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의 아쇼까대왕 유적기행 <10>

부처님 머물었던 왕사성 장림
1천명 귀의시킨 위의 느껴져
설법 듣고 감격한 빔비사라왕
최초 사원 죽림정사 건립 기증

대숲이 우거진 죽림정사 경내. 장림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격한 빔비사라왕이 카란다 장자의 죽림원을 사 수행자들이 머물 수 있는 정사를 건립해 부처님께 기증했다.
아쇼까 석주는 사라지고 탑만 남은 신 왕사성 터
현재 인구 10여 만 명의 라즈기르 거리에서 가장 번잡한 곳이 죽림정사 앞 같다. 사람을 태운 마차와 승용차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다. 주로 힌두사원이나 자이나교 사원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불교신자는 우리 일행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죽림정사에서 북쪽으로 2km쯤 가면 빔비사라왕이 조성한 신 왕사성 터가 있다. 신 왕사성이 조성된 이유가 흥미롭다. 빔비사라왕이 구 왕사성에서 살 때였다. 화재를 내는 사람에게는 성문 밖 시다림으로 추방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린 적이 있는데, 왕이 그만 실수로 화재를 내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빔비사라왕은 왕자에게 구 왕사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북문 밖으로 나가 살았는데, 그 틈을 노리고 바이샬리왕국이 침략하자 왕의 지휘로 성을 쌓아 격퇴시킨바 그 성이 바로 신 왕사성이 되었다고 한다.

신 왕사성 서문 터 밖에 아쇼까왕이 조성한 스투파가 지금도 있다. 아쇼까 스투파가 사라스와티 하천가에 10m 정도 높이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상이 얹혀 있었다는 아쇼까왕 석주는 사라지고 없다. 코끼리상의 석주는 상카시아에 있는 석주와 동일한데 어쩌면 아쇼까왕이 상카시아를 순례한 무렵에 조성한 것이 아닐까 싶다.

현장은 신 왕사성 서문 밖의 스투파와 석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카란다 연못에서 서북쪽으로 2, 3리를 가면 아쇼까왕이 세운 스투파가 있다. 높이는 60여 척이다. 그리고 곁에 석주가 있어 스투파를 세운 사적이 새겨져 있다. 높이가 50여 척인데 위에는 코끼리상이 조각돼 있다.’

현재 신 왕사성 터도 역시 구 왕사성 터와 마찬가지로 잡목이 우거진 채 방치돼 있는데, 특히 신 왕사성 서문 밖은 기원전 3세기경에 아쇼까왕이 스투파와 석주를 건립했을 때만 해도 아름다운 장소였겠지만 현장이 갔을 무렵에는 이미 공동묘지로 변모해 있었던 것 같다. 한림(寒林) 즉 시다림이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죽림정사 주변에는 불교 유적지들이 많다. 정사 남쪽 온천이 있는 산자락에 가섭존자가 머물렀던 필발라 석실이 있고, 또 거기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최초로 부처님 말씀을 결집했던 칠엽굴이 있다. 정사 동쪽으로는 빔비사라왕의 아들 아자타사투를 이용하여 승단을 장악하려고 했던, 부처님의 사촌동생 데바닷타가 머물렀던 석실이 있다.

림정사에 있는 동자승 모습의 부처님 상.
부처님, 1천 제자 이끌고 왕사성에 입성
답사일행은 죽림정사 안으로 들어간다. 죽림정사에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이곳이 빔비사라왕이 기증한 절일까 하는 의아함이다. 이런 비좁은 곳에서 1천 명이 넘는 비구가 어떻게 머물렀을까 하는 의혹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우루벨라에서 카샤파 삼형제를 따르는 수행자 1천 명을 귀의시킨 뒤 왕사성(현 라즈기르)으로 왔던 것이다. 부처님이 왕사성으로 들어오는 장엄한 모습을 불전은 제석천의 노래라 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복(調伏)한 이가 조복(調伏)당한 사람들을 이끌고/ 앞서 결발행자(結髮行者)였던 사람들을 이끌고/ 해탈한 이가 해탈하게 된 사람들을 이끌고/ 황금의 빛도 아름다운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벗어난 이가 벗어나게 된 사람들을 이끌고/ 해탈한 이가 해탈하게 된 사람들을 이끌고/ 황금의 빛도 아름다운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생사의 바다를 넘어선 이가 생사의 바다를 넘어서게 된 사람들을 이끌고/ 해탈한 이가 해탈하게 된 사람들을 이끌고/ 황금의 빛도 아름다운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십주(十住) 시방(十方)이시며 십법(十法)을 알고 십호(十號)를 갖추어/ 1천 명의 비구에 둘러싸여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해탈한 이’나 ‘생사의 바다를 넘어선’이는 부처님이고, ‘해탈하게 된 사람들’이나 ‘생사의 바다를 넘어서게 된 사람들’은 부처님에게 귀의한 카샤파 삼형제와 그 제자들일 것이다.

