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860년 철감선사 도윤 개창 광주 명승지 1호의 문화유산 도량 해마다 오백전서 ‘오백나한제’ 열려 90cm높이의 철조 비로자나불 ‘압권’ 며칠 차가운 바람이 불더니 다시 봄 맞이를 하듯 따뜻한 기운이 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꽃바람이 아직 내륙에는 닿지 않았지만 사람들 옷차림의 변화는 벌써 민감하다. 날씨가 풀리고 꽃이 피면 사람들은 산과 들로 꽃구경을 간다. 빛고을 광주 시민들은 무등산을 간다. 시민이라면 한번쯤 무등산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친근한 곳이 무등산이다. 무등산(無等山)이란 명칭은 고려 때부터 불려진 이름으로,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이다. 불교적으로는 ‘부처님은 세간의 모든 중생과 같지 않으므로 무등(無等)한 것이요, 부처
황포요괴 술수에 변해 보상국서 처형 기다려 거룩함 속에 타락 묘사 덜떨어진 지혜지만 지혜가 앞장서던 길과 계율 잘 안 지키는 욕망에 따라가는 길이 같을 수가 있나. 손오공 쫓아낸 현장법사 일행, 제 발로 요괴 소굴에 떨어진다. 아무리 눈이 어둡기로 그럴 수가 있냐구? 당연히 있지! 이야기를 들어 봐!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삼쾌선생이 요약 압축 실력을 좀 발휘해야 할 듯~ 저팔계 먹을 거 찾는다고 나서서 농땡이, 낮잠 쿨쿨~ 그 저팔계 찾아 나선 사오정 이리저리~ 둘레둘레~ 혼자 기다리던 현장법사, 이리 저리 산보삼아 걷다가 거룩한 불탑을 보았네. 환희심 내어 찾아들고 보니 황포(黃袍)요괴라는 흉악한 요괴의 소굴~ 당연히 덜커덕 잡혀 다음 끼 식사거리로 대기~ 그런데 황포요괴, 요괴
아무리 소통 중요해도 잘못된 표현은 경계해야 무심결에 범하기 쉬워 긍정ㆍ존중하며 표현할 것 ? 표현에도 공식이 있다. 아무리 소통이 중요하지만 잘못된 표현은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악성표현이 그것이다. 악성표현의 예는 수없이 많다. 불필요한 말을 계속 늘어놓는 수다형 표현, 말만하면 불평을 쏟아내는 불평형 표현, 거지처럼 계속 궁상만 떠는 궁상형 표현, 말하는 내내 자기자랑만 늘어놓은 자기과시형 표현 등 악성표현은 우리들 주변에 차고 넘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악성표현은 5가지가 있다. 첫째, 사오정형 표현이다. 예를 들어 사오정1과 사오정2가 길거리에서 만났다고 치자. 사오정2에게 사오정1이 먼저 말을 건다. 사오정1: 사오정2야, 너 목욕 가니? 사오정
가장 오래된 수령 630년 선암사 백매 가장 일찍 피는 고매, 통도사 자장매 검붉은 색채가 인상적인 화엄흑매 절집 고매의 꽃과 향은 세세생생의 헌공 선암사 백매 홍매, 탐매기행 일번지 메마른 나뭇가지에 꽃이 핀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사태다. 마음 속 한 물건이 청정해지면 우주법계가 청정해지는 법이다. 한 꽃이 피니 수 백 수 천의 꽃이 핀다. 매화는 그 봄의 경이로운 사태를 기별한다. 일지매(一枝梅)의 가지, 봄의 마중물이고, 봄의 직지(直指)다. 매화향을 일러 암향(暗香)이라 한다. 달무리의 교교한 기운이 흐르고 사위가 적막할 때 비로소 스며드는 은은한 향기인 까닭이다. 문인 묵객들이 고매(古梅)를 찾아 잔설이 남은 산야를 소요하는 것을 두고 탐매(探梅), 또는 심매(尋梅)라 한다. 꽃과
현장법사와 손오공 갈등 생겨 가짜 손오공 나타나 다툼 발생 서원 없다면 욕망의 힘 줄여야 이번에는 서유기의 독특한 ‘손오공 축출사건’을 좀 제대로 다루어보기로 했죠? 단순한 자기의 분열과는 다른, 서유기의 자기 분열사태를 좀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우선 현장법사는 자비심은 충만하지만 사태의 진상을 보는 눈은 부족하군요. 요괴가 분장하고 나온 것을 전혀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 반면 손오공은 요괴의 간사한 수법은 한 눈에 꿰뚫어 보지만 자비심은 부족합니다. 여기서 갈등이 빚어지는군요. 손오공의 성급한 손은 단매에 요괴를 때려죽여버리고, 눈 밝지 못한 현장법사는 이를 용서하지 못하네요. 그래서 손오공 머리테 조이는 긴고주를 막 외워대고…. 이런 일이 세 번 벌어지고, 결국 요괴를 잡지만 손오공이 쫓겨나지
작품 활동 중 禪사상 접한 철학도 ‘ZERO운동’ 핵심 멤버로도 참여해 물감대신 불을 이용한 작픔 세계는 삼독·번뇌 태우려는 구도심을 의미 “삶의 존재 가치 찾아 나선 예술가 禪을 통해 세상의 평화·자유 꿈꾸다” 작업실에 등장하는 불꽃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불꽃은 시간이 흐르면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즉 물감 대신에 불을 사용하여 작업을 하는 작가가 있다. 오토 피네(Otto Piene, 1928~2014, 독일)은 삶의 방향에 전환을 가져다줄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미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선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후 쾰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도한 그는 ‘ZER
