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의 아쇼까대왕 유적기행 <16>

동문 좌우 석주, 인도 유일 양식
기원정사 최초 건물터 간다쿠티
아쇼까 스투파들 흔적만 아쉬워
부처님 이적 기린 ‘천불화현탑’
신통은 방편… 이성적 사유해야

아쇼까왕이 부처님의 이적을 보인 것을 기려 조성한 천불화현탑. 그러나 부처님은 방편으로 신통을 보이신 것일 뿐 이성적 사유를 강조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답사일행을 태운 버스는 부처님이 교화를 펼쳤던 꼬살라국의 수도 쉬라바스티로 향해서 달리고 있다. 쉬라바스티의 옛 이름은 사왓티이고 한역으로는 사위성이다. 그런가 하면 현장은 쉬라바스티를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이라고 음역했고, 고 이기영박사는 ‘실라벌’을 신라의 국호와 연관시켜 보기도 했다. 운전수에게 쉬라바스티 도착시간을 물어보니 밤 9시쯤이라고 말한다. 나는 일행을 위해 차내 마이크를 잡는다. 순례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도 되고, 아쇼까왕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였던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팔상록〉을 참고하여 설명하기 위해서다.

강의한 지 1시간이 지나자 조는 사람이 생긴다. 차창은 어느 새 캄캄하다. 시골길을 간간히 달리는 차들의 불빛만 지나치곤 할 뿐이다. 나는 고지식하게 강의를 계속한다. 그래도 양덕춘 교수는 녹음기를 들고 있고, 범선거사 부부는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다.

강의하는 동안 문득 경봉 큰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큰스님께서는 진리의 말이 귀에 스치기만 해도 여래장에 들어가 결국에는 깨달음의 꽃을 피운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2시간 동안 강의하고 나니 버스는 예상시각보다 빠르게 쉬라바스티 부근에 들어서고 있다.

1시간 정도 단축한 시간이다. 답사는 또 다시 내일 아침 짙은 안개 속에서 시작할 것이다. 인도에 와서 가장 먼저 친숙해진 것이 있다면 안개와 먼지다. 그것들과 동행하면서 답사와 순례를 나섰다가 컴컴한 밤이 되면 숙소에 들곤 했던 것이다.

답사단이 부처님이 머무셨던 간다쿠티 뒤쪽에서 좌선하고 있다.
진리의 법륜상과 소 형상의 아쇼까왕 석주
현장이 순례를 왔을 때 사위성은 이미 황폐한 상태였던 것 같다. 〈대당서역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실라벌실저국은 주위가 6천여 리인데 성은 황폐하고 경계 또한 분명치 않다. 20여 리 되는 궁성 건물의 유적은 허물어졌지만 그래도 성 안에 주민은 살고 있다. 농작이 풍성하고 기후가 좋다. 풍속은 순박하고 학예에 열심이며 복업 짓는 데 힘쓰고 있다. 가람은 수백 채 있으나 무너진 곳이 대단히 많다. 승도는 적으며 정량부를 학습하고 있다. 천사(天嗣)는 1백여 군데이고 외도를 믿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외도란 바라문교일 것이다. 가람이 수백 채이나 무너진 곳이 많다고 한 기록을 참고해 볼 때 사위성에서의 불교는 벌써 기울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신분제도를 불문율로 삼는 바라문교가 남녀평등과 신분타파를 주장하는 불교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왕도(王道)와 법도(法道)의 균형이 깨진 셈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사는 21세기도 왕도와 법도는 형태만 달라졌을 뿐 두 길의 갈등은 여전한 것 같다. 전제국가에서 민주국가로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기득권층과 소외계층의 상생은 요원하기만 한 것이다.

쉬라바스티의 아쇼까왕 석주는 기원정사 동문 좌우에 있었다고 한다. 동문 좌우에 세운 독특한 형식은 인도 전역에 있어서 유일한 듯하다. 역시 〈대당서역기〉의 기록이다.

‘동문 좌우에는 각기 높이 70여 척 되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왼쪽 기둥은 그 끝에 고리모양이, 오른쪽 기둥 끝에는 소 형상이 조각돼 있다. 모두 아쇼까왕이 세운 것이다. 정사들은 붕괴된 채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인데 다만 한 벽돌건물만이 견고하게 홀로 남아 있다. 그 안에 불상이 있는데 여래가 33천에 올라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고 돌아오는 사이에 승군왕(勝軍王; 쁘라세나짓왕)이 조성한 것이다.’

동문 왼쪽에 세웠다는 석주의 형식이 특이하다. 고리모양이란 법륜상(法輪相)이라고 짐작된다. 이와 같은 법륜상이 단순화되어 일원상으로 변모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오른쪽의 석주 상단의 소 형상도 관심을 갖게 한다. 룸비니는 말, 사르나트와 바이샬리는 사자, 라즈기르는 코끼리를 조각하여 석주 상단에 얹혔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행은 기원정사로 간다. 예상한 대로 안개가 일행을 포근하게 맞이해 준다. 일행은 기원정사 유적지의 남서쪽에 난 문을 통해서 입장한다. 아쇼까왕이 동문 좌우에 석주를 세운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동문이 가장 규모가 큰 정문이었던 것 같다.

