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작가의 아쇼까왕 유적 기행<15>

성 인근 세워진 아쇼까왕 석주
부처님 생애 대한 흠모 느껴져
칠불사상 까삘라성 중심 전파
슛도다나왕도 깨달음 얻은 곳

까삘라성 동문 밖에 있는 슛도다나왕 스투파(왼쪽)와 마야부인 스투파(오른쪽). 부처님 부모님의 묘소지만 초라하다. 규모로 보아 아쇼까왕이 건립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까삘라성 두고 벌이는 네팔·인도 고고학계 논쟁
일행은 룸비니 북서쪽에 있는 틸라우라꼬트(Tilaurakot)로 간다. 까삘라성을 답사하기 위해서다. 물론 일부 고고학자는 룸비니 남서쪽 14.5km의 거리에 위치한 인도의 삐쁘라하와(Piprahwa)에 까삘라성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학설은 1975년 이후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그 이전에는 누구나 네팔의 틸라우라꼬트에 고대 까삘라성이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틸라우라꼬트가 고대 까삘라성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고고학자는 1896년 룸비니에서 아쇼까왕 석주를 발견한 휠러다. 그는 현장과 법현의 순례기를 참고하여 발굴작업을 한 결과 틸라우라꼬트가 고대 까삘라성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V.A.Smith)는 두 구법승 중에서 법현은 인도의 삐쁘라하와를, 현장은 네팔의 틸라우라꼬트를 까삘라성으로 기록하고 있다며 분리해서 지적했으며, 데이비드(T.W. Davids)는 틸라우라꼬트가 고대 까삘라성인데 성이 파괴된 이후 삐쁘라하와에 새로운 까삘라성을 건설했다는 이색적인 설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까삘라성은 하나일 텐데도 그럴 수밖에 없는 유혹이 있다. 삐쁘라하와에 있는 스투파에서 1971년에 출토된 사리함 투껑에 ‘이것은 사까족 붓다 세존의 사리용기로서 그의 형제, 자매, 처자들이 모신 것이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1973년 동쪽 승원터에서 발굴된 테라코타 인장자국에서 ‘옴 데바프트라 승원, 까삘라왓투 비구 승가’라는 명문이 찍혀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네팔의 학자들은 인도의 삐쁘라하와에 까삘라성이 존재했다는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비록 네팔의 틸라우라꼬트의 성터에서 결정적인 명문이 출토되지는 않았지만 성채의 흔적과 법현이 기록한 거리를 참고해서이다. 인도의 불교 유적지를 발굴하는 곳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교과서처럼 활용해왔지만 까삘라성의 위치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만은 법현의 〈불국기〉가 더 대접받는 셈이다.

까삘라성에서 만난 노수행자는 성을 지키는 것을 수행으로 여기고 있다.
까삘라성 동문 밖 슛도다나왕·마야부인 스투파
어쨌든 일행은 틸라우라꼬트를 가고 있는 중이다. 그곳에 슛도다나왕과 마야부인의 스투파가 있다고 하니 더욱 흥미가 느껴진다. 이번에는 몇 번 간 적이 있는 인도의 삐쁘라하와는 가지 않으려고 한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까삘라왓투국은 주위가 4천여 리다. 빈 성이 여남은 개 되고 이미 황폐함이 심하다. 왕성도 퇴락하여 둘레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그 안의 궁성은 주위가 14, 5리 된다.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기초는 아직도 높고 견고하다. 황폐한 지 오래 되어 사람들도 드문드문 살고 있다.’

버스가 서문 입구에 멈춘다. 성 입구에 농가가 몇 채 있고 한 농가에서 시골아낙이 짜파티를 구워 팔고 있다. 배가 부른지 먹고 싶은 마음은 나지 않는다. 서문을 지나니 원두막 규모의 조그만 힌두사원이 하나 보인다. 그리고 그 앞 궁성 터에 네팔의 노수행자가 보인다. 5년 전에 만나 동문까지 안내해 주었던 그 노수행자다.

나는 노수행자에게 합장의 예를 표하고는 마음을 내어 보시를 한다. 안경 속의 눈은 그때나 지금이나 지그시 감고 있는 모습이다. 까삘라성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노수행자에게는 오롯한 수행이리라.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싯다르타 태자의 일화가 전해지는 장소에도 반드시 스투파가 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만 간추려보면 이렇다. 싯다르타 태자가 요즘말로 얼짱, 몸짱이었다는 기록이다.

‘성 남문에 스투파가 있다. 태자가 사꺄족의 청년과 씨름을 하고 코끼리를 내던진 곳이다.’

사꺄족의 청년이란 데와닷따이다. 데와닷따가 싯다르타 태자와 씨름을 해서 지고 난 뒤, 분한 나머지 성 밖에서 싯다르타 태자를 태우려고 마중 나온 코끼리를 죽여 길을 막아버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길에 모여들자 이복동생 난다가 죽은 코끼리를 치우려고 끙끙대다가 싯다르타 태자를 만나 전후 사정을 얘기했다. 그러자 싯다르타 태자가 죽은 코끼리를 불끈 들어 성 연못 저편으로 던져버렸는데 그 자리에 구덩이가 파여 상타갱(象墮坑)이라고 불려지고 있다는 일화다.