부처님이 1천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처음에 머물렀던 곳은 장림(杖林)이었다고 한다. 장림이란 어느 바라문이 부처님의 키를 대나무지팡이로 재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인데, 현재로서는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 길은 없다. 혹시 신 왕사성 서문 밖의 아쇼까왕 스투파 자리가 아닐까도 싶은데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일 뿐이다.

부처님이 자주 포행하셨다는 죽림정사의 카란다 연못. 사박 사박, 부처님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사리불, 목련, 석가족 출가해 부처님 설법 듣다
빔비사라왕은 장림으로 달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격하여 부처님이 오랫동안 머물 장소를 찾는다. 성에서 멀지 않은 곳을 찾다가 마침내 카란다 장자의 죽림원을 사들여 부처님께 기증했다. 죽림원에 1천 명의 비구들이 수행할 수 있는 정사도 지어 주었다. 그 정사가 바로 죽림정사로서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 된 것이다.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머무는 동안 초기승단을 이끌게 되는 두 지도자, 사리불과 목련도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사리불이 부처님 제자가 된 인연 이야기는 이렇다. 하루는 사리불이 왕사성 안으로 탁발을 나갔다. 마침 부처님의 첫 제자가 된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인 앗사지도 성 안을 들어와 탁발을 하고 있었다. 사리불은 앗사지의 당당한 위의(威儀)에 반했다. 사리불은 중얼거렸다.

‘참으로 고상한 모습이다. 이 수행자야말로 확실히 좋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리불은 앗사지의 탁발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가까이 가서 말했다.
“당신의 모습은 참으로 고요하고 당당하십니다.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저의 스승은 석가족 왕자였다가 출가하신 분입니다.”
“당신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스승을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으므로 자세히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또 인연에 의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앗사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리불은 법안(法眼)이 열렸다. 사리불은 거처로 돌아가 친구인 목련에게도 앗사지에게 들은 법을 전했다. 스승 산자야와 그 제자들에게도 전했다. 그러자 산자야의 제자 250명은 사리불과 목련을 따라서 죽림정사로 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던 바, 이 사건은 왕사성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자신의 제자들을 잃어버린 육사외도 중 한 사람인 산자야의 충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부처님이 카필라성을 찾아가 석가족들을 출가시킨 것도 죽림정사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석가족이 출가하였다고 해서 바로 죽림정사로 들어와 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정사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의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석가족이라 하여 특별한 대우를 해주지도 않았을 것 같다. 부처님의 속가 아들인 라훌라도 잘 자리가 없어 부처님이 사용하는 화장실에서 잔 적도 있고 나중에는 죽림정사 부근의 온천림에서 머물었던 것이다.

데바닷타도 역시 죽림정사에 살지 못하고 지금도 남아 있는 데바닷타 석실에 살면서 부처님과 갈등을 일으켰던 사실을 봐도 그렇다. 데바닷타는 성품이 원만한 아난다와 형제라는 설도 있고 자존심이 강한 아쇼다라비(妃)의 오빠라는 설도 있는데, 부처님에게 무례한 언행을 서슴지 않았던 것을 보면 성격적으로 아쇼다라비의 오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음의 일화도 부처님을 난처하게 만든 언행이 아닐 수 없다.

“세존께서는 이제 나이가 들어 늙으셨으니 교단의 통솔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부처님이 대답을 하지 않자 세 번이나 요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부처님은 끝내 데바닷타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다.

“데바닷타여, 여래는 사리불이나 목련에게조차 교단의 통솔을 맡기지 않고 있다. 하물며 너와 같이 6년 동안이나 군침을 삼키고 있는 자에게 어떻게 맡길 수 있겠느냐!”

제자들이 모여 있는 데서 ‘군침을 삼킨다’는 속어까지 써가며 데바닷타를 경책했다. 이후 데바닷타는 아자타사투와 모의하여 부처님의 재가제자인 빔비사라왕을 축출했는데, 결국에는 아자타사투도 부처님에게 귀의하게 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8등분 한 사리를 마가다국도 분배 받아 스투파를 죽림정사 동쪽에 조성한바, 아자타사투 명으로 봉안했던 것이다.

죽림정사가 예전보다는 정비돼 있지만 초라하기는 마찬가지다. 대숲 안에 있는 불상도 왠지 어색하다. 카란다 장자의 이름을 딴 카란다연못이 그래도 기운이 좋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연못물이 말랐다고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전하고 있지만 지금은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일행은 연못가에 앉아서 잠시 좌선에 든다. 2천 5백여 전 부처님이 카란다연못 둘레를 포행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죽림정사로 가는 길은 라즈기르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