계학(戒學)의 존재 이유가 스스로의 확신에 따라 도덕적 완성을 지향해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일상의 행위를 스스로 조심하고, 단속하고, 제어하는 길로 ‘계학’을 정의해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계(戒)’의 의미를 본연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으로써, 불교 공부의 전 과정에서 계학의 의미를 밝히고 그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필요한 설명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안목만으로는 오늘에 필요한 계의 의미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다. 현실적인 측면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까닭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한 사람들에게 ‘도덕성, 정신적 성숙, 떳떳함’이라는 말은 그저 위선으로 포장된 무익한 설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오늘날처럼 유례없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말이 얼마나 의미
동몽교관 임명에 禮 안 갖추고 자유로운 기질로 벼슬 그만둬 충심 담은 직언에 귀양 당해도 가난한 백성에 연민 잃지 않아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에게는 시(詩)로 인해 변고를 겪은 일이 흔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절창(絶唱)의 시를 남겼기 때문에 이름을 남긴 경우도 흔하다. 조선 중기에 문필가로 손꼽히는 석주 권필(石洲 權?, 1569~1612)도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자유로운 기질의 소유자로 구속을 싫어했다. 그는 한때 가난을 염려한 동료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음에도 상부에 예를 갖추지 않은 채 곧바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런 그의 기질이나 “관대를 하고 예조에 나아가 예를 갖추라”는 말에 “그런 일을 잘 못한다”고 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던 그의 처세는
이제 이 마을에서 내 편은 한 명도 없다. 내게 친절하게 대해줬던 유일한 사람, 담임선생님의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의 입술은 예전처럼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 속에는 차가운 바람이 휑하니 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보겠니?” “저는 그냥 윤호가 태권도를 가르쳐달라고 해서 발차기를 하다가 실수로 얼굴을 찬 거예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때리려고 했다면 왜 교실에서 그랬겠어요. 안 그래? 송윤호?” 눈이 마주치자 윤호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 코피가 멎지 않은 모양이었다. 콧속을 틀어막은 솜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윤호 티셔츠에도 교실 바닥에도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는 없었는데. 후회는 언제나 뒤
절집에 들어가 가방과 옷을 아무렇게나 내려두고 방문을 열었다. 시원한 산 공기를 깊게 마셔본다. 냄새, 맛 등에 크게 민감하지 않지만 확실히 도시의 공기와는 다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소리, 밤새 소리, 풀벌레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지만 각각의 소리가 분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고, 음악처럼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언제나 이렇게 절집에서의 시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내 앞에 펼쳐든다. 오늘은 어떤 카드를 고를 것이냐고 느긋하게 달이 묻는다. ?
