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란다大 터에서 ‘종교의 의미’를 깨닫다
날란다大 터에서 ‘종교의 의미’를 깨닫다
  • 정찬주
  • 승인 2012.06.11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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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의 아쇼까대왕 유적기행 <8>

당시 최고 상아탑 날란다대학
수천명 학승중에 신라 구법승도
아쇼까왕 건립 사원이 ‘날란다大’ 로
1199년 무슬림 침공으로 황폐화
종교가 파괴 도구 된 아픈 역사

세계 최고·최대의 불교 명문 상아탑 날란다 대학터. 교정의 크기가 가로 11km, 세로 5km였던 날란다 대학은 1199년 무슬림의 침공으로 파괴돼 황폐한 터만 남았다. 그릇된 종교관이 빚어낸 아픈 역사의 상징이다.
라즈기르 역시 아쇼까왕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라즈기르의 옛 이름은 라자그리하이고 한자로는 왕사성(王舍城)이다. 라즈기르에도 아쇼까 스투파가 여러 개 있고 11킬로미터쯤 떨어진 날란다에는 아쇼까왕이 건립한 사원이 있다. 그 사원이 큰 승가람으로 번성하여 굽타왕조 때 날란다대학이 된 것이다. 현장은 물론 우리나라의 많은 구법승들이 찾아가 공부했던 승가람이기도 하다. 

일행은 보드가야에서 라즈기르로 이동한다. 먼저 날란다대학 터를 가볼 예정이다. 날란다마을은 사리불 존자의 고향이다. 그래서 날란다에 사리불 스투파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고승이 입적한 곳에 세우는 것이 묘탑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출가·입적 함께 한 사리불과 목련의 우정
사리불이 입적한 까닭은 참다운 종교에 귀의한 수행자의 우정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부처님이 활동하던 당시의 왕사성에는 데바닷타를 추종하는 무리도 있었고,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장외도(執杖外道)가 있었는데 그 무리들은 교세를 넓혀가는 불교승단을 자주 위협했다고 한다.

특히 불교승단의 두 기둥인 사리불과 목련은 그들의 표적이 되곤 했다. 하루는 목련이 그들에게 잡혀가 몽둥이질을 참혹하게 당했다. 팔다리의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겨 나갈 정도로 맞았던 것이다. 사리불이 곧 죽을 것처럼 누워 있는 목련에게 달려가 안타깝게 물었다.

“벗이여, 그대는 신통제일이라고 불리지 않았는가. 그런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왜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맞기만 했는가.”

목련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업으로 돌렸다.

“사리불이여, 나는 전생에 부모님을 괴롭힌 적이 있다네. 이제야 그 과보를 받고 있을 뿐이네. 나는 곧 입멸에 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사리불은 출가도 같이 하고 깨달음도 같이 얻은 목련의 입적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출가도 같이 하고 부처님의 제자도 같이 되었지. 그리고 부처님 제자가 돼 깨달음도 같이 얻은 친구지. 그러니 입멸도 함께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리불은 부처님에게 가 사정을 얘기하고 허락을 청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세연(世緣)이 다했음을 살펴보시고 허락했다. 사리불은 날란다마을로 가서 마을사람들에게 설법한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목련도 날란다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그의 고향 코리가마을로 돌아가 입적했다. 우리 불교사에 있어서 출가도 같이 하고, 깨달음도 같이 얻고, 입적도 같이 한 사례가 또 있을까. 단 한 번의 반목과 질투 없이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면서 불교승단을 헌신적으로 이끌었던 그들의 우정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더욱이 날란다대학 터 부근 호숫가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성소가 있다. 일행은 그곳으로 먼저 가 참배한다. 사리를 모신 곳에는 예전부터 원형의 양철지붕이 씌어져 있다. 아마도 사리는 어디론가 이운돼 갔을 것이다. 그러나 참배객들이 날란다대학 터를 오게 되면 반드시 들르는 성소이다.

일행은 탑돌이 하듯 한 바퀴를 돌고 나와 바로 날란다대학 터로 간다.  라즈기르가 고향인 인도 청년에게 날란다(Nalanda)의 어원을 묻자, ‘날’은 연꽃 혹은 지혜이고 ‘란다’는 주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의 말이 옳다면 날란다는 ‘지혜를 주는 곳’이다.

그러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얘기는 조금 다르다. 부처님이 전생에 이곳의 왕이 되어 보시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는데 이를 찬양하여 시무염(施無厭; 하염없이 주다)이라 불렀기에 ‘날란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황폐해진 날란다 대학이지만 지금도 티베트 스님들의 구법 순례는 이어지고 있다.
학식 깊은 승도만 입학한 날란다대학
예전에 왔을 때보다 날란다대학 주변이 더 번성해진 것 같다. 가게가 들어서 있고 참배객들이 북적인다. 마치 무슨 대학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인도 어디를 가든 티벳 스님들이 눈에 많이 띈다. 진홍색 승복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아쇼까왕이 사리불 스투파를 참배했듯 일행도 그쪽으로 먼저 가 살핀다.

