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의 아소까대왕 유적 기행<6>

현장·혜초 스님 순례한 녹야원서
다메크탑 돌며 ‘탑이름’처럼 되길 합장
최근 조계종 추진 ‘아쇼까 선언문’ 
부처님법에 부합하는지 잘 살펴야

2백여척 높이의 녹야 가람의 정사터. 수많은 순례자들을 맞이했던 가람은 이제 세월의 흔적만을 찾을 수 있지만, 불법만은 도저하게 남았다.
강가강에서 해맞이를 한 일행은 바라나시의 아침을 여유롭게 즐기다가 사르나트로 이동한다. 사르나트에는 아쇼까왕이 조성한 탑과 파괴된 아쇼까 석주가 있기 때문이다. 사르나트를 한역한 말이 녹원(鹿苑) 혹은 녹야(鹿野)다.

우리말로 풀자면 사슴동산이다. 부처님이 전생에 사슴의 우두머리였을 때 새끼를 밴 다른 사슴이 이곳을 다스리는 왕의 사냥감이 되자 대신 나서서 죽기로 하여 그 왕을 감동시켰다는 전생담을 근거로 녹원이라고 했을 터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처음으로 설법하셨을 때는 시신을 버리는 공동묘지 즉 시다림(尸茶林)이었다고 한다. 당시 인도의 수행자들은 두타수행의 일환으로 주로 시다림에서 고행정진을 했던 것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 6년 동안 고행하셨던 유영굴 밑의 산자락도 시다림인 것을 보면 그 당시 수행자들의 관습이 더욱 분명해진다.

현장·혜초 순례하며 본 아쇼까 석주와 대탑
현장은 637년에 사르나트를 들렀다. 그러니까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녹원은 지금으로부터 1375년 전의 풍경인 셈이다.

‘바르나강에서 동북쪽으로 10여 리 가면 녹야가람에 이른다. 구역은 8개로 나뉘었으며, 여러 층의 처마와 누각은 아름다운 구상이 더할 데가 없다. 승도는 1천 5백 명으로 모두 소승 정량부를 배우고 있다. 큰 담장 안에 높이 2백여 척 되는 정사(精舍)가 있는데, 위에는 황금으로 조각된 암라과(菴羅果)가 조성돼 있다. 돌로 된 기단과 계단이 있고, 벽돌로 된 여러 층의 감(龕)이 있다. 감은 건물의 둘레를 삥 둘렀고 모두 황금불상이 봉안돼 있는데 계단은 1백을 헤아릴 정도다.’ 

현장이 들렀던 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녹야가람의 정사는 중국 당나라의 1척과 우리나라 1척의 크기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식으로 1층을 2미터로 계산해 보면 30층 누각 형식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마어마한 규모일 뿐만 아니라 처마와 누각의 아름다움이 더할 데가 없었다고 현장은 전하고 있다. 아쇼까왕이 조성한 탑과 석주 위치를 현장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정사 서남쪽에 아쇼까왕이 세운 석조 스투파가 있다. 기단은 붕괴돼 기울었으나 지금도 1백척 남짓 된다. 앞에 높이 70여 척 되는 석주가 서 있다. 돌은 구슬 같은 윤기를 머금고 거울같이 곱게 모습을 비춘다. 지극하게 기도하면 여러 형상이 나타나며, 보는 사람의 선악상(善惡像)도 나타나는 때가 있다. 여래가 깨달음을 이루어 처음으로 법륜을 전한 곳이다.’

현장보다 1백년 뒤에 순례한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파라날사국(바라나시)에 이르렀으나 이 나라 역시 망하여 왕이 없다. 즉 여섯 -(결락)- 구륜(俱輪; 교진여)을 비롯한 다섯 비구의 소상이 탑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결락)- 석주 위에 사자가 있다. 그 석주는 대단히 커서 다섯 아름이나 되고 무늬는 섬세하다. -(결락)- 탑을 세울 때 그 석주도 함께 조성했다.  절 이름은 달마작갈라(達磨斫葛羅)이다. 승려 -(결락)- 외도는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르며 대천(大天)을 섬긴다.’

부처님의 초전법륜 자리에 선 다메크 대탑
혜초가 갔을 때 바라나시국은 이미 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쇼까왕이 세운 석주는 그대로 있었고 다섯 비구의 소상이 봉안된 탑도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던 듯하다. 이 탑이 바로 오늘의 다메크 대탑이다. 여기서 달마작갈라라는 절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혜초가 갔을 때 녹야원에는 절이 여러 개였던 것 같다. 혜초는 법륜(法輪)이란 뜻의 다르마카크라(Dharma cakra)를 ‘달마작갈라’라고 했을 터이다. 또한 대천은 힌두의 시바신일 것이다.

녹야원 거닐며 ‘진리의 깨달음’ 발원
답사일행은 녹야원 초입에 있는 챠우칸디 스투파, 즉 영불탑(迎佛塔)을 먼저 들른다. 다섯 비구가 정각을 이룬 부처님을 맞이한 곳이라 해서 세운 영불탑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보드가야에서 정각을 이룬 뒤 무슨 이유로 다섯 비구가 수행하고 있는 사르나트로 왔는지 그 필연성을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 생각은 이렇다. 부처님이 6년 고행하는 동안 부처님을 자발적으로 시봉한 사람은 다섯 비구였다. 부처님을 외호하는 공덕을 지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부처님이 고행을 멈추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자 ‘사문 고타마가 타락했다’고 실망한 채 떠나버렸지만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비심을 내어 280km의 거리를 11일 동안 걸어서 찾아온다. 여기서 말하는 자비란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설하여 다섯 비구를 눈 뜨게 하는 거룩함이다.

