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쇼까 대왕 유적기행<3>

진흥왕·광개토대왕이 닮고자한 왕
'대당서역기' 아쇼까탑 조성 기록
라트나기리 승가림 밀교 수행 교육
아직도 발굴 진행, 출토물 걸작 평가

라트나기리에 남아있는 아쇼까 스투파와 석굴 유적. 인도의 대승불교가 소멸하고 힌두교로 건너간 역사의 공간 라트나기리에는 깨진 부도와 탑들이 뒹글고 있었으나 당시 불법의 향취로 마을이 고사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나를 보고 왜 아쇼까왕의 유적을 답사하는가 하고 묻는 분이 있다. 답사의 명분이 궁금하다는 것인데, 나와 혹은 우리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일 터이다. 불교를 믿지 않는 분의 궁금증은 더하다. 당연히 일리가 있는 질문이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불교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이니까 4세기 후반이므로 기원전 3세기 때 활동한 아쇼까왕은 우리와는 역사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아쇼까왕이 그리스나 스리랑카 등 세계 각국으로 전법사신을 파견하였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때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어느 땐가 나는 <삼국유사>를 보고 몹시 흥미를 느낀 적이 있다. 아쇼까왕의 그림자가 우리 불교사에도 드리워져 있던 바, <삼국유사> 탑상편 ‘황룡사 장육존상’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였던 것이다.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553) 2월에 대궐을 용궁 남쪽에 지으려는데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에 절로 삼고 황룡사라 했다. 30년(569)에 담을 쌓고 17년 만에 겨우 완성했다. 얼마 안 가서 바다 남쪽에서 큰 배 한 척이 떠와서 하곡현 사포(현 울주 곡포)에 닿았다. 이 배를 검사해보니 공문이 있었다. 인도 아육왕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의 불상 셋을 주조하려다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어 달라’고 축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얘기는 아쇼까왕(아육왕)이 마치지 못한 불사를 신라 진흥왕이 완성했다는 점과 인도불교가 신라로도 들어왔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전설이 분명해 보였지만, 그때 이미 진흥왕은 아쇼까왕을 자신이 닮고 싶은 제왕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왕은 영토를 정복해 나가는 위업이나 불법으로 통치하려 했던 통치구상이 흡사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광개토왕도 아쇼까왕을 흠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역시 <삼국유사> 탑상편 ‘요동성육왕탑’에 나오는 얘기를 보니 그렇다. 여기서 육왕(育王)이란 아육왕을 줄여서 한 말이므로 아쇼까왕이다. 광개토왕이 요동성을 정복한 뒤 신하들과 순행하다가 아쇼까왕이 세운 불탑 자리를 발견하고는 신앙심이 생겨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했던 곳마다 아쇼까 스투파가 세워지다
우리는 부처님 8대 성지, 혹은 그에 버금가는 성지에만 아쇼까왕이 순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보면 부처님이 법을 설했던 곳이라면 어디든 아쇼까왕이 찾아가 스투파를 조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행이 힌두스탄호텔에서 1박을 한 뒤 답사하려고 나서는 라트나기리(Ratnagiri), 우다야기리(Udayagiri), 그리고 랄리타기리(Lalitagiri)는 일찍이 부처님이 와서 설법한 곳인데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10여 군데의 아쇼까 스투파가 실재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오다국(烏茶國, 오릿사주 북부)은 주위가 7천여 리이며 나라의 대도성은 20여 리로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이 성대하다. (중략) 가람은 1백여 군데로 승도는 1만여 명인데 모두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천사(天祠)는 50여 군데로 이교도들이 잡거하고 있다. 스투파는 10여 군데로 모두 여래가 설법했던 곳이며 아쇼까왕이 세웠던 것들이다.’

   
     
