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의 아쇼까대왕 유적기행<4>

사면불이 감실에 봉안된 우다야가리 제1구역의 마하 스투파. 왼쪽위에 삼굴 자셍의 간다라 양식 석조 보살상이, 뒷쪽에 석굴법당이 있다.
현장법사 순례한 불교성지 우다야기리와 날리타기리
라트나기리를 답사한 일행은 버스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우다야기리로 서둘러 간다. 우다야기리는 비루파 강변에 자리한 고팔푸르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불교 유적지다. 우다야기리도 역시 부처님과 아쇼까왕이 다녀갔을 터이고 7세기 중엽에는 현장이 순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새 점심시간이다. 우다야기리는 오지인 데다 아직 참배객이나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가게나 식당이 한 군데도 없다. 답사일행과 동행하고 있는 현지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출발 전에 간편한 도시락이라도 준비한 게 다행이다. 현지인을 섭외한 도곡거사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데 우다야기리 입구 양편의 풀밭은 그늘이 없고 짐승들의 분비물이 널려 있어 일행이 편안하게 앉기에는 마땅찮다. 농가가 한두 채 보이지만 갑자기 들이닥쳐 빌릴 수도 없다. 도시락 음식냄새를 풍기는 것이 미안하지만 좀 더 유적지 쪽으로 올라가야 앉을 자리를 찾을 것 같다. 라트나기리가 언덕 하나를 중심으로 승가람이 조성되었다면 우다야기리는 여러 산봉우리 안의 오목렌즈 같은 분지에 형성된 유적지다.

마치 중국의 오대산 오대(五臺)를 연상케 할 정도로 평화로운 기운이 감돈다. 절로 기도하고 싶어지는, 신앙심을 솟구치게 하는 천혜의 지형이다. 우다야는 ‘일출’이고, 기리는 ‘언덕’이란 뜻이니 일찍이 오래 전부터 수행자들이 찾아들었던 양명한 언덕인 셈이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마다 일광여래를 마주친다고나 할까. 십여 년 전에 한중인문학회 회원들과 답사했던 돈황의 막고굴들도 동향(東向)의 굴들로 일출의 햇살이 비쳐들 수 있도록 착굴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사면불 스투파로 유명한 승가람 터 우다야기리
점심공양 장소를 찾아 올라가는데, 보리수 뒤로 커다란 우물터가 하나 보인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우다야기리에서 가장 오래된 3세기 때 조성된 우물터이다. 우물은 벽돌 모양으로 깎은 돌을 수조(水曹)처럼 직사각형으로 격조 있게 쌓았는데, 연중 수량이 일정치 않은지 우물 속으로 내려가게끔 계단을 조성하여 두레박 없이도 물을 편리하게 긷도록 만들어져 있다.

7평 정도의 우물 넓이로 보아 우다야기리에 살았던 대중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우물의 수량과 대중 숫자가 비례한다는 사실은 우리 절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물을 도리천의 영액(靈液)이라고까지 찬탄하여 감로수라고 부를 터이다.

우물 터 옆에는 초라한 힌두사원이 한 채 붙어 있는데 드러난 살림살이가 남루하다. 할 수 없이 일행은 유적지이지만 우물터 주변에 앉아 점심공양을 하기로 한다. 보리수 그늘에 앉아서 쉬고 있던 농부들 두어 명이 우리가 먹는 음식과 숟가락 젓가락질을 흥미롭게 구경하더니 가버린다. 농부들의 인상이 순하고 무심하다.

이윽고 힌두 사두가 와 일행을 보고는 손을 흔든다. 인도인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사과를 싸들고 가 보시하자 웃으며 받는다. 한국인들이 이곳에 왔느냐고 묻자 반갑게 대답한다.
“2년 전에 배낭을 멘 참배객이 왔어요. 이렇게 여러 명이 오기는 처음이지요.”

일본인 승려들은 더러 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힌두사원을 다 공개하겠으니 들어오란다. 그러면서 자신은 가난한 수행자이니까 보시하라고 한다. 보시를 요구하는 말투가 궁기를 풍기지 않고 진실하게 느껴진다. 나는 당신의 복전이 돼주겠다는 태도이다.

우다야기리는 현재 1구역과 2구역을 발굴 중인데, 앞으로도 발굴할 구역이 16군데나 더 된다고 설명한다. 우다야기리에 18군데의 승가람이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불교유적지가 아닐 수 없다. 일행은 발굴이 어느 정도 완료된 1구역으로 먼저 가본다. 1구역 초입에 마하스투파가 있다. 스투파로 오르는 돌계단 양끝에 태극 문양처럼 판 것이 아름답고 더 특이한 것은 사면불(四面佛) 스투파이다.

대승불교를 꽃피웠던 우다야기리의 제2구역 승가람터.
10세기 때 완성한 스투파이지만 그 시초는 현장의 기록으로 보아 아쇼까 스투파가 아닐까 하고 짐작해본다. 현장은 자신이 다녀간 고팔푸르 일대에 아쇼까 스투파가 10여 기 정도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스투파 왼쪽 위에는 삼굴(三屈) 자세의 석조 보살상이 풀밭 노지에 서 있다. 삼굴이란 세 번 꺾었다는 말로써 목과 허리와 무릎을 꺾어 풍만한 신체를 돋보이게 한 간다라조각의 보살상 특징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에스 라인을 강조한 자세라고나 할까.