바람 부는 날 눈이 쌓이고 있다. 싸락눈이다. 한결 바람도 차갑게 느껴진다. 오후 5시 반, 산사엔 어둠이 빠르게 찾아든다. 산자락에 어둠이 깃들 이 때쯤이면 산은 텅텅 빈 채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비어있음의 적멸의 의미를 일깨워주며 적조로움의 편안함을 내게 안겨준다. 슬프나 슬프지 않고, 쓸쓸하나 쓸쓸하지 않게 비워둠의 여유를 일깨워 주고 있다. 습관처럼 나무침대에 앉아 졸고 있지만 화두는 새가 되어 추억의 숲을 날고 있다. 어린 시절의 코흘리개 아이가 절집에 온 후, 잔심부름으로 시작해 밥 짓고, 국 끓이고, 반찬 장만하며 길고 긴 5년이라는 세월을 넘기게 된다. 아이의 얼굴이 태어날 때부터 수상쩍게 생긴 탓도 있지만 승려 될 수 있는 기회를 대학 나오고, 고등학교 졸업자인 잘 생긴 행자들에게
중생에게 번뇌가 거듭됨은 자신을 위해 보시하기 때문 ?己施一切 得報如芥子 (위기시일체 득보여개자) 救一厄難人 勝餘一切施 (구일액난인 승여일체시) ?星雖有光 不如一月明 (중성수유광 불여일월명) ?生垢心重 所施恒?己 (중생구심중 소시항위기) 菩薩悲心施 如灰去?穢 (보살비심시 여회거중예) 救濟慈悲施 普?群生類 (구제자비시 보위군생류) 如是慈悲施 功德無窮盡 (여시자비시 공덕무궁진) 如此微妙施 安樂諸?生 (여차미묘시 안락제중생) 번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체에 보시하는 것은 개자(겨자) 씨만큼의 과보를 얻을 뿐이지만, 한 명의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나머지 일체에 보시하는 것만큼 수승합니다. 뭇 별들이 비록 빛을 내지만 하나의 달의 밝음 같지 않듯이, 중생에게 번뇌심이 거듭되는 것은 늘 자
신라 원효대사 해골물 일화 마음에 ‘생각’ 일어나는 것 오염에 본래청정 변치 않아 신라 때 원효 스님의 일화가 있다.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에 가던 도중에 노숙을 하게 된 원효 스님은 한밤중에 잠을 자다 갈증이 일어나 잠에서 깼다. 어둠 속에서 물을 찾아 헤매다 마침 조그마한 웅덩이에 고인 물이 손끝에 감지되어 입을 대고 마셨다. 갈증을 해소하고 다시 잠을 잔 뒤 이튿날 깨어 길을 떠나려다 보니 어젯밤에 마셨던 웅덩이의 물은 해골에 썩어 고여 있는 물이었다. 갑자기 원효 스님은 속이 메스껍고 구토증세가 올라옴을 느꼈다. 그 순간 원효 스님의 뇌리에는 한 생각이 섬광처럼 번쩍하며 스쳤다. 해골 썩은 물이라는 사실을 안 탓으로 비위가 상한 것이었다. 모르고 지나쳤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인데 해골을
천주교 수녀님과 강연 차 강원도에 가는 길이었다. 대관령을 넘어 갈 즈음 폭설로 차가 멈췄다. 세상은 하얀 눈으로 덮여 은세계가 펼쳐졌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차갑고 맑은 공기가 흘러들어 왔다. 멀리 산에서 무언가 꼬물꼬물 내려와 지켜보는데 수녀님이 먼저 소리쳤다. “어머나, 토끼예요!” 배가 고파 먹이를 구하러 내려왔을까, 폭설에 길을 잃었을까, 어디로 갈지 몰라 겅중거리다 멈춰 서서 귀를 쫑긋거리는 토끼를 보고 저마다 귀엽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차에 동승한 누군가가 말했다. “통통하니 맛있겠는걸요.” 듣기 거북했지만 농담이려니 하며 조금 웃고 말았다. 토끼고기를 먹어본 이는 토끼를 맛으로 기억한다. 바로 업(業)의 결과이다. 업이란 인과관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
‘도덕적 완성의 지향’을 ‘계(戒)’로 정의하면, 종교에서 지켜야 할 규율이나 금기사항 정도로 불교의 계율을 잘못 이해하는 수준은 넘어설 수 있다. 곧 계(戒)를 지킨다는 것은 특정한 규율이나 금기사항을 언제 어디서나 의심 없이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정신을 이해하고 이해한 것의 본연을 살펴, 확신에서 비롯하는 마음가짐을 언제나 지켜가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계학의 존재 이유, 즉 스스로의 확신에 따라 도덕적 완성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와 동기를 분명히 하려면 ‘계(戒)’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생명체라면 무엇이나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바람을 토대로, 스스로 살아있음을 한껏 누리고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드러내고 싶은 바람을 지니고 있음을 먼저 생각해보자. 이를
