 콩알만하게 보인다.
향실서 좌선하니 영감이 꽃비 내리듯
영축산 입구에 내리자마자 차가운 산바람이 일행을 맞아준다. 컴컴하여 앞사람을 의지해서 계단을 오른다. 예전에는 좁은 산길이었는데 최근에 잘 정비한 것 같다.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이 길을 올랐다고 하는 기록이 〈대당서역기〉에 있다.

그래서 지금도 이 길을 ‘빔비사라왕 길’이라고 부른다. 왕이 부처님을 궁성으로 부르지 않고 친히 산길을 걸어올라 가서 설법을 들었다고 한바 부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더구나 구 왕사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영축산에서 부처님이 사셨던 것을 보면 빔비사라왕과 대신들이 얼마나 부처님을 우러러 의지했는지 이해가 된다. 보통사람들은 왕궁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서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산기슭에서 산꼭대기까지 돌을 이용해 계단을 만들었다. 넓이는 10여 보, 길이는 5, 6리나 되었다. 가는 길 도중에 2개의 작은 스투파가 있었다. 하나는 하승(下乘)이라 하는데 왕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는 곳이다. 또 하나는 퇴범(退凡)이라 하는데 범부와는 더 이상 함께 오르지 못하는 곳이다. 산꼭대기는 동서가 길고 남북은 좁다. 벼랑 서쪽에 벽돌로 된 정사가 있는데 동쪽으로 문을 열어놓고 있다. 여래가 옛날 여기서 설법하는 일이 많았다. 정사 동쪽에는 길쭉한 돌과 큰 돌들이 있다. 데바닷타가 깨뜨리려 한 돌들이다. 그 남쪽 벼랑 아래 스투파가 있다. 그 옛날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했던 곳이다.’

〈법화경〉 뿐만 아니라 〈관무량수경〉, 〈보적경〉, 〈대집경〉, 〈허공장경〉 등을 설했던 영산회상이다. 일행이 독수리봉에 이르자, 먼동이 트면서 산자락의 바위와 나무들이 희미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어둠이 물러가는 자리마다 안개가 자욱하다. 향실 계단을 한 줄로 걸어 오르는데 어떤 기운이 한 줄로 서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 한 줄기 짙은 안개가 흐르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일행에게 향실을 비워주듯 내려간다.

일행은 어느 정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한글 〈반야심경〉을 왼다. 그런 뒤 그 자리에  앉아서 좌선을 한다. 나는 눈을 뜬 채 새벽별을 응시하며 무념 속으로 몸을 던진다.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의 소식을 듣는다. 내가 없어지는 순간 머릿속이 헹구어진다. 낡은 뇌의 분자구조가 새롭게 진화되는 것 같다.

영축산 향실 불단에 올린 공양물들
하늘에서 꽃비 내리듯 영감이 샘솟는다.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들이 단번에 풀어지는 느낌이다. 교육학 용어를 빌자면 지능지수가 1백 정도는 상승한 기분이다. 두루뭉수리하게 표현하자면 좋은 기운으로 내면이 충만해진 것이다. 불제자가 아니라면 고개를 갸웃뚱하겠지만 부처님께서 설법한 장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믿는다. 1천3백여 년 전에 영축산을 순례한  중국의 구법승 의정의 시가 떠오른다.

영축산 봉우리 올라서서
옛 왕성 내려다보니
만년이나 흘러내린 못은 맑고
천년 지난 그 뜰은 깨끗하건만
옛 일 새겨주는 빔비사라왕의 길
부서져 남은 왕성의 지난날 영화
칠보의 선대는 사라지고
하늘 꽃비 내리던 빗소리 멈추었네.

영축산 향실에서 내려다보이는 마가다국 구 왕사성 터는 너른 분지에 잡목만 우거져 있다. 향실에 있었다던 칠보의 선대(仙臺) 역시 사라지고 없다. 그러고 보니 1천3백여 년 전 의정이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져 있지 않다.

빔비사라왕 사랑을 추모한 아쇼까왕 스투파
마침내 독수리봉 뒤쪽에서 망고 같은 해가 떠오른다. 한역경전에 나오는 암라과(菴羅果) 같은 아침 해다. 일행은 향실을 마냥  차지할 수가 없어서 흰색 법복을 입은 태국불자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향실을 지키는 인도인에게 아쇼카 스투파를 묻자 영축산 정상을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정상에 있는 스투파가 콩알만 하게 보인다.

최근에 흩어진 벽돌을 모아 복원한 거라고 한다. 그런데 향실 쪽에서는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한다. 오른편 산자락에 있는 일본절 묘법사에서는 20여 분 거리라고 하는데 그쪽으로도 건너갈 수가 없다. 영축산 입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도곡거사를 통해서 아쇼까왕 스투파에 대한 자료만 받고 설명을 듣는다.

스투파는 원래 빔비사라왕의 두 번째 부인 비데히(Vaideh; 韋提希)의 묘였는데 아쇼까왕이 그 자리에 스투파를 조성했다고 한다. 왕위를 탈취하자는 데바닷타의 꾐에 빠진 아들 아자타사투에게 죽임을 당한 빔비사라왕과 그의 부인 비데히를 추모하여 스투파를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축산 독수리봉 바위와 오색의 룽가
빔비사라왕이 아들 아자타사투에 의해 감옥에 갇히자, 비데히는 몸에 우유와 꿀로 반죽한 쌀가루를 바른 채 면회를 가서 왕의 목숨을 연명시키려다 형리에게 발각되어 후궁에 갇힌 채 그녀 역시 굶어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녀에게 〈관무량수경〉, 즉 극락에 태어나는 여러 가지 수행 방법을 설하여 죽음을 두렵지 않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데히 부인뿐만 아니라 코살라국의 파세다니왕의 누이인 코살라 데비, 즉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의 첫 번째 부인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전한다. 아자타사투의 정권 탈취는 빔비사라왕의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을 죽게 한 큰 비극이었던 셈이다.

특히 첫째 부인이 죽자, 마가다국과 코살라국 간에는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혼인동맹으로 코살라국의 공주 코살라 데비가 혼수감으로 가져갔던 카시마을(현 바라나시)을 코살라국 파세다니왕이 몰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번의 공방 끝에 화해를 하고 다시 혼인동맹을 맺었는데, 파세다니왕이 자기 딸을 아자타사투왕에게 보내면서 혼수감으로 카시마을을 되돌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영축산에 머물 때만 해도 마가다국이 인도천하를 통일하지 못하고 16개국이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각축전을 벌였던 것 같다.

일행은 영축산을 내려와 구 왕사성 중간쯤에 있는 빔비사라왕 감옥터를 들른다. 빔비사라왕의 불심이 진하게 배어 있는 유적지다. 음식을 일체 주지 않는데도 빔비사라왕이 목숨을 이어가자 아자타사투가 이상하게 여기고 그 이유를 물었던바 왕이 “저 열린 창문으로 부처님을 날마다 뵙고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자타사투는 영축산이 보이지 않도록 창을 벽돌로 막아버리고 부왕이 일어설 수 없게끔 발목을 잘라버렸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감옥 터에서 보니 영축산 봉우리가 비쭉 보인다. 도곡거사는 이곳을 쉰 번쯤 들렀다며 웃는다. 어깨들 말을 빌자면 별을 쉰 개나 단 셈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추가할지 모르지만 지금 내가 단 별은 다섯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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