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석주 권필
17. 석주 권필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6.03.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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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의 道 구하며 살아간 야인

동몽교관 임명에 안 갖추고
자유로운 기질로 벼슬 그만둬
충심 담은 직언에 귀양 당해도
가난한 백성에 연민 잃지 않아

▲ 송시열이 지은 권필 ‘묘갈명(墓碣銘)’ 〈사진출처=국조인물고〉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에게는 시()로 인해 변고를 겪은 일이 흔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절창(絶唱)의 시를 남겼기 때문에 이름을 남긴 경우도 흔하다. 조선 중기에 문필가로 손꼽히는 석주 권필(石洲 權, 1569~1612)도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자유로운 기질의 소유자로 구속을 싫어했다. 그는 한때 가난을 염려한 동료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음에도 상부에 예를 갖추지 않은 채 곧바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런 그의 기질이나 관대를 하고 예조에 나아가 예를 갖추라는 말에 그런 일을 잘 못한다고 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던 그의 처세는 이미 세상과 동떨어진 생애를 살았던 그의 일면을 드러낸 셈이다. 도연명의 기개를 닮아서일까 아니면 그가 살았던 시대가 난세였기 때문일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광해군의 비였던 유씨 일족들이 권력을 전횡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유비(柳妃)의 오라버니 유희분(柳希奮)의 전횡은 도를 넘었다. 그러므로 임숙영(任叔英)책문(策文)을 지어 유씨 일가의 방종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과거에 떨어지는 변고가 생겼다. 이로 인해 세상의 의기 있는 선비는 비분강개했다. 권필의 궁류시(宮柳詩)’는 이를 배경으로 지은 풍자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궁궐 버들 푸르고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宮柳靑靑鶯亂飛)성안에 가득한 높은 사람 봄 햇살에 아첨하네(滿城冠蓋媚春暉)조정에서 함께 태평의 즐거움을 축하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누가 바른말 하여 평민으로 쫓겨났나(誰遣危言出布衣)

이 시에서 궁중 안의 버들은 광해군 비 유씨 친족들을 은유한 것이다. 아첨하는 조정의 대신들이야 태평성대를 감축했지만 결국 이는 거짓일 뿐이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위언(危言, 바른 말 혹은 충성스런 간언)은 충심을 품은 선비의 도리이다. 바로 임숙영은 충간(忠諫)으로 평민이 된 동량(棟樑)이었음을 풍자하고 있는 셈이다. 권필은 이 궁류시(宮柳詩)’로 모반에 연루되어 광해군의 친국을 받았고 귀양하던 길에 그를 동정하던 사람들이 주는 술을 거절하지 않고 마셨으니 결국 그의 죽음은 폭음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진정 술을 이기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시절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떠난 것인가. 난세의 옹졸함은 강개한 인물을 시들게 하는 함정인 듯하다.

한때 정철의 문인으로, 총망 받았던 그의 자는 여장(汝章)이며 석주(石洲)는 그의 호다. 사찰을 유람하며 승려들과 나눈 시문이 여러 편 전할 뿐 아니라 차를 즐겼던 인물이다.

송시열이 쓴 그의 묘갈명(墓碣銘)’에는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는 데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평소 가난한 백성에 대한 연민을 드러냈던 그는 상대적으로 지배층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런 그의 태도는 그의 저서 답송보서(答宋甫書)매번 고관대작의 집을 만나면 반드시 침을 뱉고 지나가고, 누추한 거리의 초라한 집을 보면 반드시 서성이며 돌아보면서 팔을 베고 누워 물만 마시고 있더라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사람을 본 듯이 생각했다(每遇朱門甲第則必唾而過之 而見陋巷蓬室則必徘徊眷顧 以想見曲肱飮水而不改其樂者)”고 한 대목에서 확인된다.