목련존자가 신통력으로 보드가야에서 가져온 아난다 보리수. 그 앞에 티베트 스님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아쇼까왕 참배한 아난다 보리수와 천불화현 터
일행은 아난다 보리수 앞에서 참배를 한다. 아난다 보리수라고 불리게 된 까닭은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허락을 받고 심은 보리수이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부처님은 우안거(雨安居)를 보내고 나면 반드시 영축산이나 꼬삼비, 바이샬리 등으로 떠나 설법을 했다. 이에 꼬살라국의 왕과 백성들이 아난다를 통해서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무엇을 보고 참배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당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것 중에는 보드가야의 보리수도 그 하나라고 말씀했다. 당신이 사용하는 발우, 정각을 이뤘던 보드가야의 보리수, 당신의 사리를 봉안한 탑, 등상불(等像佛) 등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에 신통제일의 목련존자가 보드가야에서 보리수 가지를 가져왔고 아난다의 주관 아래 쁘라세나짓왕과 많은 신도들이 참여하여 성대한 식수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물론 부처님께서도 기원정사에 계실 때는 아난다 보리수 밑에서 선정에 들곤 했다고 전해진다. 이른 아침이지만 아난다 보리수 앞에는 인도 수행자와 신자들이 모여 앉아서 기도하거나 경전을 읽고 있다. 흰옷을 입은 동남아 신자도 보인다. 인도 수행자나 신자들은 아난다 보리수를 부처님이라고 믿는다고 한다. 기원정사에 들른 아쇼까왕도 아난다 보리수를 부처님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아난다 보리수 옆에서 발굴된 2개의 스투파는 흔적만 남아 있어 아쇼까왕이 직접 조성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행은 수닷타 장자가 부처님을 위해 건립한 간다쿠티(Gandhakuti; 香殿)로 향한다. 간다쿠티가 기원정사의 최초 건물이었을 터이다. 간다쿠티에도 수행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기도하고 있다. 5세기 초(407년 무렵)쯤 기원정사에 왔던 법현의 기록을 보면 간다쿠티는 원래 7층 건물이었는데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그런데 큰 화재에도 불구하고 쁘라세나짓왕이 조성한 전단나무 불상은 무사하여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2층 벽돌건물을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그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현장의 증언대로다.

간다쿠티 앞에는 우물이 있다. 현장이 ‘여래가 재세 중에 물을 긷던 곳이다’라고 기록한 바로 그 우물이다. 그리고 우물 옆에는 아쇼까왕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조성한 스투파가 있었다고 하는데, 스투파의 흔적이 여러 개나 돼 어느 것이 아쇼까왕이 조성한 스투파인지 불분명한 게 아쉽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아쇼까왕 석주와 동문은 부처님 우물 쪽 방향에 건립됐을 것 같다. 사위성을 오가는데 있어서 직선거리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일행은 간다쿠티 뒤쪽 부처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보리수 그늘에서 좌선삼매에 든다. 현장은 아쇼까왕이 조성한 스투파에 부처님 사리가 봉안돼 있어 ‘명계(冥界)의 신이 경위하고 신비로운 조짐이 가끔 일어나는가 하면 하늘의 음악이 연주되기도 하고 신묘한 향기가 나는 일도 있어 큰 복덕의 징표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일행은 기원정사 참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뒤, 국내에 일이 생긴 대요스님과 작별하고 오후에는 기원정사에서 2km쯤 떨어진 거리에 있는 옛 사위성 터로 답사를 나간다. 가는 도중에 살인마였던 앙굴리마라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곳에 조성한 스투파와 수닷타 장자 집터에 벽돌로 쌓은 스투파를 둘러본다.

두 개의 스투파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스투파의 주인공인 앙굴리마라와 쁘라세나짓왕의 아들 제타(Jeta)태자에게 동산을 사들인 뒤 간다쿠티를 지어 무주상보시한 수닷타 장자의 얘기는 생략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온갖 종교가 난무하는 오늘 앙굴리마라를 통해서 정법이 무엇인지 상기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바라문이 젊은 청년제자인 앙굴리마라가 자신의 아내와 치정이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고는 100명을 살인하도록 지시하여 파멸에 이르도록 한 반면에 부처님은 어리석음을 참회케 하고 ‘그대가 바로 부처이다’라는 여래장(如來藏)의 진리를 깨닫게 하여 앙굴리마라를 아라한으로 거듭나게 했기 때문이다.

답사단이 황폐한 사위성 터를 살펴보고 있다.
일행은 벽돌 조각들이 뒹구는 옛 사위성 터를 둘러보고 나서 사탕수수밭이 펼쳐진 들판을 가로질러 아쇼까왕이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천불화현탑으로 이동한다. 그러고 보니 오후 시간 내내 옛 사위성 터를 답사했던 모양이다.

석양이 벌써 천불화현탑 너머로 지고 있다. 잘 알다시피 천불화현(千佛化現)이란 자이나교를 비롯한 이교도들의 텃세가 심해지자, 부처님이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마지못해 이적을 보이신 내용이다. 사위성의 쁘라세나짓왕과 이교도들이 모인 망고동산에서 부처님이 동산지기에게 받은 망고를 잡수신 뒤 그 씨를 땅에 심어 순식간에 망고나무가 솟아오르게 했고, 부처님 몸에서 천분의 부처가 나투는 신통을 보이셨던 것이다.

그런 뒤 부처님께서는 홀연히 도리천으로 올라가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는 방편으로 잠시 이적을 보이셨을 뿐 이성적인 사유를 강조하셨으므로 신통에 현혹돼서는 안 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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