날란다대학을 거쳐 간 고승으로는 먼저 용수(龍樹)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인도 말로는 나가르쥬나라고 하는데 2세기경 그는 7살 어린 나이로 날란다대학에 들어와 공부하여 나중에 고승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5세기경에 유식학을 완성한 무착(無着; 아상가), 세친(世親; 바수반두) 등도 날란다대학을 빛낸 고승들이다.

날란다대학이 대가람으로 번성한 시기는 5, 6세기경의 굽타왕조 때인데 하르샤왕조(606-648)가 들어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르샤왕은 스스로 ‘나는 날란다 승원 스님들의 종’이라고 자처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했던 것이다. 왕은 100개 마을의 세금을 날란다 승가람에 공양물로 보냈으며, 200세대가 쌀과 버터 및 우유를 공급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그러니 스님들은 탁발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구법승들도 날란다대학으로 유학을 가 공부했다. 의정(義淨)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나온다.

신라 구법승 아리야발마는 율과 논을 공부하고 여러 경전을 사경했는데 귀국하지 못하고 70세에 입적했다. 또 혜업(慧業)도 오랫동안 공부하다 60세에 입적했다. 날란다대학에 입학한 것만으로도 신라의 구법승들의 학문을 짐작해 볼 만한 근거가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나온다.

‘유학하러 온 후진의 학자로서 학문이 깊은 사람도 10명 중에 7, 8명은 물러가게 마련이다. 나머지 2, 3명의 박식한 사람도 승도들의 거센 질문 공세에 밀려 명성을 실추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토론하는 면접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입학이 불허됐다는 내용이다. 그러니 입학생도 불학에 통달했다는 것인데 그 숫자가 수천 명이었다고 현장을 말하고 있다.  

‘승도는 수천 명인데 모두 재능이 있고 학식이 높다. 덕행이 당대에 존중받고 명성이 외국에까지 뻗치고 있는 사람만도 수백 명이다.’

그러니 날란다대학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어디를 가든 일반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 같다. 날란다대학 출신이라고 사칭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말이다. 세계 최고이자 최대 불교 명문 상아탑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교정의 크기도 장관이다. 가로 11킬로미터, 세로 5킬로미터에 이르렀으니 대공원처럼 어마어마한 넓이다.

시설도 다양했다. 사원과 강당, 지하선원, 지하도서관, 노천극장, 계단교실, 공동식당, 음식창고, 운동장, 산책로 등의 시설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나게 했을 것 같다. 실제로 나부터 대학 터를 이리 저리 답사하는 동안 공부하고 싶은 신심이 솟구친다.

날란다 대학을 순례중인 인도 학생들. 그들도 최고의 상아탑에서 공부의 의지를 다진다.
종교를 파괴와 증오의 도구로 쓴 무슬림
이러한 날란다대학이 황폐화된 것은 무슬림 침공이 결정적이었다. 1199년 무하마드 휘하의 장군 바크티야르 칼지에 의해서 날란다대학의 승가람들이 철저하게 파괴됐던 것이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승도들은 무슬림 군사들의 칼에 죽고, 승가람의 모든 시설들과 대학의 장서들이 3개월 동안 연기를 내며 불탔다고 한다.

슬프고 안타까운 역사다. 도서관으로 이용된 방으로 들어가 보니 까맣게 그을린 벽돌 벽이 보인다. 무슬림들이 1199년에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던 불행한 역사의 산현장이다. 아쇼까왕의 상생의 담마통치와 달리 무슬림처럼 종교를 파괴와 증오의 도구로 이용할 때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문명적인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매년 발굴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으나 이제 겨우 10%를 넘어섰다고 한다. 일행은 발굴 중인 승방들을 둘러본다. 요즘말로 하자면 전학년 장학생들의 기숙사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직사각형의 귀퉁이 방들은 원로나 중견 승도가 사용했고 각방에는 침대를 두 개씩 놓았던 것 같다. 침대자리가 하나는 크고 또 다른 것은 작다. 선후배가 이용한 침대자리이다.

귀퉁이마다 중견승도 방을 배치하여 대중생활의 기강을 바로잡았을 것이고, 침대자리를 두 개씩 배치한 각방들은 선후배가 함께 생활하도록 하여 절로 탁마가 이루어지도록 배려했던 것 같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수로를 만들어 물이 흐르도록 한 수세식 화장실이다.

날란다 대학에 자리한 사리불의 스투파. 목건련과 깊은 우정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일행은 사리불 스투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참배를 한다. 아쇼까왕도 이곳까지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는 기록이 있다. 부처님과 사리불을 존경하는 마음이 들어 그랬을 것이다.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날란다는 본디 망고동산이었는데 5백 명의 상인이 돈을 모아 사들여 부처님께 보시했고, 부처님은 3달 동안 설법을 했다고 한다.

석양이 기울고 있다. 날이 저무니 허공을 나는 새들처럼 마음이 급해진다. 날란다 승가람에서 서남쪽으로 8, 9리 가면 코리카마을이 있는데 아쇼까왕이 목련존자를 기리기 위해 그곳에 스투파를 세웠다는 기록을 <대당서역기>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목련존자의 사리탑일 텐데 지금은 스투파의 흔적도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땅이라도 밟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는다. 석양은 사리불과 목련의 고향을 그들의 우정만큼이나 붉고 장엄하게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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