태자가 12세 때 농경제에 참가하여 흙 속의 굼벵이가 새의 먹이가 되는 약육강식의 장면을 보고 괴로워하면서 잠부나무 그늘로 가 선정에 든 바 있는데, 그 자리의 스투파도 현장은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뒤 죽림정사에 계실 때 까삘라성을 방문한바 부처님이 머물렀던 니그로다수 동산에도 스투파가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성 남쪽 3, 4리 니그로다수 동산에 스투파가 있다. 아쇼까왕이 세운 것이다. 석가여래가 정각을 얻고 나서 부왕에게 설법한 곳이다. 슛도다나왕(정반왕)은 여래가 유혹하는 마군을 항복시키고 정각을 이룬 뒤 곳곳을 돌아다니며 교화하고 있음을 알고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 예를 다하여 마중 나갈 수 있도록 원했다.(중략) 왕과 종신들이 부처님을 경배하자 부처님은 그들과 함께 니그로다 승가람에 머물렀다. 그 옆 멀지 않은 곳에 스투파가 있다. 여래가 큰 나무 아래서 동쪽으로 향하여 앉고서 이모(마하파자파티)에게 금란가사를 받은 곳이다. 이와 나란히 있는 스투파는 여래가 여덟 명의 왕자와 오백 명의 사꺄족 청년을 득도시킨 곳이다.’

까삘라성 주변의 스투파들은 대부분 아쇼까왕이 조성한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이를 보아도 아쇼까왕이 부처님을 얼마나 흠모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쇼까왕이 부처님의 전 생애를 제자의 마음으로 샅샅이 들여다보고 감동에 겨운 나머지 스투파나 석주를 조성했다는 사실이다.

현장이 까삘라성에 갔을 때도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는 정사에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출가한 사문(沙門)의 모습인 사문유관상(四門遊觀像)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사문유관은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라 싯다르타 태자 시절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사문유관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답사일행은 동문 밖으로 나가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5년 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는데, 최근에야 동문에서 15분쯤 걸어가면 슛도다나왕과 마야부인의 스투파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던 것이다. 이따금 농기구를 든 농부들과 마주친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힘들어 보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다.

주어진 삶의 무게에 순종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윽고 농로 끝에 슛도다나왕과 마야부인의 스투파가 나타난다. 그런데 부처님의 부모님 묘소치고는 초라하다. 규모로 보아 아쇼까왕이 조성한 것 같지는 않다.

까삘라성 서문. 싯다르타 태자는 까삘라성 서문 밖에서 인간의 죽음을 보고 번민했다.
슛도다나왕 득도처에 세워진 아쇼까왕 석주
일행은 다시 아쇼까왕 석주를 찾아 나선다. 역시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안내받는다.
‘성에서 남쪽으로 오십여 리를 가면 옛 성에 이른다. 스투파가 있다. 사람 수명이 6만세 때 끄라꿋찬다(구류손불, 과거칠불 중 네 번째)가 탄생한 성이다. 여래가 깨달음을 얻은 뒤 아버지를 만난 곳이다. 스투파에는 여래의 유신사리(遺身舍利)가 들어 있다. 앞에 높이 30여 척 되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위에 사자상이 조각돼 있고 옆에는 적멸의 사적이 적혀 있는데 아쇼까왕이 세운 것이다.’

또, 이 과거불이 탄생한 곳에서 동쪽으로 삼십여 리를 가면 낡고 큰 성에 이르는데 그 성 안에도 스투파가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람 수명이 4만세 때 까나까무니(구나함모니불, 과거칠불 중 다섯 번째)가 탄생한 성으로 동북쪽 멀지 않는 곳에도 또 다른 스투파가 있는데 슛도다나왕이 깨우친 곳이며, 북쪽에도 스투파가 있는데 여래의 유신사리가 들어 있고, 그 앞에는 높이 20여 척의 아쇼까왕 석주가 있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그러고 보면 아쇼까왕은 부처님이 슛도다나왕을 만난 곳에도, 슛도다나왕을 깨닫게 한 곳에도 스투파와 석주를 조성했다는 것인데 새삼 아쇼까왕의 진지한 순례와 열정적인 믿음에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일행은 틸라우라꼬트를 떠난 지 잠시 후에 벌판에 내린다. 니그리하와(Niglihawa)라는 곳이다. 아쇼까왕 석주가 부러진 채 보호각 속에 누워 있다. 이 석주의 명문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자비로운 삐야다시왕(아쇼까왕)은 왕위에 오른 지 14년에 꼬나까마나부처님(구나함모니불 )의 스투파를 먼저의 크기보다 두 배로 증축하였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지 20년(추정)에 이곳을 방문하여 참배하고 돌기둥을 세웠다.’

그러니까 일행이 서 있는 장소는 과거칠불 중 구나함모니불이 탄생한 옛 성이며 부처님이 부왕인 슛도다나왕을 깨우치게 한 장소이다. 아쇼까왕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스투파를 크게 중축하고 석주를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 보아 아쇼까왕 시대에 이미 과거칠불 사상이 까삘라성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고 또한 사까족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다고 믿어진다. 동강 난 석주에 그려진 공작새가 이채롭다. 공작새는 마우리아왕조를 상징하는 국조(國鳥)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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