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쇼까대왕 유적답사<1>

고대 인도불교를 알기위해
아쇼까 연구는 필수 과제

부왕사망 왕장의 난 평정 등극
전쟁참상 목겨 정법 통치 서원

델리국제공항 부근에 있는 호텔에서 잠자는 흉내만 내고 일행은 컴컴한 새벽에 버스에 오른다. 동인도에 위치한 도시 부바네스와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새벽 5시 50분 비행기라고 하니 수속을 마치려면 출발 2시간 전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버스는 불빛 들이 가물가물한 공항 쪽으로 은밀히 잠입하듯 달린다. 긴 타월을 붕대처럼 머리에 두른 운전기사만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다.

아쇼까왕의 유적을 찾는 첫날 일정부터 강행군에 들어간 셈이다. 답사일행 중에 몇 명은 이미 소임이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곡성 관음사 주지 대요스님은 원만한 답사를 위해 기도와 법문을 맡고, 경희대 양덕춘 박사와 서울예술대 윤제림 시인, 그리고 나와 아제여행사 대표 도곡거사는 변하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행선지를 점검하기로 한 것이다.

부바네스와르는 인구 4천만인 오릿사주의 주도(州都)로서 8백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라고 한다. 일행이 부바네스와르로 먼저 가는 까닭은 아쇼까왕이 전투를 벌인 깔링가 전장 터를 답사하기 위해서다. 아육왕(阿育王), 혹은 천애희견왕(天愛喜見王)으로 불리는 아쇼까왕이 부처님 법으로 세상을 통치하고자 맹세한 곳이 바로 깔링가 전장 터였음이다.

비행기 좌석에 파묻혀 부족한 잠을 청하지만 아쇼까왕에 대한 여러 상념들이 떠올라 자꾸만 눈이 떠진다. 할 수 없이 잠을 포기하고 카메라가방에 넣어온 호진스님이 번역한 책 <아쇼까왕 비문(碑文)>을 꺼내 본다. 책 뒤편에 실린 세 편의 논문 중에서 스님이 쓴 글부터 먼저 읽어본다.

‘기원전 2세기에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 3대 왕으로서 인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아쇼까는 한 사람의 통치자로서 뿐만 아니라 고대인도의 종교, 사상, 문화, 역사, 사회, 경제 심지어 고고학, 언어학, 법률 분야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아쇼까는 고대 인도불교와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갠지스강변의 작은 신흥종교였던 불교가 전인도뿐만 아니라 인도 바깥에까지 전해져서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직간접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인도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아쇼까 연구는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도입부 문장 가운데 아쇼까왕의 영향으로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는 구절에서 눈길이 멈춘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아쇼까왕이 없었다면 불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한 채 인도에서 소멸했을지도 모른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아쇼까왕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부처님 정법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아쇼까왕의 존재가 새삼 위대하게 다가온다. 부처님이 정법을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내 보여주신 분이라면, 아쇼까왕은 정법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외호한 위인인 것이다.

아쇼까왕, 어린 사미승에게 <법구경> 설법을 듣고 귀의하다

기원전 329년, 알렉산더는 네팔의 국경지방인 삡팔라바나에서 찾아온 한 젊은 장수를 만났다. 마우리아족인 그는 동인도 깔링가 지역을 본거지로 해서 세력을 확장했던 난다왕국을 멸망시키겠으니 군대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난다왕국은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가장 강력했던 마가다왕국을 멸망시키고 나서 20여 년간 왕조를 유지하다가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탓에 민심이 흉흉한 왕국이었다.