부처님의 전법이야말로  대자대비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영불탑 자리에서 부처님을 맞이하는 다섯 비구의 모습이 흥미롭다. 그 당시 정경으로 되돌아가보자. 멀리서 부처님이 걸어오는 것을 본 다섯 비구는 수군거린다.
“저기 오는 이는 사문 고타마가 아닌가. 고타마는 타락한 사문이다. 6년 고행을 하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 무엇을 더 이룰 것인가. 고타마가 가까이 오더라도 이제 우리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 발 씻을 물과 음식이나 내주고는 고타마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자.”

그러나 다섯 비구끼리 한 약속은 부처님이 눈앞에 다가오자마자 깨져버린다. 부처님의 위의에 압도되어 경의를 표한다. 다섯 비구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서 부처님을 맞이했다. 각자 분담하여 가사를 받아주고,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주위를 말끔하게 비로 쓸고, 발을 씻어 주고, 마지막으로 음식을 내왔다. 여기서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일이 하나 생긴다. 부처님이 승단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자신을 여래(如來)라고 부르는 장면이다. 다섯 비구들이 부처님을 ‘고타마여’ 혹은 ‘친구여’ 하고 불렀을 때 부처님이 단호하게 지적했던 것이다.

“그대들은 여래를 고타마나 친구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나는 참으로 부처가 되었다. 내 가르침에 따라 수행한다면 머지않아 그대들도 출가한 목적을 이룰 것이다.”

다섯 비구가 정각을 이룬 부처님을 맞이했던 영불탑
일행은 다시 영불탑에서 녹야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현재의 녹야원까지는 지척의 거리인데 현장이 왔을 때는 이 일대 전부가 녹야가람이었고 2백여 척의 누각 형식의 정사가 순례자를 압도했을 터이다. 다메크 대탑은 출입구 맞은편에 있다. 아쇼까왕이 석주와 함께 조성한 탑으로 돌로 된 하단은 마우리아 양식이고 벽돌로 된 상단은 굽타 양식이다.

부처님의 초전법륜을 기념하여 기원전 3세기 때는 아쇼까왕이 스투파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6세기경에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일행은 대요스님을 뒤따라 탑돌이를 한 뒤 그늘에 앉아서 법문을 듣는다.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여 법안(法眼)을 열리게 했듯 일행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요지다. 다메크(Dhamekh)란 뜻도 ‘진리를 본다’라는 뜻이니 내 자신도 홀연히 그렇게 되기를 갈망해 본다.

승가화합 깨뜨린 자, 흰옷 입고 절 밖에 살라
현장이 본 석주는 70여척이라고 했고, 혜초는 석주 위에 사자가 있고 하단의 규모가 다섯 아름이나 된다고 하였지만 현재는 석주의 흔적만 볼 수 있을 정도로 파괴돼 있다. 발굴 때 석주는 세 토막으로 잘려 있었고 네 마리 사자상(獅子像)도 그때 발견되어 현재 사르나트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한다.

네 마리 사자상, 즉 사자두주상(獅子頭柱像)이 인도의 국장(國章)으로 채택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옆에서 동강 난 석주를 보니 붉은색이 섞인 사암(砂巖)이다. 현장은 표면이 거울처럼 반질반질하여 보는 이의 선업과 악업이 나타나는, 즉 업경대 같았다고 종교적 신비감을 자극하고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고 초라할 뿐이다. 상단이 잘린 석주 주신(柱身)에 새겨진 아쇼까 칙령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누구도 승가의 화합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비구 또는 비구니로서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사람은 흰옷을 입혀서 사원이 아닌 곳에서 살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 칙령은 비구와 비구니 승가에 알려져야 한다.’

아쇼까왕이 왕명으로 사르나트 석주에 이와 같은 칙령을 새기게 한 것으로 보아 당시부터 승가의 갈등이 잦았음이 짐작된다. 당시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비구나 비구니들이 사원에서 쫓겨난 일이 더러 있었던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멸빈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영불탑 안에서 탑돌이를 하고 있는 각국 순례자들
최근에 종단 차원에서 ‘아쇼카 선언’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바 아니지만 선언문의 내용이 부처님 법에 한 치라도 어긋남이 없는지를 잘 살피어야 할 것 같다. 부처님 법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과감하게 수정하면 된다. 이런 과정에 있어서 승가의 화합을 깨뜨릴 만큼 조악한 언행으로 상대를 모욕하고 폄하해서는 안 된다. 선한 의도와 상관없이 승가의 화합이 무너진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처님은 수행자들이 이념이나 관념으로 다툴 때는 어느 편도 들어주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부처님이 왜 침묵하셨는지 그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수행력이 일천함을 통렬하게 참회해야 한다. 만약 내가 출가수행자라면 잠시 아쇼까왕 시대로 돌아가서 나는 법복을 입고 절 안에서 살까, 흰옷을 입고 절 밖에서 살까를 절절하게 되돌아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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