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수녀님과 강연 차 강원도에 가는 길이었다. 대관령을 넘어 갈 즈음 폭설로 차가 멈췄다. 세상은 하얀 눈으로 덮여 은세계가 펼쳐졌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차갑고 맑은 공기가 흘러들어 왔다. 멀리 산에서 무언가 꼬물꼬물 내려와 지켜보는데 수녀님이 먼저 소리쳤다. “어머나, 토끼예요!”

배가 고파 먹이를 구하러 내려왔을까, 폭설에 길을 잃었을까, 어디로 갈지 몰라 겅중거리다 멈춰 서서 귀를 쫑긋거리는 토끼를 보고 저마다 귀엽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차에 동승한 누군가가 말했다. “통통하니 맛있겠는걸요.”

듣기 거북했지만 농담이려니 하며 조금 웃고 말았다. 토끼고기를 먹어본 이는 토끼를 맛으로 기억한다. 바로 업()의 결과이다. 업이란 인과관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이치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어떤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건강과 성품이 만들어진다. ‘어떤은 음식의 종류만이 아니다. 음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고 생각하는가. 이는 삶의 태도에 대한 바른 마음가짐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닿아 있다. 부처님께서 고민을 상담하러 온 이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라고 물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보통 사찰음식하면 채식을, 고기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한 번도 채식을 장려하고, 육식을 금하지 않으셨다. 부처님 시대, 수행자들은 탁발을 했다. 발우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음식을 얻어 생활하는 수행방식이다. 신도들이 보시하는 대로 먹어야 했기에 간혹 고기도 먹어야 했다. 그리고 그날 하루, 먹고 남은 음식은 모두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 주었다. 내일을 위해 먹을 것을 남기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렇듯 탁발은 아집을 버리고 절제하고 욕심과 탐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행이었다.

▲ 그림 박구원.
또 부처님은 육식에 대해서 몇 가지 당부를 하셨다. 첫째, 몸이 아플 때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 둘째,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공양한 것은 먹지만, 일부러 청해서 먹지 말라. 셋째, 삼정육을 먹어라. 삼정육은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고기로, 죽이는 모습을 보지 않고, 죽어가는 소리를 듣지 않고, 특별히 나를 위해 죽인 것이 아닌 경우이다. 육식에 대한 이런 기준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지고,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과 부합하여 고기를 먹지 말라는 대승보살계율이 제정되었다.

육식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찰음식을 말할 때 육식이냐, 채식이냐에 지나치게 갇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채식과 육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식(小食)’이라고 하셨다. 욕심에 대한 경계이다. 채식만 고집하는 것도, 고기는 절대 먹지 않겠다는 것도 모두 집착과 욕심이다. 이것이야말로 고()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사찰음식의 근본은 마음속 깨달음을 지향하는 선식(禪食)인 것이다.

내가 진행하는 사찰음식 강의는 보통 1년 과정이다. 시작할 때는 수업 동기를 묻지 않지만, 끝나는 날만큼은 꼭 소회를 묻는다. 이번엔 한 분이 이런 소감을 말해 괜스레 콧등이 시큰해졌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겠다고 선재 스님 사찰음식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강의를 들으면서 어느새 저는 삶의 수행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처음 사찰음식을 배우겠다고 스스로 찾아왔듯, 앞으로도 스스로의 행복, 나아가 세상의 모든 인연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행복을 함께 열어가는 보살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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