펀잡과 인도서북 지역을 정복한 알렉산더는 젊은 장수의 청을 거절했다. 알렉산더는 들어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인도를 정복하는 동안 자신의 군대가 풍토병과 독충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권위를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오히려 젊은 장수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을 언도했다. 그러자 그는 천신만고 끝에 정글로 도망쳐 나와 목숨을 구했다. 이후 와신상담하던 젊은 장수는 뜻밖의 기회를 잡았다. 알렉산더가 인도서북 지역을 정복한 지 1년 만에 주력부대를 점령지에서 철군시킨 뒤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젊은 장수는 점령군에게 핍박을 받던 인도서북 사람들을 선동하여 인도에 남아 있던 알렉산더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젊은 장수는 그 여세를 몰아 펀잡과 인도서북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파죽지세로 난다왕국을 멸망시키고 인도 전역을 정복해 갔다.

그 젊은 장수가 바로 아쇼까의 할아버지이자 마우리아왕국을 세운 짠드라굽타이다. 짠드라굽타는 마우리아왕국을 24년간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군대는 인도의 어느 왕조보다 강했다. 60만의 보병과 3만의 기병, 그리고 9천의 코끼리부대를 보유했다. 알렉산더에 이어 기원전 305년에 그리스의 셀레우쿠스가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공격은커녕 점령한 인더스강 주변의 땅을 되돌려주고 짠드라굽타와 혼인동맹을 맺고 퇴각할 정도였다.

마우리아왕국의 제 2대왕은 짠드라굽타의 아들인 빈두사라였다. 빈두사라 역시 무력정복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영토는 더 넓어져 중앙인도와 데칸고원까지 내려갔다. 제국이 된 영토를 분할통치하기 위해 그는 많은 왕자를 두었다. 16명의 부인을 맞아들이어 101명의 왕자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첫째 왕자인 태자는 수마나 혹은 수시마로 불렸고, 맨 마지막 왕자는 띳사였다. 띳사의 어머니는 또 한 명의 아들을 띳사보다 먼저 낳았는데 그가 바로 아쇼까였다. 아쇼까는 어린 시절에 성격이 몹시 거칠었으므로 빈두사라의 눈 밖에 나 왕궁에서 살지 못했다.

아쇼까는 장성해서도 빈두사라의 눈에 들지 못했다. 태자인 수마나 총독이 다스리는 펀잡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빈두사라는 수마나를 왕궁으로 불러들인 뒤 아쇼까를 보냈다. 군사를 지원해 주지 않은 채 사지로 보낸 셈이었다. 그러나 아쇼까는 민심을 얻어 반란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으므로 대신들의 신뢰를 얻었다.

빈두사라가 죽자, 웃제니 지방을 다스리던 아쇼까 총독은 마우리아왕국의 수도인 빠딸리뿌뜨라로 올라가 99명의 이복형제 왕자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4년 동안 살육이 끊이지 않는 왕자의 난이 벌어진 것이다. 살아남은 왕자는 친동생 띳사뿐이었다. 그런데 띳사는 아쇼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가해 버린다.

마침내 아쇼까가 왕위에 등극하는 대관식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호의호식하는 바라문들을 혐오하고 있던 아쇼까는 당당하게 길을 걸어가는 어린 사미승의 모습에 반하여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사미승은 바로 자신의 조카 니그로다였다. 수시마 태자가 타살당할 때 임신한 태자비가 천민들이 사는 마을로 도망쳐 낳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쇼까는 12살 니그로다 사미에게 <법구경> 중에서 ‘열반으로 가는 길과 윤회로 가는 길’이란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불법에 귀의했다. 그리하여 불교수행자들은 아쇼까왕의 외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깔링가 전장 터에서 정법으로 세상을 통치하겠다고 맹세하다