아울러 답송보서(答宋甫書)에는 장차 산야에 물러나 마음을 거두고 성정을 길러 옛사람이 말한 도라는 것을 구하고자 했다(思將退伏山野 收心養性 以求古人所謂道者)”고 하였으니 그가 야인으로 살고자 했던 연유를 충분히 드러낸 셈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가 고인의 도를 구하며 열독했던 책들은 임종 시에 그의 곁을 지켰던 근사록(近思錄), 주자전서(朱子全書)등이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올곧은 선비였다. 국난에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의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궐에 나아가 상소했던 일이나 일본과 화의(和議)를 주창하며 임금에게 아첨한 정승의 목을 벨 것을 요청했던 것에서 확인된다.

▲ 석주 권필 유허비.
한편 그가 고결한 선비였음은 그의 스승 정철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바로 귀양길에 오른 스승을 찾았을 때에 정철은 권필을 보고 내가 오늘 천상의 신선을 보았으니 이번 행차가 어찌 다행스럽지 않은가라는 대목이다. 특히 그는 삶이 소박해서인지 몇몇의 승려들과 깊이 교유했던 흔적뿐 아니라 사찰을 유람했던 흔적을 남겼다. 그의 문집 석주집(石洲集)에 의하면 수증사(修證寺)와 백련사(白蓮寺), 영통사(靈通寺) 등을 유람하며 지은 시와 잠 스님, 원 스님, 범림 스님, 송도의 의 스님과도 교유하며 화답한 시가 남아 있다. 지면관계 상 다 소개할 수 없기에 우선 잠 스님이 종이를 보내며 (그의) 시를 찾기에(岑上人送紙索詩)’라는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평생에 짚신이 몇 켤레나 닳았을까(平生幾兩鞋)청한한 것은 그대 혼자뿐이요(淸閑君也獨)골몰하는 것은 세상이 모두 그렇네(沒世應皆)피안의 세계엔 도달하기 어렵나니(彼岸難容到)진공에 어이 올라갈 수 있으리오(眞空可得階)이 늙은이는 재주와 힘이 줄어들었으니(老夫才力退)수송패에 비하면 몹시 부끄럽구나(深愧水松牌)

실로 사람은 무엇을 찾으려고 길을 헤매는 것일까. 수 켤레의 짚신이 닳아 해지도록 이리저리 찾아 헤맸던 건 아마도 뜬 구름 같은 부귀와 명성일 것이다. 그러므로 속인은 언제나 마음이 혼란하고 밖으로 향해 있는 법이다. 따라서 맑고 고요할 수 있는 건 그대 잠 승려뿐이란다. 세상일에 분주한 사람은 피안(이상세계)의 세계에 도달하기 실로 어렵다. 그런데 어찌 진공의 세계를 도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재주와 근력이 쇠락해진 사람인데도 잠 승려가 시를 청한 것은 수송패에 비하면 몹시 부끄럽구나(深愧水松牌)”라고 하였다. 그럼 수송패란 무엇인가. 운산잡기(雲仙雜記)수송패(水松牌)’에 그 내력을 이백이 자은사(慈恩寺)를 방문했을 때 천하의 문장가에게 시를 받고 싶었던 자은사의 승려는 오교분(吳膠粉)을 바른 수송패(水松牌, 소나무로 만든 패)를 이백에게 바치며 시를 청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백이 소송패에 시를 지어주니 자은사 승려는 그 답례로 현사발(玄沙鉢), 녹영매(綠英梅), 단향필격(檀香筆格), 난겸고(), 자경상(紫瓊霜) 등 귀중한 물품을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잠 승려가 권필에게 종이를 보내 시를 청한 일은 마치 자은사 승려가 이백에게 시를 청한 것과 비견되는 일임을 은근히 드러낸 것은 아닐까. 하여간 권필은 이백처럼 시에 능한 사람이 아니기에 부끄럽다는 것이리라.