선 분류·우열 두고 100년 논쟁 ‘선 수승 주장’ 백파에 초의 반박 中 없는 ‘진귀조사’ 관념 계승돼 禪과 敎 병렬구도 한동안 이어져 ? 19세기에는 선의 분류와 우열 관계를 둘러싸고 거의 100년간에 걸친 선 논쟁이 펼쳐졌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은 3종선 분류를 주창한 백파 긍선이었고, 이에 대해 초의 의순이 반박하면서 논란이 이어졌다. 거시적 관점에서 선 논쟁은 교학의 성행, 특히 18세기 화엄교학 이해의 심화가 선종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고, 따라서 그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선 논쟁에서는 선의 종류를 나누고 상호 관계를 설정하면서 선에 대비되는 교, 그 중에서도 화엄의 위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화 되었다. 선
갈등과 선택은 인생의 필수과정 자기집착서 벗어난 바른 선택 필수 자기자신의 친구가 되는 성찰 중요 자기와 자기가 서로 다툰다! 이거 정말 큰 문제죠. 그게 극단으로까지 치달으면 정신분열로 가는 건가요? 그런 정신과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마음속에서 자기와 자기가 서로 다투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내적인 갈등이라고 부르는 경우지요. 내적인 갈등을 격지 않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내적인 갈등 가운데 가장 흔하게 오는 경우가, 두 가지 욕구가 충돌하는 경우지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다중의 욕구가 충돌하면……. 굉장히 심각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여러 욕구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들도 이런 내적인 갈등은 흔히 겪으시죠? 그리고
용문의 인연 따라 대장전 세운 설화 연화대 위에 극적으로 조성한 윤장대 회전축, 마루바닥 밑에서 천정까지 관통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회전개방 대장전, 장경각, 판전의 건물들 불교에서 말하는 법은 부처께서 깨쳐서 드러내신 반야, 곧 진리 그 자체다. 부처님은 생애 45년 동안 중생제도를 위해 법을 설하고 몸소 전도하셨다. 연기법과 사성제, 팔정도(八正道) 등에 대한 부처님의 반야바라밀행을 일컬어 ‘법의 수레바퀴를 구르셨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을 ‘전법륜(轉法輪)’이라 부른다. 장엄미술에서 법륜은 보통 중앙에 원형의 연판을 갖추고 팔각의 부채살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는 수레바퀴 형태다. 부처님 입멸 후 무불상시대에 법륜은 만(卍)자 문양 등과 함께 붓다를 상징하는 조형언어였다.
17세기 후반 활동한 조각승 호남 색난, 영남 승호와 다른 계보 목불을 주로 조성 문헌 통해 활동 시기·지역 가늠 경기와 영서 중심으로 활동하며 조각승 혜희를 계승한 직계 제자 상주 운봉사 괘불 조성 시주 17세기 후반에 호남의 색난(色難) 스님, 영남의 승호(勝湖) 스님 등과 같은 시기에 중부지방인 경기(京畿)와 영서(嶺西)에서 활동한 금문(金文)스님은 17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혜희(惠熙, 慧熙) 스님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彫刻僧)이다. 금문 스님은 스승 혜희와 마찬가지로 주로 나무로 불상을 제작하면서 불교공예품 등을 중수였다. 현재 금문 스님이 우두머리가 되어 만든 목조불상은 전국에 걸쳐 3건 20여 점이 조사되었다. 아직까지 금문 스님은 언제 태어나서 열반에 들었는지 등 조각승이 된
신라 제 28대 진덕여왕 원년(647) 자장율사가 창건 만해 스님의 〈님의 침묵〉 〈불교 유신론〉 등 집필처 전두환 前 대통령 부부 유배생활 한 곳으로도 유명 수좌들 수행처…무금선원 무문관, 기본선원 갖춰 2월 21일 동안거 해제법회가 있는 날 찾은 백담사는 적막했다. 세찬 바람소리만 지나다닐 뿐 고요하다. 백담사는 내설악으로 오르는 길잡이다. 백담사를 거쳐 계곡을 계속 오르면 영시암이 나오고 마등령쪽으로 오르면 오세암, 수렴동대피소를 지나 구곡담으로 해서 오르면 봉정암이다. 봉정암은 해발 1,244m로 높기도 하거니와 가는 길이 험해 눈 쌓이는 겨울철엔 일반인들의 출입이 수시로 통제된다. 이곳에 있는 5층 석탑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뇌보탑이다. 탑 아래로 펼쳐진 장엄한 설악능선이 장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