스투파 뒤쪽 정면에는 석굴 법당이 있고 법당 문에 새겨진 조각이 선명하다. 특히 통통한 보살상의 머리에 코브라 다섯 마리가 보관처럼 조각돼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인도의 코브라는 동양의 용과 같이 영기(靈氣)를 상징할 터이다. 실제로 석굴 법당에 코브라가 산다고 현지인이 설명하지만 믿거나 말거나이다.
일행은 2구역으로 이동하여 1구역보다 큰 승가람 터를 보고 놀란다.

먼저 운주사에서 보았던 미완의 와불 형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굴 자세의 보살상이나 북처럼 생긴 타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상(樂士像)도 발굴현장에 누워 있다. 초입에 발굴한 승가람은 11세기에서 12세기의 유적이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지금도 발굴이 진행 중이고 한 승방은 원형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위가 높은 수행자의 승방인 듯 좌선공간이 두 곳이며 흥미롭게도 비밀사물함이 하나 있다.

우다야기리를 답사하고 나오는 길에 여학생들과 마주친다. 자전거를 타고 온 여학생들인데 아마도 현장 학습을 나온 것 같다. 시골 여학생들이지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을 보니 개방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기원전 2세기부터 불교 도시로 번영했던 랄리타기리
우다야기리에서 5km쯤 떨어진 다음 행선지 랄리타기리로 가는 동안 조그만 마을에서 벌이고 있는 힌두축제 현장과 마주친다.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행사용 트럭이나 승합차를 뒤따르고 있다. 일방통행에다 막무가내로 교통을 방해하지만 제지하는 경찰은 없다. 집단최면이라도 걸린 것 같은 광란의 축제 모습이다. 

랄리타기리의 불교 유적은 기원 전 2세기 슝가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트나기리나 우다야기리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 셈이다. 검은 유약이 발라진 도자기 파편에 아쇼까왕 때 사용했던 브라미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나, 랄리타기리 스투파에서 부처님 유골이 담긴 사리함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된 것을 보아도 랄리타기리가 기원전부터 중추적인 불교 도시였음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아잔타 석굴을 밖에서 재현한 듯한 릴리타기리의 말굽형 사원터.
기원후에도 랄리타기리는 6세기에서 11세기까지 번영했던 보마왕국의 수도였다고 하는데, 불교유적지는 현재 10군데 정도 발굴되었으나 앞으로 얼마나 더 발견될지 모를 만큼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다고 한다.
일행은 랄리타기리까지 버스로 이동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하차한다. 라트나기리와 지형이 흡사하다. 평지에 솟은 야트막한 산에 불교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언덕을 하나 올라서자 타원형의 절터가 나타난다.

안내인이 랄리타기리에서 가장 독특한 구조의 절터라고 설명한다. 말발굽 모양의 사원인데 중앙에는 법당, 양쪽에는 승방이 있는 구조이다. 마치 아잔타석굴을 밖에서 재현한 형태와 흡사하다. 조금 더 올라가니 조그만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불상들은 대부분 문수보살상이나 보살상들이다.

나는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한 뒤 상까시아로 일산을 쓰고 삼계보도를 내려오는 섬세한 조각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아마도 이 조각이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감동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온 효성스런 부처님이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부처님 유골을 담은 사리함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된 스투파는 박물관 바로 뒤편 언덕 정상에 있다. 현지에서는 이 스투파를 아쇼까왕이 대동하고 다닌 장로의 사리함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부처님 사리함이라고 추정하니 조금은 헷갈린다. 그러나 사리함의 주인이 누구이든 내 추측이지만 이 스투파는 아쇼까왕이 조성하지 않았을까 싶다.

스투파까지 올라가 보니 랄리타기리 주변의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랄리타(Lalita)는 ‘아름답다’라는 뜻인데 과연 풍광이 유순하고 목가적이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이 한 폭의 수묵화 같다. 일행은 석양이 지는 들녘을 향해 앉아 잠시 좌선삼매에 든다. 먼 숲에는 땅거미가 지고 추수가 끝난 빈 들녘에는 저녁연기 같은 푸른 이내가 감돈다. 그 이내 속으로 황새 떼가 점점이 날아가는데 광란의 힌두축제 노랫소리는 바람결에 간단없이 들려오고 있다.

문득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가 오른다. 사리불과 목련이 살았던 당시에도 왕사성에서는 바라문들이 주최한 산정제(山頂祭)가 밤을 새우며 계속되었고, 어린 사리불과 목련도 산정제에 참가했다가 광란의 춤과 노래를 보는 동안 ‘미친 듯 춤추는 저 사람들이 백년 뒤에도 저럴 수 있을까’ 하는 무상감을 절감하고 그 자리에서 출가를 결심했던 것이다.
글=정찬주ㆍ사진=아일선
 

우다야기리를 답사 온 여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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