아울러 그는 유무에 대한 관점과 논리를 위한 논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그가 법림 승려에게 써서 보이다(書示法林上人)’에서 도란 것은 종래 의심을 풀지 못했으니(此道從來未決疑)/ 분분한 의논들 어느 것이 참임을 아는가(紛紛何者是眞知)/ 신령한 근원은 바로 기심(機心)을 잊는 데 있고(靈源政在忘機地)/ 오묘한 법은 원래 말 없을 때에 있는 법이라(妙法元存不語時)/ 유를 말하고 무를 말하는 것 모두 환망이요(說有說無都幻妄)/ 마음을 보느니 본성을 보느니 (하는 말은) 더욱 지루하여라(觀心觀性轉支離)”라고 한 대목에 또렷이 드러난다. 더구나 그는 불이문(不二門)의 경계를 “6년 동안 고통스러워 말을 잊었으니(六年辛苦已忘言)/ 모든 일이 다 불이문으로 돌아갔네(萬事都歸不二門)”라고 노래한 바가 있었으니 그는 실로 불교의 원리를 요해(了解)했던 선비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불교를 이해했던 선비로 차를 즐긴 인물이라 하겠다. 그가 차를 즐긴 정황은 고석당명(古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우연히 땅에서 묻혀 있던 돌솥을 자신의 곁에 둔 연유도 분명하게 밝혀두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집종이 밭에서 땅을 파다가 괴이한 물건을 얻었는데 (돌솥을) 두드리니 소리가 맑았다. 묻어 있는 흙 자국을 파내니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이는 작은 돌솥이었다. 돌솥의 손잡이는 (길이가) 3촌쯤 되고 2승 정도를 담을 수 있을 만하였다. (돌솥을) 모래로 닦아내고 물로 세척하니 빛나고 깨끗하여 아낄 만하여 내 곁에 두게 하고, 차를 끓이거나 약을 달이는 도구로 사용하게 하였다. 때때로 (돌솥을) 어루만지며 희롱하기를 돌솥아, 돌솥아 하늘이 돌을 만들어 준 것이 몇 해이던가. 솜씨 좋은 장인이 깎아서 돌솥을 만들었네. 사람의 집에서 사용한 지가 또한 몇 해이던가, 흙 속에 묻혀 세상에서 쓰지 못한 것이 몇 년이던가. 그런데 지금 내가 얻게 되었으니 아! 돌은 만물 중에 가장 천하고 또 단단한 것이라. 그 드러나지 않고 드러난 사이를 셈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가장 귀하고 신령한 것에 대해 서랴. 마침내 명을 지어 새긴다. 이 돌솥을 얻은 날은 을미년(1595) 정월 16일이고 글을 쓴 날은 정월 23일이다. ()에 버려두면 돌이고 사용하면 그릇이라고 하였다. (女奴於田中掘地 得一物塊然 叩之聲 土痕剔蘚紋 乃小石也 柄三寸 中可受二升許 沙以磨之 水以滌之 光潔可愛 余命置諸左右 以供烹茶煮藥之具 時復摩以之曰 乎 與天作石者幾年 巧匠而器之 爲人家用者又幾年 埋在土中 不見用於世者又幾年而今爲吾所得 噫 石 物之最賤且頑者 其隱顯之間 不能無數也如此 況最貴最靈者耶 遂作銘以刻之 得之日 乙未正月十六 銘之日 其月之二十三 銘曰 捨則石 用則器)

그가 돌솥을 얻는 해는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차와 약을 끓이기에 알맞은 돌솥을 얻어 곁에 두고 완상하는 즐거움을 글()로 지었던 것이다. 그가 돌솥을 얻는 날은 1595116일이고, 돌솥에 대한 글을 쓰고 새긴 날은 정월 23일이었다. 일주일 만에 돌솥에 명문을 새겨 하찮은 돌이 귀품으로, 돌솥으로 거듭 변화하는 과정을 소상히 기록해 두었다. ! 만물은 그 때를 만날 때에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가 버려두면 돌이고 사용하면 그릇이 된다(捨則石 用則器)”는 말은 그 이치를 뜻하는 것이다. 그가 초야에 묻혀 출사(出仕, 벼슬에 나아가는 것)를 즐겨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시절의 인연을 짐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천시(天時)를 얻는 것보다 때를 얻는 일(得時)이라 중요하다는 말은 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던 듯하다. 그는 저술로 석주집외에도 한문소설인 곽색전(郭索傳)〉 〈장경천전(章敬天傳)〉 〈주생전(周生傳)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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