지도를 펴보니 비행기는 인도 동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부바네스와르가 인도의 시성(詩聖) 타골이 성장한 벵골주 밑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2시간 30분쯤 인도의 하늘을 날았을까. 어느새 비행기는 부바네스와르공항에 착륙하고 있다. 공항은 우리나라 광주공항만한 크기이고 한적하다. 활주로에 잡초가 자라고 있을 만큼 이착륙하는 비행기 편수가 많지 않은 것 같다. 버스터미널처럼 허술한 공항을 빠져나온 일행은 무료하게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바로 깔링가의 다울리 언덕을 향해서 달린다. 릭샤와 어슬렁거리는 소들이 뒤엉킨 부바네스와르 시가지를 벗어나 서쪽 방향으로 먼지 풀풀 날리며 시골길을 한동안 달리자 활처럼 굽은 강이 하나 보인다. 마하나디강의 지류 중 하나인 다야강이다. 전술을 모르는 나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강을 사이에 두고 큰 전투가 벌어졌을 법한 지형이다. 이곳이 바로 아쇼까왕이 재위 8년에 대군을 거느리고 전투를 직접 지휘했던 곳이다.

불법에 귀의한 아쇼까왕은 왜 깔링가 전쟁을 치러야만 했을까? 깔링가 지역은 짠드라굽타 재위 때부터 점령하지 못한 땅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우리아왕조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깔링가왕조 정복은 오래 전부터 숙원사업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마우리아왕국이 동남아 국가나 스리랑카와 해로를 통해 교류하는 데 있어서 깔링가 지역은 관문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어쨌든 지리적으로 깔링가는 마우리아왕국의 수도 빠딸리뿌뜨라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는 데다, 동인도 소국들 중에서 가장 강했던 왕국이었기 때문에 정복이 용의치 않았을 터이다.

아쇼까는 주력부대를 둘로 나누어 깔링가를 공격했다고 한다. 한 군대는 수도 빠딸리뿌뜨라에서 배에 군사를 실어 갠지스강을 타고 꼴까타까지 왔다가 남진을 시켰고, 또 한 군대는 육로를 이용하여 깔링가 배후를 치는 전술로 공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사상자로 인해 다야강 강물은 피로 물었다고 한다. 군사는 물론이고 수행자와 백성들까지 10여 만 명이 죽고, 15만여 명이나 깔링가왕국의 군사가 포로로 잡혔으며 수십 만 명이 실종되었던 것이다. 결국 깔링가 전쟁은 아쇼까의 마음을 바꾸게 한 계기가 됐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아쇼까는 다야강에 칼을 버리고 부처님 법으로 세상을 통치하겠고 결심했던 것이다.

이윽고 다울리 언덕 앞에서 내린 답사일행은 아쇼까왕이 깔링가 사람들을 위해 칙령을 새기게 한 바위 앞에 선다. 코끼리 머리가 조각된 바위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관광객들이 삼삼오고 드나들고 있다. 작은 고깔처럼 생긴 주황색의 빠또리아 꽃들이 주렁주렁 피어 있고, 바위 앞에는 이파리가 아쇼까의 칼처럼 생겼다고 해서 아쇼까트리라고 불리는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계속>

글ㆍ정찬주 사진ㆍ아일선

 

<연재를 시작하며>

인도의 부처님 성지를 지금까지 5번 순례한 것 같다. 그런데 매번 인도를 다녀오면서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기원전 3세기 때 아쇼까대왕이 부처님 성지를 친히 참배하면서 세운 석주를 주의 깊게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부처님 성지에 세워진 아쇼까 석주를 정법의 등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아쇼까대왕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쇼까대왕은 석주뿐만 아니라 바위에 칙령을 새기어 불법을 전하고 수호하고자 한 바, 이 연재는 아쇼까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부처님의 정법이 무엇인지, 아쇼까대왕이 어떤 연유로 불법에 귀의하였는지를 얘기해 갈 것이다. 또한 아쇼까대왕이 계율에 근거해서 승단을 정화하고, 왜 수행자를 우대하고 외호하였는지, 제 3차 결집을 한 의의가 무엇인지, 왜 전법사를 스리랑카나 멀리 그리스까지 보냈는지를 밝힐 것이다. 이 연재로 인도의 부처님 성지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독자들의 신심이 증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현장사진은 수덕사 템플스테이 팀장인 아일선님이 수고할 것이다.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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