순례단이 법회를 보고 있는 라크나기리 석굴
라트나기리는 부바네스와르에서 북동쪽으로 90km, 커텍으로부터는 70km 떨어진 거리에 있단다. 일행이 굳이 우리 불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라트나기리로 가려고 하는 까닭은 그곳이 앞서 얘기한 대로 부처님과 인연이 있고 아쇼까왕이 스투파를 세웠던 지역이기도 하거니와 인도 대승불교가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불꽃을 피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동인도에서 대승불교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8세기 중반(750)부터 약 250년간 존속한 팔라왕조 때라고 한다. 팔라왕조는 수도가 빠딸리뿌뜨라였고, 동인도의 벵갈과 깔링가까지 영토를 넓혔다고 전해진다. 동인도 최대의 불교대학인 비크라마쉴라사원도 팔라왕조 제 2대 다르마팔라왕이 건립하여 12세기까지 크게 발전했던 승가람인데, 인도에서의 대승불교가 소멸한 시기도 팔라왕조 뒤에 선 세나왕조가 회교도 침략으로 쇠퇴하는 동안 1203년 회교도들이 비크라마쉴라사원을 약탈하고 불 질렀던 13세기로 잡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답사일행이 가고 있는 라트나기리에 대한 정보도 역시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장이 7세기 중반 그곳에 들렀을 때 푸슈파기리 승가람(불교대학)이 번창하고 있었으며, 주위에는 돌로 조성된 스투파가 많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니까 현장의 기록은 팔라왕조가 들어서기 100여 년 전부터 라트나기리 일대에 대승불교가 번창했다는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인도의 대승불교가 마지막으로 꽃피웠던 라트나기리
버스에서 내린 일행은 라트나기리 박물관에 들러 출토된 유물들을 보고 라트나기리 유적지로 들어선다. 출토된 유물들의 대부분은 문수보살상 등 밀교적 불상들과 힌두 신상들이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는데, 답사일행은 그 이유를 라트나기리 유적지에서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라트나기리 승가람은 관념적이고 사변적으로 변화한 대승을 비판하고 나선 금강승 수행법을, 즉 밀교 교의를 가르치는 중추적 대학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라트나기리 승가람 학승들이 날란다대학 고승인 사하라파다를 초빙하였다고 하는데, 사하라파다는 일반신도들에게도 삶에 밀착된 가르침인 밀교 교의를 설파하고 다닌 고승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지역의 밀교 대가인 사하라는 중인도 엘로라와 서인도에 금강승을 전파했다고도 한다.

라트나기리 승가람은 승려들의 거주공간인 비하라(僧院)와 기도와 예배공간인 차이티아(塔院)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전체적인 구도는 ㅁ자 형태의 가람구조다. 일주문 같은 사각 돌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비하라가 요즘의 대학기숙사 방처럼 연달아 있고, 사각 돌문 맞은편에 차이티아가 배치된 구조인 것이다. 출입구에 문수보살상과 힌두교 신상들이 방치돼 있고, 사각 돌문에 환영과 행복을 준다는 힌두 신 락슈미가 조각돼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로 보아 인도의 대승불교가 소멸하고 힌두교로 건너가는 역사공간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이다.

석굴 형태로 조성된 차이티아는 돌부처님 한 분이 모셔져 있고 규모는 협소하다. 일행은 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한글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잠시 무릎을 꿇고 앉는다. 석굴의 차가운 기운이 머리를 맑게 헹구는 동안 대요스님이 짧게 법문하신다.

 “답사단 여러분, 왼손을 내리세요. 오른손 집게손가락은 하늘을 향해 올리십시오. 다 하셨습니까? 제가 묻겠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정확하게 30초 법문이다. 모두에게 던지는 촌철살인의 화두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강행군하며 답사하는 이유도 아쇼까대왕의 유적을 징검다리 삼아 결국에는 내가 누구인지 그것을 한 번 회광반조해 보고자 함이 아닐 것인가.       

16개월 된 아이에게서 문수 동자가 보였다.
석굴 안에서 심신이 서늘해졌나 보다. 밖을 나서니 정오의 햇살이 따갑다. 비하라 승방을 무심코 지나치는데 도곡거사가 사진을 찍고 있다. 자세히 보니 창틀이 돌로 조각돼 있고, 창턱에는 물받이 홈이 밖으로 나 있다. 무슨 용도인지 알 길이 없다. 혹시 찻물을 흘려보낸 차생활의 흔적은 아닌지 상상의 나래가 펴진다.

보리수 옆을 지나쳐 언덕 봉우리에 조성된 스투파를 가는데, 흙에 묻혀 있다가 드러난 불두가 보인다. 흙을 파헤치자 더욱 선명하게 나발이 드러난다. 이래서 라트나기리를 보석(라트나)의 언덕(기리)이라는 것일까. 안내하는 인도 청년에게 묻자, 라트나기리를 발굴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발굴 초기인데도 출토된 유물들이 굽타시대 이후 최고의 걸작품들이라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승가람 터를 나와 마을을 내려오는데 마을 고샅길 도처에 깨어진 부도와 탑, 그리고 기단석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나도 모르게 <황성옛터>란 유행가가 떠오른다. 말 그대로 폐허가 된 라트나기리다. 

그렇다고 마을이 고사했다는 느낌은 안 든다. 고목의 새싹 같은 자전거를 탄 학생들이 보이고, 마을 골목길에서 본 아기가 나뭇가지의 꽃눈처럼 귀엽고 예쁘다. 아기를 돌보고 있는 남자에게 아기이름을 물어보니 사말(Samal)이라 하고 이제 16개월 되었단다. 나는 아기가 복전(福田) 같아서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어준다. 그러나 아기는 돈이 아직 무언지 모르고 떨어뜨린다. 남자가 대신 받는다. 나는 문득 라트나기리를 지켜나갈 이 아기야말로 만주스리(Manjusri), 문수동자가 아닌가 하고 상념에 잠긴다.(계속)
글 정찬주 사진 아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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